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은 자연 속에서 자라야내가 늘그막에 만난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은 교육철학이 아주 뚜렷하신 분으로, 두 가지를 매우 철저히 지키시고 가르치셨다. 그 하나는 자연에 대한 사랑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린이 교육이었다. 당신 평생의 삶도 이 두 가지를 철저하게 실천하셨다. 평생 어린이 교육에, 그것도 시골 초등학교 가운데도 분교와 같은 외진 곳에서 시골 어린이 교육에 바치셨고, 당신의 글도 자연을 떠나지 않으셨다.
생전에 만나 뵐 때마다 자연을 떠난 오늘의 교육 현실을 매우 안타까워하셨는데, 그 뒤로 조금도 고쳐지지 않고 날이 갈수록 점차 더 심해져 가는 듯하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도시로, 해외로 떠나는 행렬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시골 학교는 매우 심각한 현실이다. 아이들이 없어 학교가 문을 닫는 현상이 꼬리를 물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는 어린 시절에는 자연과 더불어 보낼 수 있는 시골 생활이 더 유익하다. 몇 가지 예화를 들겠다.
박수근 화백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의 서정을 그만큼 성실히 표현한 작가는 없다”는 한국미(韓國美)의 한 전형을 이룩하여, 8·15 해방 이후 최고의 유화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 한 보도에 따르면, 박 화백의 유작 한 점은 도시의 고급 아파트 한 채 값보다 더 나간다고 한다.
박 화백은 타고난 재능으로 화가가 되었다기보다는 온갖 고난과 시련을 묵묵히 극복하면서 끊임없이 노력해 온 화가다. 그는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어릴 때 집안의 몰락을 겪고, 극심한 가난으로 양구 보통학교(초등학교)를 다닌 것이 정상적인 교육의 전부였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한 잡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아버님이 사업에 실패하고, 어머님은 병으로 돌아가시니 공부는커녕 어머님을 대신해서 아버님을 돕고 동생을 돌봐야 했습니다. 우물에 가서 물동이로 물을 져다 날라야 했고. 맷돌에 밀을 갈아 수제비를 끓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낙심하지 않고 그림을 틈틈이 그렸습니다. 혼자서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늘 기도 드리며 그림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한국의 풍물을 그리는 것만이
한국전쟁 무렵에는 지독한 생활고로 미군 PX에서 생계를 잇기 위해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도, 그의 작품세계는 우리나라의 가난한 농촌과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일관된 소재로 삼는 순수성을 잃지 않았다.
그는 그 무렵 유행했던 시류나 풍조에 편승하여 서양의 화풍을 흉내 내거나 무조건 따르지 않고, 오로지 한국의 풍물만 그렸다.
“나는 한국 사람으로 우리 풍물을 그리는 것만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일념으로 오직 우리 향토와 서민들의 애환을 담았다. <농가의 여인> <나물 캐는 여인들> <기름장수> <맷돌질하는 여인> <노상의 여인들> <나무와 두 여인> <고목> 등 그의 작품에는 꾸밈없는 시골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밖에도 행상이나 빨래터, 또는 절구질하는 아낙네들이 등장하고 이야기를 즐기는 노인들이나 놀이에 빠진 어린이들도 즐겨 그렸다.
그의 독창적인 마티에르(화면에 나타난 그림의 재질적 효과)에다 독특한 표현 양식, 그리고 한국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작품은 외국의 미술 애호가들의 주목을 끌어, 정작 우리나라에서보다 외국에서 더 높이 평가받는다고 한다.
말년에는 백내장 수술로 왼쪽 눈이 완전히 실명이 된 후로도 오른쪽 한 눈으로만 그림을 그렸다. 이런 처절한 삶으로 그의 작품은 당신 생전보다 사후에 더 주목받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미술 동호인의 경탄 대상이 되고 있다.
나는 그가 강원 산골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이와 같은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비단 박수근 화백만 그런 게 아니다. 꽃과 여인, 뱀을 주제로 작품을 그린 천경자 화백도 전남 고흥 태생으로 어린 시절에 본 자연의 아름다움이 평생 당신 작품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빛과 영혼의 화가 반 고흐도 네덜란드 남부 브라반트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화가만 그런 게 아니고 작가도 마찬가지다. 헤르만 헤세는 도이칠란트의 칼브에서 태어났는데, 그 일대가 온통 전나무 숲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고장이다. 그의 작품 가운데 칼브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서> <청춘은 아름다워라> 등 무려 20여 편이나 된다. 알퐁스 도데도 고향인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풍경과 마을 사람들의 생활을 <풍찻집 소식> <월요 이야기> 등을 통해 정감 있게 그렸다.
기분 좋은 하루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이가 몇이나 될까? 지금도 인천공항에는 아이의 교육을 위해 떠나는 행렬이 줄을 잇고 있고, 아이 교육 때문에 산골 두메에서 도시로 떠나고 있다. 이 썰렁한 계절에, 내가 사는 고장 횡성문화원에서 제1회 ‘그림 사랑 아이 사랑’이라는 주제로 전람회가 열리고 있기에 잠시 어린 천사들의 작품을 둘러보았다.
나는 횡성문화원에 마련된 시골아이들의 티 없는 작품세계를 보면서 이들 가운데 박수근 천경자 화백을 뛰어넘는 천재화가가 나오기를 빌었다.
“요즘은 시골아이들도 공부에 몹시 시달리고 있어요.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시간만은 그들의 영혼을 쉬게 해 주고 싶어요.”
이 고장 아이들에게 그림을 지도하는 김현일 선생님의 소박하고 해맑은 미소에 나라의 미래를 한 가닥 읽을 수 있어서 기분이 참 좋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