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못 온답니다!"
"네!?"
"폭설로 길이 막혔데요!"
칠레국경 5km를 남겨놓고 이 무슨 일인가! 운전사 겸 가이드인 산티아고가 다급하게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돌아가는 길도 언제 막힐지 모릅니다. 서둘러야 해요. 칠레로 넘어갈 분들은 대피소에 남으시면 됩니다. 원한다면 저와 함께 우유니Uyuni로 돌아가셔도 되고요. 자 이제 선택해 주십시오."
인생이 그렇듯이 여행도 늘 선택의 연속이다. 볼리비아 우유니에서 출발한 투어는 2박3일 동안 4륜구동 지프를 타고 소금사막과 국립공원을 돌아본 후 칠레 '산 페드로San Pedro'에서 끝나는 걸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폭설로 걸어서 2시간이면 갈 거리를 앞에 두고 선택의 순간이 온 것이다. 그 먼 길을 되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해발 4000미터 대피소에 남아 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투어 첫날, 소금사막투어는 정말이지 황홀했다. 그곳에는 사막에 눈이 내린 것처럼 새하얀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해발 3800미터에 소금으로 생겨난 사막이라니! 아주 옛날에는 이 높은 곳이 바다였다는 얘기다.
아내와 난 믿기지 않아 소금덩어리를 혓바닥에 대었다가 벌러덩 드러누웠다가 아이마냥 팔딱팔딱 뛰어다녔다. 지프를 타고 하루 종일 소금 위를 달렸지만 조금도 짜지 않을 뿐더러 지루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투어는 그것으로 끝났다.
둘째 날 오후부터 눈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밤이 되자 기온이 뚝 떨어지며 눈보라가 무섭게 몰아쳤다. 셋째 날 아침에는 산티아고가 더 서두르기 시작했다. 길이 막힐 걸 예감이라도 한 듯. 모든 구경거리를 포기하고 '하얀호수Laguna Blanca'를 향해 내달리기만 했던 것이다. 오직 칠레로부터 넘어온 차를 갈아타야 한다는 일념으로.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눈 내리는 온천에 손만 담그고 와야 했던 것이 차마 원통할 뿐이었다. 그런데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칠레로 간다는 기쁨 하나로 온천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내가 모든 걸 단념하고 달려왔는데 국경을 코앞에 두고 다시 돌아가라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루 이틀이면 될 거라는 기대를 한 채 아내와 나는 대피소에 남기로 결정했다. 스위스인 토비아Tobia 역시 길이 열리기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날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알지 못했다. 바야흐로 관광은 끝나고 '서바이벌 투어'가 시작된 것이다.
흐느적거리는 매트리스와 땟국이 밴 담요
산티아고가 나머지 일행 세 명과 함께 우유니를 향해 떠나고, 우리들은 대피소에 짐을 풀었다. 침대시트를 기대할 리도 없지만 매트리스와 담요상태가 심각했다. 매트리스는 반쯤 물이 빠진 물침대마냥 흐느적거리고 담요는 땟국이 배어 원래 색깔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나마 날씨가 추워 침대벼룩이 없다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뿐이 아니었다. 대피소에는 하루 먼저 고립된 세 명의 여행자들이 더 있었는데, 그들은 '선배'들답게 이곳 사정을 친절(!)하게 브리핑해준다.
"물이 없어 이틀 동안 세수도 못했다니까!"
"물론 전기도! 해 떨어지면 잠자는 것 말곤 할 일이 없어!"
"그 흔한 장작난로 하나 없거든. 대낮에도 추워서 담요를 몇 장씩 둘러야 할 걸?"
물과 전기와 난로에 이은 마지막 결정타가 마침내 우리 부부의 입을 벌려놓고야 만다.
"저기 창틀까지 차오른 눈 좀 봐. 어제부터 엄청나게 내리더라고.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줄 알았지 뭐야. 생전 이런 눈은 처음이라니까! 아마 내일도 길이 뚫리긴 어려울 거야!"다음날 아침이었다. 토비아(동지1: 투어일행이었던 그는 에콰도르 키토에서 6개월간 의료봉사를 마치고 스위스로 귀국하기 전에 남미여행 중)가 방문을 열고 소리를 질렀다.
"다들 나와 봐! 눈이 그쳤어!"정말이었다. 손바닥만큼 파란 하늘도 나왔다. 잠시였지만 모두에게 희망찬 아침이었다. 그러나 대피소 관리인 막시마Maxima 아줌마의 라디오통신 결과는 사뭇 달랐다. 눈이 그쳐도 치우는데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는 거였다.
대피소의 추위는 살인적이었다. 배낭 속에 든 옷을 몽땅 꺼내 입고 양말도 두 개씩이나 껴 신었지만 온 종일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어야 했다. 막시마가 끓여주는 코카차를 마시는 시간이 그나마 훈훈했는데, 또 그 뒤처리가 간단치가 않았다. 보통 차는 '이뇨작용'을 돕는다고 한다. 즉 소변이 자주 마려워 지는 법인데, 화장실이 밖에 있었던 것이다.
참다 참다 문을 열고 나서면 먼저 '휘이이잉' 눈보라가 덮친다.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화장실까지 달려가는데 자칫 몸이 날아갈 듯 위태롭다. 발이 무릎까지 푹푹 빠지니 뛰어가는 일만도 만만치가 않다. 이윽고 화장실에 골인해서 문을 닫으면 '휘이잉' '촤르르르' 날 잡아먹지 못해 안타깝다는 양 예까지 쫒아온 눈보라가 문을 긁어댄다. '아으으~' 참았던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쾌감도 잠시 다시 돌아갈 일이 걱정이다.
그렇게 또 하루가 갔다. 다음날, 그러니까 셋째 날 아침, 오늘도 토비아가 호들갑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해가 떴어! 하늘이 파랗다니까!"
침낭으로부터 몸이 빠져나오기를 싫어했다. 밤새 지붕과 창문을 쓸어가던 눈보라소리에 잠을 설쳤던 것이다. '의사라는 친구가 저렇게 촐랑대서야 원!' 난 중얼거리며 일어났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바람이 멎어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에서 따스한 아침햇살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나갔을 땐 다들 감격스러워 눈을 감고 두 손을 편 채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모닝커피 대신 햇살을 마시는 사람들처럼.
그날 아침, 대피소의 동지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들처럼 웃고 있었다. 적어도 막시마의 절망적인 라디오통신 결과를 듣기까지는. 오늘은 물론 내일도 칠레 국경일이라 제설작업을 쉰다는 소식이었다. 아직 본격적인 제설작업은 시작도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 마침내 동지들은 넋이 나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 아내가 나를 불렀다.
"어쩌겠어, 자연 앞에서. 마음을 비워야지!"
아내는 창문까지 차오른 눈을 치우며 해를 맞이하느라 부산을 떨고 있었다. 사실 아내의 말이 백번 옳았다.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즐겨야 하는 법!
"이틀 후에도 고립돼 있으면 호수 얼음물로 머리를 감겠어"
나는 두 개씩 껴 신은 양말을 벗었다. 그리곤 맨발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 눈을 뭉쳤다. 목덜미까지 문질러대며 세수를 하고 발도 닦았다. 짜릿한 쾌감이 온 몸으로 번졌다. 손 꼽아보니 꼭 4일만이었다.
먼저 베아트Beat(동지2: 남미만 6개월째 여행 중인데 시커먼 수염을 기른 익살스런 스위스 친구)가 양말을 벗고 나오더니 '으아아~!' 괴성을 질렀다. 곧 모두가 뒤따르고 대피소 앞 눈밭은 시끌벅적 공동세면장으로 변했다. 한껏 의기양양해진 나는 허세도 부려본다.
"만약 이틀 후에도 고립되어 있으면 그땐 저 하얀 호수의 얼음물로 머리를 감겠어!"
"정말이지? 만약 네가 머리를 감으면 난 샤워를 한다!"
"으하하하!"
아내의 말처럼 대자연 앞에서 마음을 놓아야할 시간. 6명의 동지들은 초연해지기로 했다.
다함께 '푸른 호수Laguna Verde'로 하이킹을 다녀오고, 창가에 앉아 엽서나 일기를 쓰고 책을 읽다가, 무심히 창틀이 만들어준 액자 속 하얀 세상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그러다 심심해지면 우리들은 미친 듯이 카드놀이에 몰입했는데 서로의 이야기도 어느덧 밑천이 떨어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날 후르헨Jorgen이 사스키아Saskia(동지3,4: 남미를 자전거로 여행 중인 40대 후반의 네덜란드 커플)의 생일이 오늘이란 소식을 알렸다. 내내 방안에서 혼자 꼼지락거리더니 과자박스로 만든 생일인형․카드와 함께 과자로 쌓아올린 케이크를 내놓았다. 토비아도 깊이 짱박아 둔 초콜릿을 꺼냈다. 우리 부부가 예쁜 엽서 한 장을 더하자 막시마는 코카차를 끓여냈다.
"모두들 고마워! 그리고 후르헨, 당신 정말 멋져!"
사스키아는 감동으로 눈물이 글썽했다. 8년 전 두 사람은 각자 자전거를 타고 아프리카를 여행하다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 후 호주를 함께 횡단했고 지금은 남미를 종단하고 있는 중년의 자전거 커플이다. 폭설 때문에 갇힌 대피소에서, 길이 막혀 만난 친구들과 함께 맞이한 생일파티. 그 기쁨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루, 또 하루가 지나갔다. 우리들은 눈으로 고립된 해발 4000미터 대피소에서 자연의 하루를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붉은 해가 호수 너머로 떠오르면 하얀 망토를 걸친 산들이 가장 먼저 깨어나요. 플라맹고가 호수를 날고 연한 눈보라가 따라갑니다. 휘이이잉. 햇살과 바람이 뒤엉켜 장난을 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산은 그림자를 호수 위에 띄웠어요. 그리고 해가 졌지요. 오렌지와 분홍빛이 이룬 층층 사이로 파란빛도 시린 얼굴을 내밀어 설명할 수 없는 저녁놀을 만들어냅니다. 어둠은 잠시 뿐. 해가 저문 자리에 다시 달이 떴습니다. 이틀쯤 모자란 보름달.'
여행 떠나서 새로 생긴 버릇이 하나 있다. 감당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만나면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엽서를 썼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지만 찾아온 이 시간, 나그네는 고마웠다. 만약 여행에도 클라이맥스가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 같다.
올 것이 왔다 고립 6일째
그러나 대피소의 사정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넷째 날 점심부터 소스 없는 스파게티면만 나오더니 저녁에는 맨 밥에 삶은 달걀하나가 전부였다. 그 다음날은 커피마저도 바닥났다. 어쩌다 야마고기 한 조각이라도 나오면 다들 미친 듯이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하기도 했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고립 6일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그날도 눈으로 양치하고 들어오는데 막시마가 모두를 모아놓고 설명하고 있었다. 최후통첩이었다. 길이 언제 열릴 지 요원하다는 것, 대피소 식량이 다 떨어져 간다는 것, 여행사가 우유니로 돌아오라고 라디오통신을 했다는 것, 차비는 물론 우유니 숙박과 칠레까지의 우회로 교통까지 여행사에서 책임질 거라는 것, 대강의 요지는 이랬다.
아내와 나는 이제 대피소 생활에 익숙해졌고, 지금껏 기다렸는데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 망설여졌다. 이미 일주일 전에 출국도장을 받았으므로 서류상으로는 볼리비아를 떠난 상태이기도 했으며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여행사의 말을 믿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눈에 묻혀버린 길을 찾아나서는 일이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것까지 생각이 미치자 영 내키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언제 길이 뚫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식량까지 동이 났다는 데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서바이벌투어(!)에 함께 했던 동지들은 모두 우유니로 귀환하기로 결정했다.
지프가 하얀 호수를 끼고 눈길을 내달렸다. 모두들 대피소에 뭔가를 흘려두고 온 사람들처럼 힐끗힐끗 눈길에 남은 바퀴자국을 돌아보곤 했다. 대피소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아내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오늘이 추석이구나. 무사히 도착해서 부모님께 전화라도 드리면 좋겠다." (2편에서 계속) 덧붙이는 글 | 양학용 & 김향미 부부는 결혼 10년째이던 해에 길을 떠나 2년 8개월 동안(2003년 10월 16일~2006년 6월 4일) 아시아·유럽·북미·중남미·아프리카·중동·러시아 등 세계 47개국을 여행했다.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wetravel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