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정상인에 대한 기준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한 낙인이 존재한다. 장애인, 유색인, 에이즈 환자, 네팔 노동자, 북한사람 등등. 이러한 ‘사람 사이의 경계’를, 그는 카메라로 지우고자 한다. 육체 위에 덧입혀진 이데올로기, 피부색, 질병, 국가의 편견을 찬찬히 걷어내려 한다. 한 생명이 또 다른 한 사람으로 보일 때까지 느리고 길게 소통한다. 그리곤 셔터를 누른다. 함부로 찍지 않기. 거기까지다. 사진으로 예술을 하려는 것도, 세상을 바꾸겠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존구자명(存久自明). 존재란 오래되면 스스로 밝아지는 법이라 했던가. 그가 두고두고 묵혀둔 사진은 때로 꽃보다 아름답게 사르르 피어난다. 그걸 보여줄 뿐이다. 이번에는 북한사진만 모았다. 임종진의 첫 개인전. 제목은 이렇다. “사는 거이 뭐 다 똑같디요.” 소통의 사진가 임종진 "사람 사이의 경계를 지우고 싶다"
“북한사람들은 연애할 때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손은 잡을까요?” 그가 어려운 퀴즈를 낸다. 그런데 ‘북한사람과 연애’라니 어째 좀 어색하다. 머뭇머뭇 입가에 맴돌 뿐 당혹스럽게도 답은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번 사진전에 그 답이 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북한을 가장 많이 가본 축에 속한다. 월간 <말>과 <한겨레신문>기자로 재직 시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총 6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당시 북한사람들의 평범한 모습에 취해 카메라가 춤을 추듯 사진을 찍었다는 그는 북측 안내원에게 외려 신기한 구경거리가 됐다. “림선생! 사는 거이 뭐 다 똑같디요. 무엇이래 좋아서 그럽네까? 하하.” 그 때 그 사진들로 첫 개인전을 여는데, 장소가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이다. “대부분이 북한사람을 이데올로기와 연관 지어 떠올립니다. 분단 이후 그들을 ‘손잡고 연애도 안 할 것 같은 사람’으로 만든 게 바로 국회입니다. 상징적인 의미로 그 국회 안에서 사진판을 벌이는 것이죠. 남북대치 이데올로기를 주도적으로 생산해낸 곳에서 299명의 국회의원들에게 이념적인 틀을 벗은 북한사람들을 ‘보여주는’ 특별한 전시가 될 것입니다.” 마흔, 마음의 성년식 치르다 지역 언론사에서 시작해 <말>지에서 5년, <한겨레신문>에서 5년. 임종진은 지난 12년 간 언론사 사진기자로 일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가을 한겨레신문을 끝으로 기자생활을 그만두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다. 오래전부터 갈구해오던 일을 마흔에 접어들며 단행했다. 남들은 십년 전에 잔치를 끝내고 안착에 몰입할 나이에, 그는 새삼 잔치준비로 분주하다. 일단 삶의 터전을 바꾼다. 장소는 캄보디아. 이미 수차례를 오가면서 관계를 맺은 한 NGO로 들어가서 현지인들에게 사진과 동영상 기술을 가르치고, 또 머리도 잘라줄 계획이다. 이를 위해 요즘 짬짬이 미용기술을 배우고 있다. 물론 아직은 서툴다. 하지만 소꿉놀이처럼 재미나게 머리도 손질하고 일손도 보태고 사진도 찍으면서 그렇게 한 일 년 살다올 작정이다. 그런데 최근 자신의 행보가 지나치게 과장, 미화된다며 그것은 맞지 않다고 멋쩍어했다. “한겨레신문 기자 그만두고 캄보디아에 간다니까 좀 특이해 보이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결정이 절대 대단한 일이 아니에요. 애초에 해외봉사나 사진작업 같은 거창한 목적성은 없어요. 그냥 제가 좋아서 가는 거예요. 가족, 친구, 지인 등 나를 아는 사람들로부터 훌쩍 떨어져서 조용히 지내고 싶기도 하고요. 그동안 외부로만 시선을 돌렸는데 정작 그러느라 소홀해진 내면을 이번 기회에 들여다볼 생각이에요.” 임종진은 종종 그리고 간곡히 당부한다. 자신을 ‘사진작가’로 부르지 말기를. 그냥 ‘사진 찍는 사람’으로 보아주길. 아티스트의 기준은 엄격한데 자신은 함량미달이라며 하나하나 이유를 꼽는다. 거의 무조건 반사적으로 불쌍하다고 느끼는 연민주의를 벗겨내는 중이고, 아직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사람에 대한 편견을 마저 깨야 하고, 또 좀 더 부지런하고, 더 가벼워져야 한다고. “사진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고 현실이 바뀔 거라는 자기주문을 늘 해왔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첫술에 배부르길 기다리는 치기였지요.” 물론 지금도 세상이 변한다는 믿음은 있지만 전처럼 마음 조이고 카메라를 무겁게 들지 않는다. 일단 세상에 사진을 던져놓고 누군가와 공감하면 좋을 테지만 ‘아니면 말고’다. 간 곳을 또 가면 더 깊게 보인다
이 가을, 거리마다 난분분 흩어지는 낙엽처럼 가벼워진 그가 체게바라의 성장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얘기를 꺼낸다. 영화 중간정도에 체게바라가 나환자촌에 들러 나병은 피부로 전염되는 병이 아니라며, 장갑을 끼지 않은 채 환자들과 악수하고 가깝게 어울리는 장면이 있었는데 감동적이었다고. “2004년 캄보디아에서 말기 에이즈 환자를 처음 봤어요. 만나면 손 내밀리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움찔 뒤로 물러나 버렸지요. 솔직히 놀랍고 두렵더군요. 제 가슴에 남아 있는 어떤 ‘인식’의 틀에 갇힌 천박함을 본 거에요. 스스로의 한계를 느꼈고 한동안 사진을 찍지 않았어요. 그곳에는 말기환자들과 소아에이즈 환자들이 같이 있었는데 이후엔 아이들과 죽 놀기만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다시 미친 듯이 사진이 찍고 싶어지더라고요. 함께 하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거죠.” 그때 그는 약간의 갈등을 품었다고 했다. 사진가로 남을 것인가, 자원봉사자가 될 것인가. 왜 굳이 나누려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중요했단다. 하지만 지금은 둘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설핏 미소를 짓는다. 사실 언제부턴가 그에게 모든 ‘경계’는 무의미해졌다. 2003년도 이라크에 가면서 시야를 바깥으로 돌린 뒤로 그는 일 년치 휴가를 몰아서 접고 나르고를 반복했다. 이라크 두 번, 캄보디아는 세 차례나 다녀왔다. 작년과 올해 다녀온 인도와 네팔, 티베트도 꼭 다시 갈 계획이다. “한 번 간 곳을 또 가는 걸 좋아합니다. 이유는 안 보이던 부분이 눈에 들고 또 저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고맙기 때문이죠. 처음 갔을 때와 두 번째 갔을 때의 사진은 다릅니다. 갈수록 나아지는데 아무래도 어깨에 힘이 빠지니까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사진의 질은 시간에 비례하는 걸까. 반드시 옳다고 주장하진 않겠지만 자신처럼 더딘 사람에게는 그렇단다. 또 사진은 굉장히 표피적이기 쉬운 작업이고 어떤 고정화된 이미지로의 탈색이 가능한 표현행위이기에 “조심스럽다”는 말도 덧붙인다. 예를 들면, 90년대 후반 한 종교단체가 북한어린이 돕기 성금모금 캠페인에 쓴 포스터사진이 대표적인 경우다. 배는 볼록하고 뼈만 앙상하고 머리는 커다란 굶주림에 지친 아이, 그리고 그 앞에 찰랑찰랑 쌓이는 동정과 연민의 시선더미까지. 이는 북한 어린이의 코드화된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북한 어린이’하면 ‘굶주림’으로 자동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에 이런 것들은 진짜가 아니다. 대상화된 모습일 뿐. 사진 찍는 사람 임종진에게 중요한 것은 프레임에 담기는 대상에 대한 진심어린 인정이다. 어떤 고통이든, 어떤 삶이든, 슬픔이나 기쁨 눈물까지. 거창한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세상에 하나 뿐인 ‘한 사람의 우주’를 오롯이 담는 거다. 궁극적으로 찍는 이와 찍히는 이 서로가 영혼의 긴장을 풀고 편안해지는 상태에 이르기다. 이는 “어릴 때부터 하늘을 날기보다 물 위를 걷고 싶었다.”던 그이기에 감히 품을 수 있는 지극한 소망이다. 사람과 사람 잇는 '1인 NGO' 꿈꾸다
지난 여름 한 달 간 그는 티베트와 네팔을 다녀왔다. 재래시장, 빈민촌, 시각장애인 학교 등 구석구석 돌며 다양한 삶의 모습을 담아왔다. 당신의 몸을 다 덮는 수풀 더미를 짊어진 한 네팔 할머니 사진은 시사주간지 <한겨레 21>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지금껏 그가 찍은 사진 속 주인공은 어린이가 50%, 할머니가 30%다. 대개 할머니들은 신산한 세월이 묻어나는 주름 사이로 호수처럼 맑고 깊은 눈빛을 지녔다. 아이들은 갓 피어난 금강초롱처럼 싱그럽다. 비결을 묻자 조곤조곤 터놓는다. “빛을 살피는 버릇이 있어서 옆에 가만히 있다가 눈망울이 빛날 때 카메라를 든다.”라고. 그의 말마따나 ‘사진 찍는 사람’ 임종진은 재주도 좋다. 참말이다. 그는 ‘글 쓰는 사람’이기도 하다. 오는 11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개인전이 열리고 나면 세 권의 책이 나온다. 그간 작업한 글과 사진을 묶어낸 것이다. 그 중에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고(故)김광석에 관한 책도 있다. 생전에 공연장에서 찍은 김광석의 사진과 “항상 남의 말을 잘 들어주고 사유의 폭이 깊어 늘 크게만 보였던 광석이 형”에 관한 이야기다. 지난 11년 동안 단 한 번도 열어보지 않다가 이제야 추려냈다. 지독히도 느리고 진중한 그 다운 일이다. 내년 1월 6일, 김광석의 기일 즈음에 책이 나오면 그는 캄보디아로 떠난다. “제 꿈은 1인 엔지오에요.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어 가는 곳을 보여주고 지인들 후원받아 세계의 이웃들과 연결해 주는 거죠. 한겨레신문에 근무할 때도 캄보디아로 가기 전 사원메일 돌려서 400만원 상당의 성금과 물품을 보따리장수처럼 들고 갔던 적이 있거든요. 함께 하길 원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았어요.” 자신을 비롯해 뭇사람의 마음바탕에 어지럽게 그어진 확고하고, 부당하고, 불편한 사람 사이의 경계를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떼어가며 지운다. 카메라로 따스한 햇살 한 무더기씩 실어 나르며 빗금을 녹인다. 애오라지 한 인간의 숭고한 존엄성을 받아낸 그의 사진은 말해주리라. 모든 생명은 그 땅의 최상이었고 그 세월의 최선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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