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대 후문으로 통하는 후미진 뒷길에는 쥐똥나무가 울타리 삼아 심어져 있습니다. 지난 늦봄에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은은한 향기를 내면서 여리고 자잘한 모양새로 흰색의 꽃차례를 이루었습니다. 그걸 처음 발견하고 얼마나 신기했던지, 이 꽃 때문이라도 일부러 근처를 산책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여름 때 초록으로 돋아나던 이 나무 열매가 지금은 어느새 검은색으로 변해 있습니다. 가을을 지나고 나서도 겨우내 그렇게 검은색으로 매달려 있을 것입니다.
이 쥐똥나무 울타리 근방에 위치한, 갤러리 ‘정미소’가 있는 건물의 외벽은 하얀색 타일 벽입니다. 하얀색 타일 벽이지만, 커다란 현관문과 창문의 테두리는 온통 검은색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2층에는 아예 창을 막아버리는 장치로서 검은색 패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건물 2층에 가면 갤러리가 나오고, 그 갤러리에는 ‘갤러리’라는 이름과 ‘걸맞지 않은’, 공사하다 만 듯한 회색 벽돌의 노출 벽이 내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천장도 마감을 하지 않아 배관 시설 일체가 노출되어 있습니다. 물 내려가는 소리까지 들립니다.
이곳 벽에 ‘그레이’한 그림들이 걸려 있습니다. 이 건물을 지나가다 문득 새로 걸린 전시 포스터에 눈길이 끌렸던 것입니다. 전시 제목이 ‘그레이(회색)’입니다. 회색이라?
화가는 어떤 착상으로 이런 제목으로 그림들을 그리게 되었을까 싶었습니다. 아침에 본 그 포스터의 제목이, 아직 그림을 보지 않았는데도, 생각을 잇게 만듭니다.
문득 늦가을 분위기도 회색의 뉘앙스를 띠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휑뎅그렁한 벌판은 왠지 회색 톤을 지닐 것만 같습니다. 그런 가을은 아직 아니지만, 곧 그럴 기미가 보일 때이기도 합니다. 지난주 일요일 날씨는 저로 하여금 동복 양복을 입게 했습니다.
흑백사진의 주된 색감도 회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검은색과 흰색이 주될 수도 있지만, 그 둘 사이의 기다랗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회색‘들’이 흑백사진을 구성합니다.
<뒷모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독학으로 사진술을 익힌 프랑스의 사진가 에두아르 부바가 사진을 찍고, 현대 프랑스 문학의 거장인 미셸 투르니에가 각 사진마다 글을 보태어서 합작으로 완성한 책입니다.
그 속의 사진들도 전부 흑백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뒷모습만 담았습니다. 외로움도 묻어나고 정겨움도 묻어나는, 의도적일 수 있는 얼굴 표정을 볼 필요가 없고 반면 의도적인 연출이 힘든 뒷모습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작가는 그 모습 속에서 무수한 이야깃거리를 꺼냅니다. 행복한 합작품입니다.
‘흑백’ 이라는 단어는 흑과 백이라는 극단의 색명(色名)이 합쳐져 있어 그 이상을 연상하기 힘들지만, ‘흑백사진’ 하면 그러한 극단의 두 홑단어의 어감은 옅어집니다. 왜냐하면 흑백사진의 주된 구성은 ‘회색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피아노를 칠 줄 모르는 저로서는 이 세상의 모든 악기와 성악가의 음역을 다 소화해낼 수 있는 이 악기가 마치 마술의 물건처럼 여겨집니다. 현란한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지나갈 때마다 개별 음들이 하모니를 이루며 공기 중에 분사됩니다. 그 소리는 사람들을 현혹시키고요.
이 피아노의 건반도 ‘흑’과 ‘백’으로 색을 입고 있습니다. 궁금해서 사전을 찾아보니 이렇게 나옵니다. “피아노와 오르간의 건반은 1옥타브가, 간음(幹音; 줄기 음)인 백건 7개와 파생음인 흑건 5개로 이루어졌다”(‘두산백과사전’ 중에서). 이름이 멋지네요. ‘백건(백색 건반)’, ‘흑건(흑색 건반)’!
그런데 흑건 하나의 폭이 백건 하나의 폭보다 조금 작습니다. 새삼스러운 것이지만, 하나의 흑건은 두 개의 백건의 도려낸 자리에 위치합니다. 자기를 조금 베어내고 그 자리에 ‘반색(反色)’의 것이 들어오게 했습니다. 인접한 두 백건 사이의 중간 음, 그러니까 반음의 위치를 책임집니다. 이제 피아니스트가 자신들을 눌러주기를 좀이 쑤시게 기다립니다. 이왕이면 능란하게 자기들을 다뤄주길 원합니다. 피아노 몸체 속에는 해머로 현을 ‘아프게’ 치는(그러니까 피아노가 피아노 자신을 치는) 작업들이 동반되고요.
건반은 흑색과 백색이지만 거기에서 나오는 소리는 모든 소리를 커버합니다. 마치 흑백사진의 무수한 농도 다른 회색들처럼요. 굳이 옥타브별로 건반 색을 다르게 할 이유는 없습니다.
새삼 그래서 ‘회색’이라는 색에서 다양함이라는 느낌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양함’이라는 말을 ‘회색스럽다’라는 신조어를 만들어서 표현하고 싶어집니다.
그간 회색은 ‘회색분자’라는 단어처럼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곤 했던 색입니다. 외국에서도 그런 대접을 받는지 궁금합니다. 그러나 사실 많은 사람들이 회색을 일상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 자동차 회사의 소형차는 회색이 가장 많이 눈에 띄는데, 차 색깔 중 가장 무난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여튼 점심 때 짬을 내어서 갤러리에 들렀습니다. 알고 보니 화가 김해진님은 제가 연상한 것과 비슷한 심정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니 드로잉 했습니다. 모든 작품이 다 드로잉 상태로 끝낸 작품들입니다.
회색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한국사회에서 오히려 그것에 도전해서 이런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드로잉 작품 자체도 회색에 가깝습니다. “‘Gray(회색)’는 최근 작품의 실제적 색깔뿐만 아니라 지금 작품이 처해 있는 개념적 색깔도 의미한다(‘작가노트’ 중에서)”. 아무래도 12년째 미국에서 살고 있으니 한국에서의 선입견이 퇴색된 지 오래겠지요.
멀리 미국 땅, 친척들 얼굴도 까맣게 잊어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른 긴 시간 후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 이 드로잉들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검은색’ 연필로 ‘흰색’ 캔버스에 ‘회색’ 인물들을 표현해냈습니다.
사람들을 그리고 싶었나 봅니다. 그림은 온통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자신을 비롯해 지인들을, 외로운 군상들을, 존경하는 이들을 그렸습니다. 작가는 특히 피카소를 좋아합니다. 그것도 젊은 날의 맑은 얼굴의 피카소입니다. 고흐도 있었습니다. 이 곳엔 고흐 초상이 하나밖에 없지만, 작업실에서는 20개의 고흐 초상 드로잉을 그릴 정도로 각별한 존재입니다. 이들이 가깝게 다가올 무언가가 화가에게 있겠지요.
색연필로도 옅게 바탕과 세밀한 부분을 그렸습니다. 옅은 칼라도 회색과 거리가 멀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레이한’ 상태의 드로잉 자체로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인물 중엔 살리에리도 있었습니다. 재능은 있었지만 모차르트에겐 근접밖에 할 수 없었던 중간적인 존재, 회색 같았던 존재 말입니다. 살리에르 옆에 날카로운 단도가 의미심장하게 놓여 있습니다.
그림 중의 압권은 비버와 늘보, 고릴라 등과 같은 동물들과 여러 인물들을 함께 그린 군상 그림입니다. 다 같이 행진을 하는데 그들 모습이 제각각인데다 자기 존재의 의미도 다 다르게 지니고 있습니다. 직접 가서 봐야 알 수 있는, 설명이 필요한 그림입니다. 그래서 화가는 이 그림 옆에 약도 같은 설명을 그려놓았습니다.
이 약도 그림이 정말 재미있습니다. 아마 이 작품 아닌 작품만은 촬영을 허가해줄 것입니다. 이곳의 큐레이터 님의 친절한 설명 덕분에 낯선 작품들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작품 이미지 사진’으로 보관되어 있지 않은 작품도 디카로 찍어서 저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작년에 이곳을 들른 저를 기억해준 덕분입니다.
이 전시회에서 받은 도록은 참 특이한데, 보통의 전시회 도록과 달리 포켓판 크기로 휴대하기 편하게 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연한 회색으로 표지를 대신했습니다. 화가가 그러길 원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실린, 화가의 작업실 사진이 인상적입니다. 작업을 마치고 나서 말끔하게 정리해놓은 화구들이 구석에 모여 있습니다.
그저 감상만 하고 갈 요량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취재가 되었습니다. 고마움을 전합니다.
도록 안에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시도 한 편 있었습니다.
비버와 나비버들은
일년에 약 400그루의 나무들을 쪼아내어
강변 아래 둑에
편하고 작은 집을 짓는다.
그게 비버들이 늘 하는 일이고
그게 대충 내가 하는 일의 전부다. 한가을에(그러고 보니 ‘한여름’, ‘한겨울’이라는 말은 잘 쓰지만 ‘한봄’, ‘한가을’이라는 단어는 낯서네요), ‘검은색’ 열매의 쥐똥나무가 가까이 있는 ‘흰색’ 건물에서 ‘회색’의 그림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회색 풍경들을 살펴보았으니 이 기회에 회색의 다양함과 넉넉함과 부드러움을 상상 속에서 생활 속에서 만끽해 보아야겠습니다. 색에 대한 이미지들은, 예외는 있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연상해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까마귀를 흉조로, 까치를 길조로 여기는 것도 그 한 예입니다. 반대로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까마귀를 길조로 여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참에 그동안 억울한 이미지를 부여받은 ‘회색’의 명예를 회복하는 기회로 삼아보도록 하지요. 너무 짧게 지나갈 것 같은 올 가을도 그런 시간들로 보내보면 어떨까요. 내 속의 무수한 ‘회색스런’ 생각들을 보듬어주면서 말입니다.
덧붙이는 글 | 김해진의 ‘Gray(회색) 전시회 ; 갤러리 정미소. 02-743-5378. 11월 9일까지. 월요일 휴관. 대학로 뒷길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