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가만히 있으면서 나그네를 부른다. 나그네는 그 길 속에서 자신을 잊는다. 언제나 일요일이면 금샘의 길은 나를 부른다. 새벽 일찍 깨어난 그 길로 타박타박 걸어갈 때 나는 한 마리 낙타가 된다. 세상의 길은 사막의 길. 사막을 걷다 보면 늘 목이 마르다. 낙타에게 필요한 것은 길이 아니라 먼 길을 걸어왔으니 한 그릇의 물이 필요하다. 금샘가는 길, 타박타박 등짐을 진 낙타는 모든 것을 잊고 오직 필요한 한 그릇의 물을 생각한다. 금정산의 금샘은, 도시의 사막 한가운데 솟은 오아시스다. 산 속 깊이 숨은 오아시스, 그 오아시스를 찾아가는 길은 여럿이 걷기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혼자가 된다. 여행은 혼자가 좋다. 둘이 가도 좋지만 이미 여행은 함께 출발하는 순간, 혼자가 된다. 혼자가 된 그 길의 끝을 누구라도 보게 된다.
혼자 떨어져 걷다보면 길 아닌 길을 헤매게 된다. 그러나 산속의 길은 잃어버릴수록 좋다. 길은 많이 잃어버릴수록 이제껏 만날 수 없는 길을 만나게 해준다. 길을 잃다 보면 바위의 길을 만나 바위와 이야기하기도 하고, 산비탈에 선 고목을 만나 나무와 전설을 이야기하고, 야생화를 만나면 바람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둘이 아닌 혼자 걷는 산길만이 더 많은 대화를 들려주는 산, 산, 산… 산이 금정산이다. 울긋불긋 곱게 물들어가는 금정산의 단풍은 지금이 최상이다. 최남단의 금정산은 북쪽의 불타는 단풍의 설악산이나 치악산과 지리산의 핏빛 단풍에 비해 단풍다운 단풍을 제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냥 은근히 구들장을 데우는 군불처럼 따뜻한 불길로 타오르는 금정산의 금빛 단풍의 불길이 번지는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너덜겅을 만나고 너덜겅의 바위들 하나하나 댕댕 울리는 종소리를 듣는다.
범어사 창건 설화에는 금샘으로부터 시작된다. "동국 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 50척 높이의 바위가 솟아 있다. 그 바위 위에 금색 우물이 있는데 사시사철 언제나 가득 차 마르지 않았다. 그 속에는 범천(梵天)으로부터 오색구름을 타고 온 금어(金魚)들이 헤엄치며 놀고 있다"고 <동국여지승람>에 적혀 있다. 여기서 범천은 불법을 수호하는 인격신이다. 범(梵)은 우주 최고의 원리를 의미하고, 적정(寂靜)과 무애(無碍)의 경지를 나타낸다. 만어사의 너덜겅의 일만의 바위 속에 석어가 헤엄치고 있다면, 범어사 너덜겅의 수만의 바위 속에는 금어들이 헤엄치며 놀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이 가을의 단풍들은 보면 금어가 된다. 하늘 하늘 하늘 속을 헤엄치는 금어의 유유자적 속에 무거운 마음은 때를 씻고 낙엽보다 가벼운 영혼으로 헤엄치고, 육신은 타박타박 발자국을 남기며, 어느새 깊은 금정산 품에 안긴다.
산을 찾는 사람은 모두 착한 사람일지 모른다. 아니 좋은 사람인지 모른다. 산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 자연처럼 부드럽다. 초로의 신사가 타박타박 걸어가는 발소리 위에 내 발소리를 인장처럼 눌러 찍으며 나도 모르게 따라간다. 모든 세상은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는 길. 새 길을 찾지만 그 길은 어느 사이에 옛길을 찾아가는 길로 이끈다. 뭔가 이야기를 꺼내 무언가 묻고 싶은 마음을 지그시 누른다. 어디서 사는 누구일까. 무엇을 하던 분일까. 여러가지 상상을 하면 초로의 신사가 앞서가는 낙엽길을 따라 걷는다. 사각사각 은화지처럼 구겨지는 낙엽소리에 길은 깊어진다. 깊어지는 산길 속에 쭉쭉 뻗은 나무의 길은 하늘을 바라보게 한다. 일엽편주처럼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장 하나 나뭇가지에 걸려 한참이나 머문다.
금정산은 길을 잃고 싶어도 길을 가리켜 주는 산이다. 금정산은 부산의 명산이며, 많은 봉우리를 거느린 산. 그 산 중에도 의상봉으로 향하는 길에는 마음의 길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의상스님의 법명에서 비롯된 의상봉(620m). 의상 스님은 원효 스님보다 금정산에 늦게 오셨다고 한다. 스님은 원효 스님을 쫓아다니며 학문을 하고 불교의 교리인 화엄종을 넓히는데 진력했다. 그리고 원효 스님보다 나이도 8세나 어리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원효봉(687m)보다 낮다. 그러나 거북이처럼 늦게 금정산에 도착하여도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동해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망대 역할을 하는, 의상봉으로 우뚝 서 계신다. 나는 누구나 알고 있는 원효 스님보다 원효 스님의 그림자에 가려진 의상 스님의 발자취가 남은 의상봉 가는 길이 좋다. 현세를 살아가는 이 세상은 누구나 많이 알려진 길을 좋아하지만, 우리의 삶은 드러나지 않는 길 속에 그 진리가 또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말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하지만, 부산의 모든 길은 금정산에서 뻗어나간 길. 금정산을 오르는 길도 여러 갈래의 길이 길을 부른다. 언제나 금샘가는 길은 길을 잃는다. 길을 잃다 보면 목마른 길 하나를 만나는 것이다. 그 길은 내가 여지껏 걸어온 길, 그러나 내 길도 수많이 길을 잃어서 헤매다가 간신히 이끌어 온 길이다. 뒤돌아보면 보이지 않는 그 길… 그러나 금정산을 오르면 그 수 많은 길이 나를 따라온다. 그리고 무거운 바윗돌 같은 많은 짐들을 부리고 내려간다. 그래서 또 한 주가 지나면 산이 부르는 길을 휘적휘적 올라온다. 금정산이 있어 나는 존재하는 것도 같다. 아니 내가 있어 금정산은 존재하는 것인지도. 여기와서는 어느 봉우리를 보아도 그 모양은 다르다. 마치 바위 하나 돌 하나 수정처럼 빛나고 있다. 저 많은 바위를 품은 금정산은 그윽한 불타의 품처럼 말이 없고, 단풍은 더욱 불길처럼 번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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