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17일, 23일까지 3일간에 걸쳐 상암동 문화콘텐츠센터에서 열린 문화콘텐츠 창작 사례 워크숍 현장.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의 문화콘텐츠 기획·창작 아카데미 주최로 열린 이번 워크숍에서는 만화와 영화, 게임 등 각각 장르별로 눈에 띄는 창작 사례가 발표됐다. 만화가 이현세, 영화감독 최동훈, 이인화 교수가 차례로 이야기한다. - 기자 주
만화가 이현세(한국만화가협회장)가 달라졌다. 지난날 상업적’인 냄새라도 날라치면 잔뜩 웅크린 채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던 그가 아니다. 오얏나무 아래서 갓 고쳐 쓰기를 주저하던 어느 순간 만화가들은 돈과는 불편한 관계에 놓여버린 것인지도. 만화가 혹은 만화기획자 스스로 기획과 마케팅으로 무장한 콘텐츠, 보다 잘 팔려나갈 수 있는 마케팅 전략을 마련하는 일이 그 어느때보다 중요해졌다고 그는 말한다.
<버디>는 브랜드 '이현세'를 위한 기획
“한국만화시장이 열악한 것은 기획이 없어서다. 스토리텔링에 마케팅 개념까지 은밀하게 스며들어야 한다. 그것이 한국의 콘텐츠가 세계화하고, 한류가 불붙을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될 것이다.”
창작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다. 그것은 콘텐츠의 기본. 그러나 잘 만들어진 콘텐츠가 팔려나가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일 역시 중요해졌다. “(만화책이) 만화 코너 보다는 차라리 비소설 코너에 꽂혀 있는 게 더 잘 팔리는” 요즘의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서다.
이현세는 골프만화 <버디>를 통해 이를 하나씩 실천하고 있다. “웬 골프?”냐는 주변의 반응도 있었지만 ‘소비 집중력’을 가진 스포츠로 그만한 것이 없다는 판단이 있었다. ‘자수성가형’과 ‘천재형’ 두 인물의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내는 가운데 독자들이 필요로 할 만한 골프의 모든 것을 담았다.
“<버디>를 보고 골프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는 독자들이 많다. 분위기가 많이 바뀌긴 했지만 학교에서도 방송에서도 아직 골프에 대해 잘 이야기해주지 않는 경향이 많은데 골프 자체에 대한 정보를 재미있게 보여주고자 했다.”
눈여겨볼 것은 작품 속에 적극적으로 도입된 PPL(간접광고). 이현세는 한 스포츠웨어 업체와 손을 잡고 해당 업체의 두 브랜드를 주인공의 의상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는데, ‘실재감’과 ‘수익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한 셈이다.
“실재하는 브랜드를 쓰면 좋은 점이 많다. 본래 브랜드란 기업이 수십억을 들여 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과 유사한 것을 쓰게 된다면 자칫 ‘짝퉁’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수 있다(그래서 오해를 받을 수 있다). 또, 제품의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와 사용할 수 있어 좋다.”
작업은 초기 단계부터 꼼꼼이 이뤄졌다. 에이전트를 통해 계약을 체결하고 “연재 매체인 신문사와 PPL에 대한 수익을 나눠 자칫 발생할 수 있는 분쟁의 요소도 미리 막았다”면서 콘텐츠가 상품성을 갖추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2030코믹스', 만화계 히든카드
그는 또 이달 초 첫선을 보인 새 연재물 <창천수호위>에 대해 소개했다. 이른바 20~30대 성인층을 대상으로 ‘2030코믹스’다. 한국만화출판협회가 문화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편의점에서 손쉽게 구입하는 새 콘텐츠를 선보인 것이다.
일본의 ‘편의점 만화’와 유럽식 마케팅을 도입한 이 프로젝트는 매달 초 32페이지의 새로운 만화시리즈를 저가(1500원)로 편의점을 통해 판매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편의점을 만화전문서점화하고 작가 자체를 잡지화 혹은 브랜드화하는 것. 현재 신일숙, 김진태, 밀감주 등이 7편의 작품을 연재중이다.
이들 가운데에서도 이현세의 <창천수호위>는 색다르다. 비단 10여 년만에 등장한 오혜성이 무인으로 나오기 때문이 아니다. ‘이현세’라는 작가가 아닌 ‘창천수호위’ 자체를 브랜드화하는 것을 주요한 콘셉트로 하기 때문. 오혜성, 까치, 엄지 등 이현세의 모든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다른 작가에 의해 스토리가 씌어질 수 있고, 작화가 대신 이뤄질 수 있고, 혹은 모든 과정이 이현세의 손에서 완성될 수도 있다. 동일한 작품 안에서 각각 다른 작가가 그려낸 제각기 다른 버전의 작품이 탄생할 수 있는 것.
그는 향후 정기적으로 ‘창천수호위 전시회’도 열 생각이다. 스토리와 콘티, 스케치, 컬러링 등의 원화를 전량 판매할 계획이라고. “이 좁은 나라에서 인세만 가지고는 곤란하다”며 원화를 사고 파는 문화를 만들어가자는 바람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만화를 사서 보지 않는 문제도 있지만 인구문제가 제일 크다”면서 “일본식 만화잡지를 무조건 벤치마킹한다고 해서 극복될 수 없다”고 말했다. 자국 내 시장이 1억 명 이상인 일본의 경쟁력은 자체 시장의 저력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 시스템만 가져오는 것으로는 경제종속국가인 우리나라로서는 따라잡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이현세는 만화산업을 살찌우기 위해 정부의 보다 전략적인 지원, 대기업의 과감한 투자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애니메이션으로, 게임으로, 영화로, 드라마로 무한복제 재생산되는 우수한 원작만화를 키워내는 것, 그것은 곧 전체 문화산업을 살찌우는 일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원천 콘텐츠인 ‘창작만화’를 지원해야 하고, 그 지원은 과감하게 이뤄져야 한다. 개인적으로 봤을 때 애니메이션처럼 만화도 스타시스템으로 가야 할 거라 생각한다. 스타작가를 브랜드화하는 일이 필요하다. 100명의 작가에게 나누기보다 1명의 스타에 과감히 투자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