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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엔 이랬는데... 2002년 5월 28일 한나라당 이회창 대선후보와 이명박 서울시장후보가 서울 명동에서 6.13 지방선거 거리유세를 하고 있다.
5년 전엔 이랬는데...2002년 5월 28일 한나라당 이회창 대선후보와 이명박 서울시장후보가 서울 명동에서 6.13 지방선거 거리유세를 하고 있다. ⓒ 권우성

오늘(9일) 아침 언론들은 이명박 후보와 이회창 후보 사이의 '보수적자' 논쟁을 일제히 다루고 있다.

"일부에서 제기된 소위 ‘한반도 평화비전’은 한나라당의 공식 당론이 아닙니다. 저의 대북정책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저의 대북정책은, 북한이 나아가야 할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되, 개혁· 개방을 선택하지 않을 경우 그 열매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명박 후보는 어제 재향군인회 초청 안보강연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갑자기 이야기가 달라졌다.

갑자기 달라진 이명박 후보의 대북관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는 8일 재향군인회 초청 강연에서 "(남북)평화협정은 검증을 통해 핵을 완전히 폐기한 이후에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는 8일 재향군인회 초청 강연에서 "(남북)평화협정은 검증을 통해 핵을 완전히 폐기한 이후에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 남소연

이명박 후보가 전에는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던 기억이 나서, 이명박 후보 홈페이지에 가보았다. 자료들을 검색해보니, 지난 7월 9일 이명박 후보 선대위에서 배포한 보도자료 '한나라당 한반도 평화비전에 대한 이명박 후보 견해'가 있었다. 거기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한나라당의 예비후보로서 당의 ‘한반도 평화비전’ 정책이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북한의 개혁과 개방을 이끌어내면서 한반도 영토조항은 그대로 두어 전략적이고 유연하게 대비하려는 취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단히 긍정적인 의미부여를 했다. 그런데 이제는 당론도 아니고, 자신의 정책과는 다르다고 선긋기를 하고 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바로 이회창 후보가 출마선언을 한 것이다.

이회창 후보가 출마선언을 한 바로 다음 날부터 누가 '보수의 적자'인가를 가리는 '이-이'의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바로 전날 이회창 후보는 출마 기자회견에서 이명박 후보를 가리켜 "국가정체성에 대한 뚜렷한 신념과 철학이 없고, 대북관이 애매모호하다"고 비판했다. 이회창 후보가 자신의 정체성을 문제삼고 나서자 이명박 후보도 이를 의식한 보수화 경쟁을 시작한 것이다.

이명박 후보는 향군강연에서 보수층을 의식하여 연설문구를 상당 부분 수정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자신의 보수적 정체성이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연설내용을 고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건국이념과 헌법정신 수호' '대한민국 정체성' '급격한 군축반대' 같은 용어들이 줄이어 등장했다.

이회창 후보가 "실패로 판명난 햇볕정책을 고수하겠다는 모호한 대북관으로 북핵재앙을 막을 수 없다"고 자신을 비판한 것을 의식한 듯, "지난 10년간 원칙없이 유화적으로만 흐른 햇볕정책으로 인해 우리 사회 내부의 갈등이 증폭되고 한미동맹이 이완됐다"며 햇볕정책에 대한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보수층의 지지가 이회창 후보에게로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명박 후보도 자신의 보수성 부각시키기에 나선 모습이다.

시대를 역행하는 '보수적자' 논쟁

예상되었던 상황이기는 하다. 이회창 후보가 출마회견에서 이명박 후보의 정체성을 비판하고 보수층을 자극하는 극우적인 주장들을 내놓는 광경을 보며, 결국 이명박 후보를 오른쪽으로 견인하는 상황을 낳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감스럽게도 이명박 후보는 그 예상에서 어긋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명박 후보가 그동안 탈이념적 실용주의를 제창해왔고, 그 결과 중도층의 지지를 얻었던 점을 돌아보면, 자기 중심을 잃은 빠른 변신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문제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는 사실이다. 이회창 후보가 계속 이명박 후보의 '모호한' 정체성을 비판하며 극우적인 주장들을 내놓을 경우, 이명박 후보가 '나도 보수'라는 식의 보수화 경쟁으로 응답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무의미한 일이요, 우리 정치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일이다. 낡은 이념대결이 이번 대선에서는 퇴조하는 경향을 보여왔었는데, 이제 갑자기 냉전시대의 낡은 이념적 주장들이 활개를 치는 대선판이 되어버린다면 이번 대선도 과거와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이다.

필자도 이미 10월 29일자 <오마이뉴스> 칼럼 '이회창의 대권 3수는 국민모독죄'에서, "이회창 전 총재의 출마는 이번 대선을 다시 구시대적인 이념대결의 장으로 몰고 갈 위험이 크다"는 우려를 표한 바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명박 후보도 자신이 제창했던 탈이념적 실용주의를 스스로 공수표로 만들어버렸다는 비판을 받게될 것이다. 그동안 이명박 후보가 탈이념적 중도성향층의 상당한 지지를 얻어왔음을 생각한다면, 이런 식의 '이회창 따라하기'가 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도 잘 판단해야 할 것이다.

 8일 오후 서울 노원구 중계4동 주공아파트 중증장애인 가정을 방문한 이회창 후보가 주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8일 오후 서울 노원구 중계4동 주공아파트 중증장애인 가정을 방문한 이회창 후보가 주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 권우성

이명박, '이회창 따라하기' 중단해야

'초록은 동색'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이명박, 이회창 두 후보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누가 더 보수적인가'를 가리는 어처구니없는 경쟁을 대선 한복판에서 벌인단 말인가. 보수진영 두 후보 사이의 경쟁은 그것이 아니라,  '누가 더 시대에 부응하는 합리적인 보수인가'를 가리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이명박 후보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의 논쟁구도가 무엇인가조차 제대로 설정하지 못한 채 그저 '이회창 따라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에게 가 있던 '산토끼'들은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이, 새로운 경쟁자가 한 사람 생겼다고 하루아침에 말을 뒤집는 모습은 신뢰를 잃게 만드는 일이다. 우리는 대선후보들이 내놓았던 노선과 정책이 얼마나 일관성을 갖고 있는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것인가를 지켜볼 것이다.

이명박· 이회창 두 후보는 어이없는 '진짜 보수' 논쟁을 즉각 중단하기 바란다. 벌써 21세기 들어서 두 번째 치러지는 대선이 아닌가. 이러면 정말 창피해진다.


#이명박#보수적자#이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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