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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평소 잘 알고 지내는 K선생님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라기보다는 질의라고 해도 좋을 만큼 짧은 내용이었지만 그 안에는 아이들을 대하는 교사로서의 진한 고민이 묻어 있었다. 다음은 K선생님과 주고받은 편지를 간추린 내용이다.


- 안녕하세요? 질문이 있어서요. 참실대회에 관련된 이야기를 동료 선생님과 나누다가 결론을 내리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떻게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줄까라는 문제가 학습과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의 문제입니다.


제가 쇼킹했다고 말씀드렸던 '나쁜 아이'의 이야기를 해본다면 그 아이가 다음에 만났을 때도 또 "선생님께서 주우세요"라고 한다든지, 수업시간에 조는 학생에게 친절한 말을 했는데도 계속 존다든지. 산만한 아이에게 긍정적 동기를 주었음에도 계속 산만하게 군다든지, 즉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방법들이 근본적 해결책(교실의 문제상황)이 될 수 없다는 고민입니다.


- 좋은 질문을 주셨네요. 저도 그런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교사는 작은 도움을 주는 사람일 뿐입니다. 학생들이 자각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무엇이든지 별 효과가 없지요.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말은 아이들이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정서적인 동기를 마련해준다는데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는 아이들의 생각이 너무 짧다 보니 자신의 행동에 대응하는 교사의 언행을 가지고 시비를 걸거나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합리화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말을 자주 해주다보면 그런 일들이 생기지 않는 장점도 있을 것 같습니다.

 

'참실'이란 '참교육실천'을 줄인 말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은 해마다 '참교육실천대회'라는 것을 한다. 10월 하순이나 11월 초순부터 학교 단위로 하는 분회참교육실천대회를 시작으로 지역 단위 참교육실천대회를 거쳐 12월 중순쯤 (올해는 12월 15일 예정) 전국참교육실천대회가 열린다.


전교조가 해마다 참교육실천대회를 개최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교실(학교 환경)을 변화시키고 아이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자는 데 있다. 물론 그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일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늘 만만치않은 도전에 직면하곤 한다. 학교 현장을 변화시킨다든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준다든지 하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입시위주 교육의 굴레 속에서 공부하는 기계로 이미 전락해버린 아이들을 더 이상 방치하는 것은 죄악이라는 현실인식을 가진 교사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것. 그리고 대다수 교사들은 아이들의 행복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는 것.


'대다수 교사들은 아이들의 행복에 무관심하다'라는 말이 좀 거슬린다면 '대다수 교사들은 아이들의 현재의 행복에 무관심하다'라고 수정하면 어떨까. '아이들의 행복'을 '아이들의 현재의 행복'으로 고친 것은 교사나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미래의 존재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해서다. 교사나 부모의 인식 속에 현재는 없고 미래만 존재하는 아이의 삶이 과연 온전할까?


혹자는 "교사가 학생들의 행복까지 챙겨야 하나?"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그럴 법도 하다.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지 행복을 주는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교사는 학생을 사랑해야 하나?"라는 질문도 해봄 직하다. 왜냐하면 학생을 사랑하는 것과 학생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불행해지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교사는 학생들을 사랑해야 하나?"라는 물음에 긍정적인 답을 한 사람이라면 "교사가 학생들의 행복까지 챙겨야 하나?"라는 물음에도 당연히 같은 태도를 보여야 하지 않을까?


하긴 학생들이 불행한데 교사라고 행복할 수 있을까? 너나 할 것 없이 공부하는 기계로 전락하여 배우는 기쁨이 사라진 교실에서 교사인들 가르치는 보람과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일주일에 한 통꼴로 학교 현장으로 편지를 보내고 있다. 전교조 순천사립지회 참실국장으로서 조합원 선생님들에게 띄우는 이른바 '참실편지'이다. 그 스물아홉 번째 편지는 '분회참교육실천대회'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서 글을 접는다.


참실 편지, 스물아홉 번째


요즘 학급조회나 수업에 들어가면 화를 내거나 큰소리를 치지 않고 한 시간을 버티기가 어렵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아이들의 '꼴'을 봐주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과거에는 인간성이 결여된 학생들이 간혹 눈에 띄었는데 지금은 상당수의 학생들이 기본적인 품성에서 문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이런 점들이 교사를 불행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시점에서 오히려 '나는 아이들에게 행복을 주는 교사인가?'라는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올해 각 학교 분회참교육실천대회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교사대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말. 아이들과 대화를 통해서 소통하게 된 사례. 아이들을 향한 어쩔 수 없는 미움을 극복한 이야기. 정서적으로 산만한 아이를 지도한 사례. 아이들의 인격을 키워주기 위해 했던 따뜻한 훈화들. 꿈도 미래도 없어 보이는 아이에게 소개해준 책. 지각이나 흡연 등 잘못된 습관을 가진 아이들을 지도한 사례. 가정적으로 문제가 있는 학생을 격려하고 도와준 이야기. 말버릇이 거칠거나 짜증을 잘 내는 아이를 지도한 사례. 특정 교사와 문제가 있는 학생을 지도한 사례. 하루라도 아이들에게 화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한 이야기. 참실 편지를 읽고 적용하려다 실패하거나 성공한 이야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교사의 한계를 느껴 포기하려는 순간 아이가 돌아온 이야기. 등등.


예)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말


영어기초가 부족한 아이들을 위해 보충수업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아이가 저에게 무슨 말을 건넨 듯싶어 가까이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금방 뭐라고 했니?"
"아, 아니에요."


"말해봐. 안 잡아먹을 테니까."
"부진아 보충수업 언제까지 해요?"


"부진아? 우리 그런 말 쓰지 말자."
"그럼 뭐라고 해요?"


"그냥 보충수업이라고 하면 되잖아."
"그럼 보충수업 언제까지 해요?"


저는 아이의 까만 눈을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보고 싶을 때까지."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지만 아이는 그 말이 듣기 싫지는 않았는지 이마까지 환해지며 까르르 웃었습니다. 대신 옆에 있던 한 아이가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럼 한도 끝도 없겠다."


한도 끝도 없으니 일찍 마음을 잡고 공부나 열심히 하자는 것인지, 아이들은 더는 군소리가 없었습니다.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이 있지요. 평소 말버릇이 거칠거나 짜증이 심한 아이가 있다면 한 닷새 정도 작심하시고 그 아이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시면 어떨까요? 그 뒷이야기를 분회참교육실천대회에서 함께 나눠보시고요.


태그:#참실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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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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