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이 것 쓰세요.” “너 쓰지 왜?” “저도 필요하기는 하지만, 아빠에게 더 유용할 것 같아서요.” “그래? 정말 고맙다.” 둘째가 내민 것은 USB메모리카드였다. 1기가 용량이니, 많은 양의 자료를 저장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였다. 아빠를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아이의 마음이 가슴에 와 닿는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은 늘 아빠에게 와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아이의 얼굴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딸 셋 다 모두 다 말이 없다. 무뚝뚝한 아빠를 닮아서인지, 무심하다. 말도 물어보기 전에는 먼저 꺼내는 일이 거의 없다. 필요한 것을 요구할 때에도 아빠에게는 감히 말하지 못한다. 엄마를 통해서 전달이 되었다. 그런 딸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좀 사근사근하고 친밀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딸들에게 큰 소리 한번 친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하여 매질을 한 적도 없다. 보기만 하여도 귀엽고 예쁜 아이들을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리고 제 할 일을 알아서 척척 해내는데, 꾸중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늘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있었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남들의 자랑을 들을 때마다 샘이 났다. 아들과는 달리 딸들의 애교를 귀찮다는 듯이 말하면서도 은근하게 자랑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아들이 없는 것도 서운하다. 그렇지만 더욱 더 절실한 것은 딸들이 다른 집 아이들과는 달리 재잘거리는 잔정이 없다는 점이었다. 재미있게 우스갯소리를 하다가도 아빠가 들어서면 입을 다물어버리는 것이다. 아빠로서 자격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컸다. “아이들이 왜 그럴까?” “몰라서 물어요?” “내가 뭘 어쨌는데?” “당신은 말하지 않아도, 생긴 것만으로도 두려움의 대상이에요.” 집사람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거구에다 인상을 한번 쓰게 되면 말하지 않아도 공포감을 느낄 수 있다는 지적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딸들의 애교를 받기에는 틀렸다고 체념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둘째가 내민 USB메모리카드를 바라보면서 흐뭇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겉으로는 무뚝뚝하게 대하고 있어도 마음만큼은 아빠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뭔가 보상을 해주고 싶은데,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이의 얼굴이 그렇게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다. 심리학자 고트먼은 마법의 비율로 5:1을 들고 있다. 부정적 대화를 1회 할 때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긍정적 대화를 5회 이상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비율을 지키게 되면 행복은 저절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둘째가 내민 선물을 바라보면서 그 동안 이 마법의 비율을 제대로 지키기 못하였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아이들에게 긍정적 대화를 한 기억이 별로 나지 않는다. 아이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에는 능숙하였지만, 아이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격려의 말을 한 적은 드물었다. 내 생긴 모습 때문에 아이들이 애교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대화가 없어서 그랬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이들이 스승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긍정적인 언어로 수시로 확인시켜주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부모이니까, 자식들보다 먼저 사랑의 말을 해야 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렇게 되면 애교 넘치는 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사랑한다. 딸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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