피터 윔지에게는 '귀족탐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귀족탐정 피터 윔지. 일반적으로 이런 호칭을 사용한다. 요즘 세상에 귀족은 웬 귀족?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지만, 피터 윔지가 탄생한 것은 20세기 초반의 영국이었다. 피터 윔지를 발굴한 작가 도로시 세이어스는 귀족 이미지를 풍기는 탐정을 만들기 위해 꽤나 고심했을 것이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 피터 윔지는 언제나 조용하고 점잖은 편이다. 큰소리로 웃는 경우도 드물고, 흥분하는 일도 없다.
언제나 주변 사람들에게 관대하다. 작가를 꿈꾸는 어린 소녀에게 꼭 할 수 있을 거라고 희망을 주기도 한다. 그는 영국에서 으뜸가는 귀족출신이면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
영국 귀족출신의 부유한 탐정, 피터 윔지피터 윔지는 고미술품에 관심이 많고, 범죄에 관한 연구에도 일가견이 있다. 범죄작가로서 명성도 높은 편이다.
<도둑맞은 위>에서 그는 <기묘한 조항과 그 영향>이라는 제목의 책을 쓰려고 준비중이었다. 형제도 있지만 그다지 절친한 사이는 아니다. 그의 가족들은 피터 윔지를 가리켜 '통제가 되지 않고 자제심이 부족하다'라고 비판한다. 그는 독신으로 등장해서 이후에는 결혼을 하게 된다.
<나인 테일러스>에서는 자신을 가리켜 매력적이고 부유한 독신남이라고 말한다. 4년 뒤의 작품인 <유령에 홀린 경관>에서는 결혼해서 아들을 얻게 된다. 피터 윔지는 그 아이를 보면서 '첫아기인 동시에 마지막 아기'라고 표현한다.
대부분 탐정이 그렇듯이, 피터 윔지도 다방면에 재능이 있다. 자동차 운전을 좋아하면서 때로는 말을 타고 들판을 달리기도 한다. 고전음악에 대한 지식도 많고,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교회의 명종술(鳴鐘術)에 대한 이해도 깊다. <나인 테일러스>에서는 직접 종루에 올라가 복잡한 규칙에 맞춰 종을 울리기도 한다.
서적에 대한 취미도 수준 이상이다. 그는 사건을 수사하면서 고서적에 등장하는 문장과 시구절을 하나씩 인용해서 말하기도 한다. 서적에 대한 피터 윔지의 지식이 워낙 해박하기 때문에, 이를 알고있는 범인 하나는 교묘하게 그 사실을 범죄에 이용하기도 할 정도다.
그렇더라도 피터 윔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역시 기묘한 이야기다. 그는 '이상한 사건'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 순간 흥미가 솟아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이상한 사건들은 대부분 잔인하고 기괴한 범죄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작품속에서 피터 윔지가 다루는 사건들의 상당수는 기이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들이다. 전쟁 중에 공습을 당한 이후로 왼쪽과 오른쪽이 뒤바뀐 남자, 스페인 피레네 산맥 깊숙한 곳에 떠도는 악마의 저주, 자신의 내장 전체를 유산으로 기증한 부자, 머리없는 마부가 머리없는 네마리 말을 몰고 달리는 마차 등. 마치 존 딕슨 카아를 연상할 만큼 괴기스러운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런 사건을 접하면 피터 윔지는 혼자서 깊은 생각에 빠진다. 현장에 직접 가서 들판을 걸어다니며 생각하는가 하면, 자동차 운전을 하면서 핸들을 잡고 고민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러 장소를 찾아다니면서 뒷조사를 하기도 한다. 번뜩이는 직관으로 사건을 해결하기보다는, 꾸준한 사고와 노력의 결과로 단서를 끼워맞추는 스타일에 가깝다.
기이한 수수께끼에 관심이 많은 탐정, 피터 윔지
그리고 수사를 위해서는 먼길을 나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마법사 피터 윔지 경>에서는 피레네 산맥으로 날아가서 온갖 복잡한 무대장치를 마련한다. <나인 테일러스>에서는 혼자서 프랑스로 건너가서 현지 경찰과 함께 활동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먼 여행에 들어가는 비용은 모두 자신의 돈으로 부담한다.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귀족인 만큼, 돈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는 그저 이상한 사건에 뛰어들어서 그것을 즐길뿐이다. 이 정도면 가진 자의 여유가 느껴지는 귀족탐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피터 윔지도 전적으로 혼자서 활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마빈 밴터라는 이름의 집사가 있다. 피터 윔지가 어디로 여행을 가든 항상 따라다니는 사람이다. 1934년 작품인 <나인 테일러스>에서 밴터는 15년째 피터 윔지에게 고용된 상태였다.
밴터는 피터 윔지가 하는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 불합리하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그를 전적으로 흠모하고 있다. 밴터에 대한 피터 윔지의 신용도 마찬가지다. 피터 윔지는 밴터를 가리켜서 '스핑크스를 연상시키는 인종'이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밴터는 항상 침착하고 어떤 경우에도 동요하는 법이 없다. 오랫동안 밴터와 함께 생활했지만, 피터는 여전히 밴터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다. 피터는 '밴터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일이 책 한권 분량은 될 거다'라고 말할 정도다.
그러면서도 피터는 사건을 수사하면서 밴터에게 여러 가지 일을 주문한다. 어떤 인물의 뒷조사와 미행을 시키는가 하면, 정체불명의 인물을 추적하기 위해서 우편물을 가로채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밴터는 특유의 입담과 기질로 그 일들을 수행한다. 밴터는 집사이면서 시종, 그리고 조수이기도 하다.
유머와 여유를 잃지 않은 탐정, 피터 윔지피터 윔지와 함께 활동하는 또 다른 인물은 런던 경시청의 주임경감인 찰스 파커다. 그는 오래 전부터 피터를 알고 지내온 친구이자, 사건해결을 위해서 함께 움직이는 동료이기도 하다.
파커는 난해한 사건이 생기면 피터에게 의논한다. 피터는 경찰의 조직력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파커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그렇게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고 나면 피터는 밴터 또는 파커에게 자신의 추리를 요약해서 설명해준다. 말하자면 피터 윔지와 집사 밴터, 경감 파커가 협력체제를 이루면서 사건을 해결해가는 것이다.
피터 윔지가 언제나 침착하고 신사적인 태도를 가지고 일사천리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그도 실수를 할 때가 있다. <나인 테일러스>에서 실수를 범하고는 자신을 가리켜서 '탐정견의 가죽을 쓰고 짖고 있는 바보'라고 표현한다. 증거물을 경찰에게 넘겨주면서 노골적으로 흐뭇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피터 윔지는 조용하고 점잖은 귀족이면서, 동시에 여유와 유머감각을 잃지않는 신사기도 하다.
이런 귀족탐정을 창조한 여성작가 도로시 세이어스는 애거서 크리스티와 함께 영국을 대표하는 여성추리작가다. 1893년 영국에서 태어난 도로시는 무척 여유있는 환경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어린시절부터 승마와 스케이트를 배웠고, 10대 때 라틴어와 프랑스어, 독일어까지 익혔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만큼, 도로시가 만든 탐정이 귀족의 이미지를 지닌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 작가의 삶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작가로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녀 개인의 삶은 무척 어렵고 복잡했다. 일방적인 짝사랑을 하다가 파국을 맞았고, 곧이어 결혼을 했지만 그것도 실패였다. 남편은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서 아이를 갖고, 술에 빠져서 돈을 낭비하는 인생을 살았다. 작가가 35세 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사망하기까지 한다.
이런 현실속에서 도로시는 오직 작품활동에만 전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피터 윔지라는 점잖고 여유있는 신사가 탄생한 것도 작가가 겪어온 개인적인 삶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부유하고 매력적인 영국의 귀족, 언제나 관대하고 유머감각을 잃지않는 신사 피터 윔지. 그는 도로시 세이어스가 불운한 삶속에서 투영한 그녀만의 이상형에 가까운 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