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왜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이미지는 ‘한반도에서 문물을 흡수하던 후진지역’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한국 역사교과서의 고대사 부분에서는 왜국의 비중이 상당히 낮게 설정되어 있다. 삼국 간의 항쟁 중에 어쩌다 한 번씩 등장했다가 혼쭐만 나고 돌아가는 한심한 단역 정도의 이미지를 갖고 있을 뿐이다.
오래 전부터 한반도 사람들이 고대 일본의 위상을 낮게 평가한 것은 다분히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계의 중심인 중원 제국과 활발하게 교류하는 나라를 선진적인 나라로 인식하다 보니, 한민족 왕조의 방해 때문에 중국과의 교류가 원활치 못했던 고대 일본을 무조건 후진적인 나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위 삼국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고대 왜국이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단순히 단역에만 그쳤던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왜국이 고구려·백제·신라 등과 각축을 벌이면서 동아시아 질서의 형성에 적극 참여한 측면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당시의 일본은 어쩌면 단역이 아니라 조연, 나아가서는 주연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잘 아는 이야기 중에 박제상(朴堤上, 363~419년) 설화가 있다. ‘설화’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사실’이다. 역사적인 사실에다가, 박제상의 부인이 망부석이 되었다는 등의 비상식적인 이야기가 추가되었기 때문에 설화라고 불릴 뿐이다.
이 이야기에서 얼른 떠오르는 이미지는 충신과 망부석이다. 하지만, <삼국사기> 권45 박제상 열전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고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일본이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한국인들이 잘 알고 있는 박제상 설화 중에서 사실적인 부분 몇 가지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402년에 즉위한 신라 실성왕이 왜국과 강화를 한 뒤에, 왜국의 요구에 따라 직전 왕인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일본에 볼모로 보냈다.(2)고구려에서 장수왕이 즉위한 411년에 실성왕은 고구려의 요구에 따라 미사흔의 형인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3)미사흔·복호의 형제인 눌지왕은 즉위 후에 박제상을 고구려·왜국에 보내 형제들을 구출해오도록 하였고, 박제상은 훗날 설화의 주인공이 될 정도로 왕명을 충성스럽게 이행했다.여기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왜국의 국제적 위상이다. 실성왕이 왜국과 강화를 맺은 402년은 고구려에서 광개토대왕이 재위하던 시기다. 신라가 동아시아 대제국인 고구려 대신 왜국을 전략적 파트너로 삼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그만큼 왜국의 위상도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는 왜국이 고구려·백제·신라의 항쟁구도 ‘밖’에 있었던 게 아니라 그 항쟁구도의 ‘안’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점은 실성왕의 직전 왕인 내물이사금 시대의 역사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신라는 내물마립간 시기의 초반에는 왜국과 대립하면서 백제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삼국사기> 권3 내물마립간 본기에 따르면, 내물왕 9년(364) 4월에 “왜병이 크게 쳐들어”와서 “왕이 듣고 이를 대적치 못할까” 두려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신라는 내물마립간 시기의 후반에는 고구려·전진과 친교를 다지는 동시에, 왜국과 대립하고 백제와는 냉랭한 편이었다. <삼국사기> 내물마립간 본기에 따르면, 내물왕 38년(393) 5월에 왜국 군대가 신라 수도 금성을 5일 간 포위하였다고 한다. 바다를 건너온 왜국 군대가 신라의 수도를 5일간이나 포위하였다는 것은 당시 왜국의 역량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물마립간 때에 왜국의 위협에 늘 시달린 데에 대한 반성으로, 실성왕은 즉위하자마자 왜국과의 강화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미사흔을 왜국에 볼모로 보냄으로써 유명한 박제상 설화의 단초를 만들기도 했다.
물론 한때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었던 실성왕이 개인적 감정 때문에 고구려 대신 왜국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국가정책이나 대외관계를 개인적 감정만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성왕 시기의 신라 지배층이 왜국을 선택한 데에는 그만한 전략적 이유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광개토대왕이 재위하던 전성기의 고구려를 따돌리고 왜국이 신라를 자국 편으로 끌어넣었다는 것은, 소위 삼국시대에 일본의 국력이 오늘날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시시한 수준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삼국사기> 박제상 열전의 후반부에 의하면, 당시의 왜국이 신라에 대해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눌지왕의 형제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 왜국에 거짓 망명한 박제상이 미사흔과 함께 왜국의 장수로 임명되었고, 그런 다음에 왜국 조정의 비밀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정이 내려졌다. “신라를 멸한 후에 제상과 미사흔의 처자를 잡아 돌아오자.” 왜국이 신라에 대해 군사적 자신감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위와 같이 박제상 시대를 전후한 시기의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살펴보면, 왜국이 삼국 항쟁의 주변부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삼국과 함께 하나의 구도를 이루고 있었으며, 또 왜국의 역량도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고구려·백제·신라가 항쟁을 한 게 아니라, 고구려·백제·신라와 더불어 일본이 항쟁을 벌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한국 역사교과서에서 왜국을 단역으로 따돌린 채, 고구려·백제·신라만을 놓고 소위 삼국시대를 기술하다 보니, 당시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진면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의 현행 역사교과서 체제를 따르는 한, 고대에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하나의 무대로 하여 전개된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생생한 현장을 결코 포착할 수 없을 것이다.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은 일본이 한반도에 비해 중화문명권의 영향을 덜 받았다는 점 때문에 일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최근의 식민지 경험이 일본에 대한 의식적 무시를 한층 더 부채질하고 있다. 하지만, 박제상 설화와 <삼국사기> 등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고대 일본은 한반도와 함께 엄연히 하나의 역사 무대를 이루고 있었다.
근대 일본이 한국과 아시아에 저지른 죄악을 항상 가슴에 담아두는 것은 향후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막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 아픔 때문에 고대사까지 왜곡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민족 혹은 국경을 기준으로, 고대 세계의 역사까지 재단하는 것은 옳지 못한 태도일 것이다. 한민족과 일본이 오늘날처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던 소위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술할 때에는, 당시의 기준으로 역사무대의 범위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고대에 고구려·백제·신라뿐만 아니라 일본까지 하나의 역사무대를 이루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한국사와 동아시아사는 지금보다 훨씬 더 풍요롭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