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희는 입을 삐죽이며 말을 이었다. “하여간 전에는 누가 내 집안을 뒤진 일도 있었던 걸 보면 내게서 뭘 알아내야 할 것이 있나봐. 오빠는 직업이 뭐예요? 당분간 오빠 신세 좀 져야겠어.” “백수야.” “그럼 잘됐네. 시간이 남아도니 내 보디가드도 해주고.” “너 때문에 총에 맞아 죽을 뻔 했는데 그런 말이 나오냐? 그리고 난 바빠. 차도 팔아야 하고 실업급여도 재신청해야 하고….” “차를 팔아요? 그건 안 돼. 그 놈들이 어쩌면 이곳도 알아낼지 모르는데 그때는 뭐타고 도망칠래요?” “아 몰라. 골치 아파. 여기 숨어 있다가 네 발로 나가든지 알아서 해.” 경수는 벌렁 누워 천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오빠, 이왕 도와주는 거 한번만 도와주라.” “뭐?” “내 집에 한번만 데려다주면 안될까? 집에서 나올 때 아무것도 못 챙기고 옷 한 벌만 덜렁 입고 나왔단 말이야.” “그냥 갔다 오면 되지.” “그 사람들이 지키고 있단 말이야. 그냥 갔다가는 돌아오는 길에 잡힌다고.” “그럼 얘기 끝났네. 안 가면 돼. 난 괜히 총 맞기 싫어.”
“그거 알아? 남을 한번 도와주면 끝까지 도우라는 말도 있잖아.” “아 귀찮아.” “…이러니까 백수지.” 경수는 약간 자존심이 상해서 영희를 노려보았다. “너 도와주는 거 하고 내가 백수인 거 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남을 좀 도와주는 것도 귀찮아하는데 무슨 직장을 구해?” “야, 너 날 언제 봤다고….” 경수는 벌떡 일어났다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옷을 챙겨들었다. “알았다. 내가 졌네 졌어. 까짓것 그놈들이 기관총을 쏘아대도 한번 가보지 뭐.” “와! 오빠, 정말 고마워!” 영희가 팔짝팔짝 뛰며 경수의 팔에 꼭 매달리자 경수는 이를 슬며시 밀어내었다. “옷은 좀 입자. 응?” 그 말을 끝으로 경수는 차로 가서 시동을 걸 때까지 계속 찌푸린 표정으로 말을 하지 않았다. “오빠 인상 좀 풀어라, 응?” 보다 못한 영희가 옆에서 깐죽거리며 간지럼까지 태웠지만 영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금 내 머리에 바람구멍이 날지도 모르게 생겼는데 웃음이 나오겠냐?” 영희는 그 말에 깔깔깔 웃어 젖혔다. “오빠 이제 보니 진짜 겁쟁이네? 총을 맞아도 내가 맞지 오빠는 괜찮을 테니 마음 푹 놓으셔.” 경수는 영희가 일러준 대로 차를 몰고 가다가 문득 기름이 다 떨어져 간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기름 다 쓰고 폐차하려고 했는데 이것 참.’ 경수가 차를 주유소에 대자마자 요란한 음악 소리와 함께 녹음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투표는 국민의 권리! 반드시 투표 합시다! 투표를 하면 경품추첨도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 하려면 한참 멀었는데 벌써부터 이러네.” 주유를 한 후 한참 후에 경수와 영희가 다다른 곳은 높은 곳에 옹기종기 작은 주택이 밀집한 동네였다. 경수는 서울에 아직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차가 들어설 수 없는 골목어귀에 주차한 경수와 영희는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여기가 내 집이야. 그 인간들은 어디엔가 숨어 있을 걸?” 영희는 허리를 굽히고 자물쇠 하나가 달린 작은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섰다. 경수가 그 안을 들여다보니 사람 한 명이 겨우 서있을 만한 부엌과 덩치 큰 사람이 한 명 누우면 꽉 찰 방 한 칸이 전부였다. ‘와 요즘도 이런 곳이 있네. 이런 데서 어떻게 사냐.’ 경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주위 집들이 다 이런 식이라는 걸 깨닫고는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여긴 화장실도 없네?” “저쪽으로 돌아가면 공동화장실이 있어. 소변 보러 가기는 그래서 요강을 쓰지.” “뭐 요강? 흐….” 경수는 한숨을 쉬며 허리를 펴고 조막만한 집들이 붙어있는 동네 전경을 바라보았다. 그때 멀리서 갈색점퍼를 걸친 덩치 큰 사내 두 명이 경수가 있는 곳을 노려보며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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