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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학창시절. 추억도 사진처럼 낡아간다.
 즐거운 학창시절. 추억도 사진처럼 낡아간다.
ⓒ 나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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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니네 점심 안 먹어?"

"아우우웅, 귀찮아. 도대체 먹을 게 없어."

90년대 말 학창시절. 기말시험 중이었고, 갑작스레 매서운 한파가 일던 시기였다. 늘 그렇듯 '장학금면제'를 목표로 시험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 과 방문을 열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여학생들이 약 먹은 병아리처럼 졸고 있었다. 난로를 얼마나 세게 틀었는지 실내 공기가 절절 끓고 있었다.

"기름 좀 아끼라니까! 안 되겠어, 창문 좀 열자. 여태 점심도 안 먹고 뭐 하는 거야."

투덜대며 기지개를 켜는 황야의 7인, 아니 우리 과의 7공주파. 벅벅 등을 긁고 눈곱을 떼더니, 투정과 하소연이 쏟아져 나왔다.

"배는 고픈데 학생식당 밥 못 먹겠어. 조미료 맛이 너무 강해서 비려. 돈가스, 비후가스, 생선가스도 맛이 똑같아. 소스 냄새에 질린다니까."
"자장면 배달도 신물이 나. 우리가 영화 <넘버 3>의 ‘불사파’도 아니고."

하긴 맞는 말이었다. 착실한(?) 대학생활에서 느낀 바 정녕 학교식당은 '질'이 아닌 '양'으로 승부하는 곳 같았다. 들척지근한 양념, 매일 바뀌긴 하지만 도대체 차이점을 알기가 힘든 메뉴…. 정문 밖까지 다녀오기에는 길이 멀었고 날은 너무 추웠다.

그러더니 공연히 화살이 나에게 돌아왔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라는 둥, 구내식당을 획기적으로 바꿀 방안을 내라는 둥. 순간 스치던 생각.

"그럼 여기서 라면 끓여 먹을래?"

찬바람 부는 날씨엔 뭐니 뭐니 해도, 라면이 최고지!

무심코 던진 말, 그러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정말 정말 정말? 와아~ 신난다!"

"오빠, 멋쟁이. 라면 너무 너무 너무 먹고 싶어요!"

순간 아이돌 스타가 된 듯한 기분. 하지만 그것도 잠시, 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 했다. "오빠가 끓이면 우리는 맛있게 먹어줄게"라는 순진무구(?)한 눈빛들. 결국 학과의 공동교통수단인 스쿠터에 몸을 싣고 한파를 맞아야 했다.

손을 호호 불며 라면과 부탄가스를 사왔지만 준비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학생식당에서 눈치껏 김치를 담아왔고, 과방을 샅샅이 뒤져 휴대용 버너를 찾아냈다. 그런데 끓여 먹을 만한 냄비가… 다시 옆의 학과 방들을 전전한 끝에 찾아낸 것은 과 대항 체육대회에서 등장할 법한 크고 낡은 양은 주전자.

사건의 현장에 있던 추억의 악동.
 사건의 현장에 있던 추억의 악동.
ⓒ 나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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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해를 구하고 빌리긴 했지만, 주전자는 마지막으로 사용한 게 언제일까 싶을 정도로 더러웠다. 툴툴거리며 화장실로 직행, 나오는 물의 온도는 거의 천연빙하. 한숨을 쉬던 그때, 세면대 아래에서 발견한 물건은 바로 낡은 '철수세미'였다.

"심 봤다!"를 외치곤 정성들여 닦기 시작했다. 눌어붙은 음식 찌꺼기와 거뭇한 땟자국. 한참 땀을 흘린 후에야 본 모습을 드러낸 주전자. 과방으로 돌아가자 그새 기린만큼 목이 늘어난 여학생들은 나무젓가락을 물어뜯고 있었다.

"우리가 굶어 죽거든, 라면공장 옆에 묻어줘. 오빠."
"뭘 모르네. 원래 라면은 아사 직전에 먹어야 제 맛이라니까."

배고플 때 주전자에 끓여낸 라면의 위력은 그야말로 핵폭탄급이다. 윗부분이 꼬들거릴 때 젓가락질을 시작해 깊은 바닥이 드러나면 나중에는 제법 뭉근하게 퍼진 맛을 느낄 수 있다. 주둥이가 있어 국물을 따르기도 편하다.

게다가 날이 차가웠고 끼니때는 지났다. 최적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조건이었다. 마지막으로 학생식당에서 공수해 온 신김치가 어울렸다. 평소 그리도 맛없던 쉬어빠진 김치가 제대로 된 콤비를 만난 것이다.

"음음음음, 너무 맛있다. 야, 말 좀 하면서 먹으란 말이야."
"야, 넌 익지도 않았을 때 떠갔잖아. 근데 어떡해, 너무 맛있어. 국물 죽인다!"

난민들이었다. 다소 짭짤하게 끊인 것이 오히려 빈 속에는 자극적인 법. 평소 다이어트라면 눈을 뒤집던 그녀들이었지만, 김이 뭉게뭉게 피는 라면 앞에서는 무장해제였다. 젓가락이 춤을 추었고, "어~"하는 장탄식이 이어졌다.

맛있게 먹은 라면, 하지만...!

"너~무 맛있게 먹었다, 오빠. 존경심이 해일처럼 몰려와."
"나도. 세상에서 젤 맛있는 라면이었어. 잘 먹었어. 꺼억~."
"아이! 고개 좀 돌리고 트림해. 비켜, 설거지해서 돌려줘야지."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자기들이 닦아 오겠단다. 아니라고 남자 화장실에 철수세미가 있으니 마저 하겠다고 손사래를 쳤을 때였다. 불안해 하는 한 여학생의 음성. "오빠, 여자 화장실에도 수세미는 있어." 잘됐다 싶었다. "그래? 그럼 니네가 해!" 점차 거칠어지는 숨소리.

"오빠 혹시… 세면대 밑에 있는 철수세미로 주전자 닦아왔어?"
"어, 왜?"

한순간 난리가 났다. "아악 난 몰라. 어떻게 해!", "우욱, 아악!" 괴성이 터져 나왔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을 껌벅이자 여학생들의 힐난이 쏟아졌다.

"오빠아! 그거 변기 닦을 때 쓰는 수세미란 말이야아!"
"정…말?"
"그래! 못 살아, 그 더러운 걸로 설거지를 해 오면 어떡해! 어우 나 넘어온다."

여학생들은 한동안 난리 법석을 떨어대더니, 오늘 '변기 라면' 제대로 먹었다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칭찬은커녕 '급 비난'에 시달린 하루. '까짓것 그게 그거지 뭐. 더러우면 얼마나 더러울까'라는 생각에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게 된 건 며칠 후였다. 작은 볼일(?)을 보고 있는 화장실에 언제나 그렇듯 씩씩하게 입장하신 아주머니. 빨간 고무장갑을 팔꿈치까지 끌어올리시더니 세면대 밑에서 덥석 철수세미를 꺼내 들었다.

"×을 쌌으면 제대로 내리던가, 이게 뭐 하는 짓들인지 몰라."

구시렁거리며 변기 속으로 힘차게 손을 집어넣으시는 아주머니. 힘을 주어 벅벅 수세미질을 시작하자, 남아 있던 잔여물(?)들이 세찬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순간… 벽을 짚자 터져 나온 건 헛구역질이었다.

"학생 왜 그려, 오늘 학생식당서 뭘 잘못 먹었는가?"

학교식당을 거부한 죄, 크고도 깊었다.

덧붙이는 글 | <우리학교 식판>응모글



태그:#라면, #학교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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