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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22일 금요일.


Saint Jean-Pied-de-Port.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선에 접한 이 작은 동네는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Camino Frances', 프랑스 길의 시작점이다. 동네 이름은 '야고보 성인 걷는 길의 시작'정도 되려나? 이 동네를 지나 피레네 산맥을 넘으면 두 발로 국경을 넘는 셈이다.


5시 반쯤 이 마을의 기차역에 도착했다. 부지런히 걸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우체국, 문 닫기 직전에 들어가 쌩쇼를 벌여, 열심히 꾸린 짐을 가장 큰 해외소포 박스에 꾸역꾸역 넣어 산티아고로 보냈다. 무게가 7kg 정도가 나왔다. 나보다 먼저 짐이 성지에 닿는구나.


그리고 물어물어 닿은 동네는, 마치 중세의 느낌이란 것이 있다면 이런 것일까 할 정도로 아기자기 귀여운 느낌이었다. 마을 자체가 순례의 시작점이라는 의미를 가진 곳이라 관광지로도 유명한가보다.

 

좁은 길을 따라서 낮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기념품점, 사설 숙소, 그리고 성당 등이 있었다. 볼 것이 참 많은 동네였는데, 너무 늦게 도착했고, 너무 할 일이 많아서 제대로 본 것도 없이 떠나느라 바쁜 곳이었다.


우선 가장 급한 순례자 여권 발급과 숙소 해결을 위해 순례자 사무소를 찾았다. 오스피탈레로(자원봉사자) 할아버지들이 안내를 해 주시며 여권을 발급해주시고 오늘 묵을 침대를 정해주셨다. 그리고 내일 걸을 길의 지도와 함께 주의사항이 담긴 안내문, 앞으로 걸을 800여 km의 고도 정보, 또한 그 길의 모든 숙소 리스트가 담긴 세 장의 안내지를 주셨다. 이 종이들이 나의 순례 가운데 유일무이한 생명줄과 같은 정보가 되어주었다.


사무소에서 좀 더 걸어 올라가니 '알베르게Albergue'라고 불리는 숙소가 있었고, 이미 늦은 시간이라 방은 거의 다 찬 상태였다. 침대에 짐을 놓고 돈을 조금 챙겨 다시 나왔다. 내일은 산길이라 걷는 가운데 상점도, 식당도 하나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미리 식량을 사 둬야 했다. 조개도 사고 싶었다. 이 길을 걷는 순례자의 상징, 그것을 가방에 매달고 싶었다.


순례자 사무소에는 조개들이 잔뜩 쌓여있고, 기부제로 순례자들에게 판매되고 있었다. 기념품 상점에서 돈 주고 산 순례자들은 만만찮은 비용을 냈던데, 지금 생각하면 민망한 돈을 내고 집어온 조개였다. 피레네 산에서 매단 조개, 이 조개와 함께 45일을 걸었다. 그러나 이 조개는 지금 나에게 없다….


작은 상점으로 직행하여 이리저리 둘러보며 신기해하다, 사과와 먹을거리를 조금 샀다. 저녁은 뭘 해 먹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주방이 있었으니 싸들고 온 신라면 스프를 써먹어보자면서 파스타 면을 샀다. 장을 보던 중에, 순례자 사무소에서 함께 수속을 밟던 아시아인 여성을 만나 인사를 했다. 한국인, 아니면 일본인일 것이란 생각을 했는데, 일본에서 온 S씨였다. 그 분과 함께 장을 보다가 "제가 파스타로 라면을 만들까 하는데 같이 드시겠어요?"라고 제안을 했다.


왠지 급작스럽다고 느끼는 것 같았지만, '그렇게 해요'라고 해,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미사를 마치고 저녁을 준비하고 싶어서, 미사 후에 만나자고 얘기를 꺼냈다. 하지만 이른 점심 이후 밥을 못 먹었음을 실감하고, 또 미사시간도 확실히 몰라서 먼저 밥을 먹자고 말을 바꾼 뒤, 숙소로 왔다.


이미 식탁 주변에선 몇몇 순례자들이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주방을 기웃거리며 뭘 어떻게 해야 하나 허우적거리는데, 숙소의 오스피탈레라로 추측되는 나이 지긋하신 아주머니께서 주방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계셨다. 내가 파스타 면을 들고 헤매고 있으니 답답해 보이셨는지 (프랑스 어로 아마도) 내놔봐라 내가 해 줄게, 하시면서 물을 끓여주시고 너희는 가서 쉬라고 식당으로 내쫓으신다.

 

멍하니 무슨 일인가 하는 채로 S씨와 함께 식당에 앉아 다른 순례자들과 첫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아주머니께서 파스타 한 접시와 소복하게 담긴 으깬 감자를 내미신다. '뭐지? 뭐지?'하는 가운데 한 순례자가 "아주머니께서 순례자들을 위해 준비하신 거예요"라고 통역을 해준다.


'우와, 공짜 저녁이다!' 이미 면은 뜨거운 물에 낙하하여 바글바글 끓어가고 있었고, 내 앞에는 아주머니의 손맛이 담긴 진짜 프랑스식 파스타와 감자요리가 가득했다. 어쨌든 '감사히 먹겠습니다'하고 먹기 시작했다. 성호를 그으며 식사를 하자, '너 가톨릭이니?'하고 묻는다.


"어, 이번 년도에 세례 받았어. 갓 태어났지."
"와 축하해! 근데 신기하다. 아시아 사람이 가톨릭에다가 성지순례를 하러 여기까지."


충분히 이상할 모양새다. 마치 우리나라 절에 새하얀 앵글로색슨이 와서 '나는 불교도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왔소'하는 그런 느낌? 사실 수 년 전에 해남 대흥사에 갔을 때, 수련 중이라는 백인을 만난 적도 있긴 했다. 그리 이상하진 않았지만….

 

 

짧은 저녁식사를 하면서 많은 얘기를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지난 4일간 여행하며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어떤 붕 뜬 느낌이, 그동안 내가 24년간 느껴왔던 그 부유감이, 땅과 밀착하지 못한 채 기름처럼 떠돌았다는 느낌으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이곳에서, 나를 끌어 안아주고, 반겨주고, 따뜻하게 맞아주는 사람들을 만나서 비로소 내 두 발이 땅과 만나, 걸음을 걸을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물론 그 때 그 장소에서는, 그저 뭔가 바쁘고 들뜨고 급하고 뭔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베시시' 웃고 주시는 밥 먹고, 마련해 주신 침대에서 자고, 그것이 내 기억의 전부이지만.


여섯 명이 한 방을 나눠 쓰며 시간마다 잠에서 깨고, 새벽에 삐그덕 대는 대문을 살그머니 열어 새벽별을 쳐다본다.


이제 걸음이 시작되는 구나,
정말 여기에 왔구나.


그리고, 깊은 감회.


#산티아고가는길#카미노데산티아고#스페인#성지순례#도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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