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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전적 첫 순례지, 지리산 연곡사

 

 

2007년 10월 21일, 나는 답사여행을 할 때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창문을 열고 하늘부터 살폈다. 날씨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첫 추위 다음날이고, 호남은 남도라 그런지 날씨가 아주 맑고 포근했다. 참 올 여름과 가을은 징그럽게도 날씨가 흐렸는데도 오늘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전형적인 한국의 쾌청한 가을 날씨다.

 

간밤에 가볍게 한 잔 마시고 숙면한 탓인지 몸이 아주 가벼웠다. 아마도 나는 타고난 역마꾼으로 답사체질인가 보다. 그동안 그 넓은 중국 미국 대륙을 여러 날 누벼도 별 탈이 없었다. 하지만 자만은 삼갈 일이다. 

 

의병 전적 첫 순례지는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로 정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속담이 있는바, 오늘이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 의병장이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에서 순국한 지 꼭 100년이 되는 날로, 당신 때문에 일제가 의병 근거지를 없애고자 불사른 연곡사 법당에서 추모법회와 구례군 주관으로 의병장 고공광순 순절비(義兵將高公光洵殉節碑) 정화 고유제를 드리는 매우 뜻 깊은 날이다. 

 

세면 뒤 여장을 꾸리고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숙소 문을 두드렸다. 녹천기념사업회 고재춘 선생 내외가 찾아오셨다. 원래는 고영준 선생이 길 안내를 맡기로 하였지만 어제 교통 사고로 차가 정비공장에 가 있고, 여태 감기 기운도 가시지 않아 대신 고 회장이 오셨다.

 

앞방에서 묵은 고용석씨와 함께 네 사람이 숙소 앞 밥집으로 갔다. 아주 정갈한 아침 밥상으로 반찬 하나하나에도 정성이 듬뿍 담겼다.

 

나는 아침밥을 먹으면서 호남 의병전적지 순례에 앞서 호남 의병의 뿌리인 포충사(褒忠祠) 충렬공 고경명(高敬命) 의병장 사당에 고유 인사를 올리기로 한바, 그곳부터 들리고 싶다고 청하였다. 하지만 고 회장은 포충사는 연곡사와 반대편으로 거기를 들리면 연곡사 추모법회에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 없다고 오후에 들리자고 말씀하기에 그 의견을 좇기로 하였다.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한 어른이 당신 후손부터 참배했다고 어찌 역정을 내겠는가. 녹천 고광순은 누군가. 당신의 자랑스런 12세손이 아닌가. 예로부터 “귀신 같이 안다”는 말이 있듯이, 충렬공은 전후 사정을 다 아실 테니 나의 결례를 널리 헤아리시고, 오히려 어서 연곡사 녹천 법회에 참배하라고 손을 흔드실 테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섬진강

 

 

밥집 주인의 깍듯한 전송을 받으며 담양 창평을 출발한 승용차는 구례 피아골 연곡사로 달렸다. 고속도로를 조금 달리자 곧 맑디맑은 섬진강이 나왔다. 섬진강, 아기자기하고 예쁜 강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 언제 보아도 비단결처럼 아름답고 정감이 가는 내 어머니 같은 강이다. 섬진강을 보지 않고 강여울의 아름다움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모래톱에서 본 강여울도 아름답고, 지리산 멧부리에서 내려다 본 강굽이는 기막힌 극락이다.

 

길섶에 압록역이라는 간이역이 보였다. ‘압록’이라는 지명의 뜻이 궁금해 핸들을 잡은 고 회장에게 여쭙자 정확히는 모르겠다며 한자를 가르쳐 주셨다. 오리 ‘압(鴨)’ 자에 푸를 ‘록(綠)’ 자로, ‘압록강’과 같은 한자라고 하여 내 예상과 일치했다.

 

나는 중국 항일유적지 답사 길에 지린성 지안에서, 그리고 단동에서 압록강 물에 손을 닦은 뒤 조국 북한 산하를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며 압록강의 유래를 알아본 바, 참고 자료에 “물빛이 오리의 머리 빛과 같다”고 압록강(鴨綠江)이 되었다고 했다. 내가 그때 알게 된 압록강의 유래담을 얘기하자 고 회장은 그 유래담이 여기도 적용될 듯하다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정말 섬진강이 어찌나 맑은지 물빛이 오리의 머리 빛처럼 푸르렀다. 눈이 시리도록 맑은 강물이 흐르는 이 지방은 축복받은 땅이다. 새삼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에 짜릿한 전율을 느끼면서 언저리 풍광에 마냥 즐거웠다.

 

지리산(智異山)

 


 
구례는 지리산의 심장부다. 지리산! 예로부터 지리산은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의 하나로, 흰 옷 입은 어진 백성들에게는 어머니의 품 같은 산이었다. ‘지리산(智異山)’이라는 이름은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이 산은 백두대간의 끝자락에 우뚝 솟아 전남 전북 경남 세 도를 껴안은 남도인의 영산(靈山)으로, 아득한 옛날부터 가난한 백성들에게 먹을거리와 땔감을 주고, 난세 때는 피난처요, 외적의 침입 때는 항쟁의 요새요, 보금자리였다.

 

갑오농민전쟁 때는 영호남 농민군들의 은거지였고, 구한말에는 의병 투쟁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으며,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는 좌우익간의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 대결장이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몇 해 동안 빨치산의 아지트였다.

 

원로시인 이기형 선생은 시집 <지리산> 서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진실한 삶이란 -
민족의 독립이란 -
역사의 부름이란 -

자, 명상을 떨치고 가자!


현대사 소용돌이의 한복판, 핏자국 핏자국
저기 지리산으로

 

피아골 연곡사

 

 

피아골 연곡사로 가는 길은 섬진강 줄기를 따라 지리산의 속살을 헤집기에 왼편은 산이요, 오른편은 섬진강이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19번 국도를 달리면서 호기심 많은 나그네가 강과 멧부리를 두리번거리는 새 승용차는 피아골 들머리로 접어들었다.

 

‘피아골’ 하면 ‘빨치산’을 연상할 만큼 이 계곡은 빨치산의 아지트로 유명한 곳이 아닌가.  빨치산을 주제로 한 ‘피아골’이라는 영화도 있었다. 피아골의 단풍은 유난히 붉고 아름답다. 그래서 피아골의 단풍은 천왕봉 일출, 반야봉 낙조, 세석 철쭉, 노고단 운해, 벽소령 달빛, 불일폭포, 연하 선경과 함께 지리산 팔경으로 꼽히는데, 이 계곡에서 죽어간 숱한 이들의 피가 골짜기를 붉게 물들였기에 ‘피아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속설이 있다.

 

김용옥 교수는 이를 뒷받침하는 주장을 펼친바, 임진왜란 때 수많은 승병들이 이곳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피로 물들인 혈천곡(血川谷)이라는 뜻의 ‘피내골’이 후세로 내려오면서 ‘피아골’로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피아골에서 죽은 원혼을 조상(弔喪)하는 이들이 지어낸 말로, 실제 ‘피아골’이라는 지명은 옛날 이곳에 피[稷]를 많이 가꾸었기에 피밭골이라는 지명이 바뀐 탓이라고 한다. 지금도 피아골 들머리 마을이 직전리(稷田里)로 이를 뒷받침해 준다고 답사여행 길잡이 책자에서 밝히고 있다.

 

아무튼 피아골 단풍은 10월 하순이면 진홍색 핏빛으로 온 산을 붉게 물들이고, 그것이 옥같이 맑은 계곡 물에 비치고, 그 물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얼굴마저 진홍색으로 물들인다고 한다.

 

이를 일러 산홍(山紅), 수홍(水紅), 인홍(人紅)의 ‘삼홍(三紅)’이라고 한다는데, 올해는 단풍은 늦은 탓인지 여태 상봉에만 물들었을 뿐, 연곡사 일대 활엽수들은 이제 곧 붉은 물감을 들일 채비를 하고 있었다. 

 

연곡사(燕谷寺)는 신라 경덕왕 때 연기조사가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구한말 의병 근거지라는 이유로 일본군에게 다시 불태워진, 일본과는 악연의 절이다. 이곳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총탄에 목숨을 바친 고광순 의병장의 순절비가 연곡사 경내 동백나무 아래에 있다고 안내판에 기록돼 있었다.

 

충의의 높은 탑을 세우다

 

‘지리산연곡사(智異山燕谷寺)’라고 쓴 일주문을 지나자 대법당인 대적광전이 나오고, 왼쪽 계곡 동백나무 아래에 ‘의병장고공광순순절비(義兵將高公光洵殉節碑)’가 고즈넉이 서 있었다. 나는 순간 고광순 의병장은 참 명당에서 장렬하게 순국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돌아가신 자리가 명당입니다.”


불쑥 뱉고 보니 동행한 후손에게 실언한 것 같아 마음 졸이며 나의 가벼운 입놀림을 후회하였다.


“잘 보셨습니다.”


동행 고재춘 회장은 언짢아하기는커녕 오히려 내 말에 동의해 주기에 그제야 나는 안도했다.

 

“의로운 장부는 죽을 때와 장소도 잘 가려야 하나 봅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전장에서 순국하였기에 절세 명장으로 남았을 테지요.”


“그렇습니다. 녹천공은 이곳 지리산 일대가 당신이 순절할 장소임을 미리 아시고 군사를 끌고 입산하여 일제와 한바탕 전투를 치르다가 이 계곡에서 부하에 앞장서 전사하신 겁니다. 공의 죽음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순절하신 충렬공의 충의를 드높인 가문의 영광이요, 의향(義鄕) 호남의 맥을 이은 살신성인의 쾌거이지요.”


고 회장의 화답이었다.

 

녹천이 순절한 날은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오늘로, 대한제국의 석양빛이 저무는 1907년 정미 음력 9월 11일 묘시(오전 6시 무렵)였다.

 

일제가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녹천을 폭도(暴徒) 세 우두머리로 지목한 뒤 혈안이 되어 반드시 토벌하고자 했던 거목의 하나가 이 자리에 적의 총탄에 쓰러졌다.

 

임진왜란 때 충렬공(忠烈公, 고경명)과 의열공(毅烈公, 고인후) 부자가 금산싸움에서 순국한지 315년만이요, 충렬공의 큰아드님 효열공(孝烈公, 고종후)이 진주성 남강에 투신 순국한지 314년 만에 고씨 가문에 또 한 번 충의의 높은 탑이 우뚝 솟는 순간이었다.
 

 

2007년 10월 21일(음 9월 11일) 오전 10시 정각, 연곡사 대적광전에서는 녹천 고광순 의병장의 명복을 비는 추모법회가 열렸다. 피아골 계곡에는 100년 전 그날의 총소리 대신에 목탁소리와 염불소리가 낭랑히 울려 퍼졌다.

덧붙이는 글 | 지리산 사진 두 점을 제공해 주신 지리산 사진작가 임소혁 님에게 감사드립니다.


태그:#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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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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