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9일)는 오후부터 스산한 바람과 함께 여우비가 내렸다. 빗방울이 드문드문 내리며 가을을 재촉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아파트 입구 가로수 길가에 수북이 쌓인 은행잎들이 마치 계절의 흐름에 허물 벗듯 황금빛 비늘 조각으로 무수히 깔려 있다. 그 위에 또 어쩌면 가을 요정의 눈물처럼 빗방울이 떨어져 슬픔인지, 낭만인지 모를 매혹적인 축축함을 은근하게 연출해 놓았다. 세월은 이렇듯 비와 바람으로 스쳐 먼 우주의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는 모양이다.
어제 저녁 이제는 해가 짧아져 금세 어둠 속으로 도망치듯 사라져 가는 11월의 하늘을 바라보며 "내일 아침 날씨는 괜찮을까?" "아마도 괜찮겠지!" 나는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하며 약간의 염려로 마음이 뒤척였다.
아이들이 이른 아침의 차가운 바람을 헤치고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치 자석의 힘에 이끌려 모여드는 쇳가루 조각들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씩씩하게 모였다. 그들의 눈빛이 신선하다.
차가운 공기와 바람으로 코끝과 손끝이 시릴 법도 한데, 터벅터벅 걸어와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고는 '히죽' 하고 천연덕스런 미소 한 방씩을 날려준다. 어젯저녁 나의 소심한 염려가 씻은 듯이 깨끗하게 소멸해 버린다.
우리는 자유로를 스치듯 지나고 내부순환로에 가볍게 올라선 뒤 북부간선도로를 거쳐 '동구릉'이 있는 구리 나들목까지 별다른 혼잡 없이 달렸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왕조묘역이자 조선왕조 최고의 명당인 '동구릉'에 발을 내려놓았다. 우리는 그 옛날 영욕의 시절로 돌아가는 왕릉 숲 여행을 시작한 셈이다.
매표소 입구를 지나서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는 동구릉의 관문이자 신문(神門)인 커다란 홍살문 앞에 잠시 아이들을 멈춰 세웠다. 잡귀가 싫어하는 붉은 팥죽색으로 칠을 하고, 좌우 기둥 사이에는 여러 개의 창살을 세워 연결한 후 가운데에 태극 문양과 삼지창 모양의 홍살로 중앙을 단속하며 서 있는 홍살문. 그 모습에선 왕릉의 신문 안으로 아무나 함부로 출입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용맹스런 호위무사(?), 경호실장(?)의 결기가 느껴졌다.
그 곳을 들어서며 나는 아이들에게 '동쪽에 있는 아홉 개의 능'인 동구릉의 조성과 택지지정의 유래와 역대 왕릉의 분포에 대해 찬찬히 설명을 늘어놓았다.
동구릉의 대표(?) 수문장을 지나 걸어가는 왕릉 숲길은 사람의 마음을 역사의 시간 속으로 빨아들이는 묘한 흡인력이 있는 듯하다. 좌우로 높고 길게 늘어선 낙락장송과 전나무, 갈참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꼿꼿이 하늘을 향하여 그 충직한 도열을 하고 있다. 어떤 것은 노회한 늙은 내관처럼 허리를 낮추고 구부린 채 우리가 알현코자 하는 임금의 능침으로 안내하려는 듯 몸짓으로 길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추존 문조(제23대 순조의 맏아들)와 그의 비 신정왕후 조씨의 무덤인 '수릉'을 지나쳐 '현릉'에 당도했다. 세종의 장남으로 조선 제5대 임금을 지낸 단명한 왕 문종, 몸이 허약해 37세로 왕위에 올라 불과 2년 4개월 동안 재위하다 병사한 그의 무덤에는 평소 알지 못했던 역사적 풍수야사가 드리워져 있다.
하나의 능역(무덤의 영역) 안에 좌우로 각각 강(언덕)을 다르게 하여 두 개의 무덤이 조성된(동역이강릉) 현릉은 홍살문과 정자각 그리고 능원의 각도들이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도록 꺾어져 적통이 꺾인 문종 왕릉의 역사를 증거해 주고 있다. 아마도 문종의 아들인 어린 임금 단종을 제거하고 스스로 보위에 오른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장생발복'을 기원한다는 눈속임으로 자리매김된 억지스런 위장의 술수가 아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는 홍살문을 지나 아이들과 함께 꺾어진 참도를 걸어가며 정자각 뒤편 좌우 언덕(강)에 자리잡고 있는 두 개의 무덤을 가리켰다. 역사적 풍수야사를 제쳐두고서 바라보노라면 편안히 누워계신 어머니의 젖무덤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느냐고 아이들에게 물으니 녀석들은 남여를 가리지 않고 듣기 거북하다며 "밀짚모자, 그런 얘기는 하지 마세요!"하고 호들갑이다.
현릉을 나와서 우리는 조선왕조 능제의 기준이자 표준이 되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으로 향했다. 조선을 건국하고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천도한 이성계는 생전 자신과 후손들의 유택(죽어 묻힐 자리)을 물색하던 중 신하 '하륜'을 시켜 이 곳 검암산 자락 아래 지역을 능지로 정했다고 한다.
건원릉 입구에 당도해서 앞 쪽에 직선으로 펼쳐진 참도와 그 일직선 상에 세워진 정자각, 그리고 정자각 뒤편에 어마어마한 규모와 크기로 조성된 언덕(강)을 바라다보았다.
조선을 건국한 태상왕의 능이라서인지 멀찌감치 아래서 바라다 보이는 무덤의 언덕(강)은 그 위엄과 위용이 실로 대단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아이들이 모두들 와~! 하고 탄성을 지르며 놀라워하는 모습이다. 더욱이 높은 언덕(강) 위에 보이는 봉분의 능상에는 여지껏 어떤 왕릉에서도 볼 수 없었던 억새풀이 거칠지만 강하고 위엄 있게 덮여 있으니, 그 느낌은 참으로 강렬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죽기 전 유독 고향인 함흥을 그리워하니 그 아들 태종 이방원이 억새가 지천인 함흥 땅에서 옮겨다가 무덤 위에 덮어 드렸다고 하는 애틋한(?) 사연이 서려 있는 건원릉이다. 능을 보고 있노라니, 사람이 태어나고 또 돌아가는 생(生)과 사(死)의 시간 속에서 "인간에게 진실로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을 떠올리게 된다.
무장으로서 천하를 호령하고 주름잡으며, 조선을 건국했던 일국의 태상왕이었던 태조 이성계조차도 우주의 먼지로 돌아가는 자연 순환의 이치 앞에서 어찌 보면 하찮은 그 억새풀이 그다지도 그리웠단 말인가! 아니지, 마음속의 고향이 그리웠을 게지...
우리는 발걸음을 돌려 정조대왕(이산)의 할아버지인 영조와 그의 계비 정순왕후가 나란히 쌍릉으로 잠들어 있는 '원릉'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왕릉의 숲길에는 노랗고, 빨갛고, 붉게 물든 현란한 색채의 가을나무 패션쇼가 신비롭게 한창 펼쳐지고 있다.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뛰어가고, 어깨동무하며 그 아름다운 왕릉 숲의 축제에 아무런 구속과 제약 없이 자유를 소비하며 서서히 몰입하고 있다. 두 손 가득 나뭇잎을 주워들어 허공을 향해 뿌려도 보고, 낙엽 속에 눕고 뒹굴며 자신의 몸에 가을을 염색하고, 왕릉의 추억을 문신새김한다. 우리는 그렇게 왕릉의 숲에서 행복을 누리고, 자유로운 호흡을 발산했다.
나는 원릉에 도착해서 아이들을 정자각이 바로 보이는 곳의 장대석 위에 쪼르르 가지런히 앉혔다. 우선 요즘 TV 드라마나 역사책에서 열풍으로, 신드롬으로 등장하고 있는 정조대왕 '이산'에 대해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녀석들은 할 말이 무척 많은지 거침없이 조잘조잘 이야기를 쏟아낸다. 서로들 말하려고 아우성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살아 있다. 그들의 음성에 생기가 있어 맹랑하다.
나는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 임금이 자신의 정비와 별거하고 계비인 정순왕후와 나란히 잠들어 있는 '뭔가 이상해 보이는' 이 곳 이 무덤의 풍수야사에 대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이야기인즉슨, 영조는 83세를 누리며 51년 7개월이란 기간 동안 재위했던 조선왕조 최장수 재위 왕으로서 생전에 풍수에 지대한 관심이 많았기에 지금 '서오릉'의 홍릉 자리에 자신이 죽은 후 묻힐 자리를 택지해 두었다. 그러나 그의 정비인 정성왕후가 일찍 승하하자 먼저 홍릉에 안치하고 나중에 자신이 죽은 후 묻혀 누울 자리를 비워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 죽은 자가 산자의 행동을 막을 수 있는가?
정조는 영조가 승하한 후 왕위에 등극하자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인 할아버지 영조의 무덤을 동구릉 능역에다 조성해 버렸다고 한다. 이것은 정조의 왕심이 '아비추숭 할배폄하'로 드러난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는 점이리라. 그리하여 동구릉의 원릉에 영조는 안치되었으며, 이후 정조임금이 불분명한 사인(死因)으로 승하한 후 정순왕후는 왕위를 승계한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까지 하며 위세를 떨치다가 죽은 후, 영조의 옆자리에 묻히게 되었음을 아이들에게 말해 주었다.
내가 남편의 옆자리인 원비 정성왕후(조강지처) 자리를 계비인 정순왕후 자신이 차지하고 들어앉아 있는 형국으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라고 말하니 아이들은 먼저 들렀던 건원릉에서 잡상(어처구니)에 대해 설명을 들어서인지 모두들 하나같이 어처구니 없어하는 반응을 보였다.
아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끼리끼리 팔짱도 끼고 걸으며 우리는 영조의 원릉과 아쉬운 이별을 했다. 아이들의 기억 속에 그래도 영,정조 시대의 역사적 상황과 야사가 제법 흥미롭고 인상깊게 남았는지 몇몇 녀석들이 자기 뒤를 돌아보기도 하고, 미적미적 거리며 뚫어져라 언덕 위 무덤을 눈으로 끌어들여 가슴 속에 담는 모습이 보인다. 내겐 커다란 보람이요 참을 수 없는 답사여행의 희열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으로 우리는 조선왕조 최초의 삼연릉 양식의 무덤인 '경릉'을 향해 걸었다. 아이들과 함께 걸으며 나는 발걸음을 같이 하고 있는 그들에게 한마디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던져 보았다.
"바람이 쌀쌀한 가을날에 왕들의 무덤을 살피고 돌아보는 것이 무섭진 않니?"
"아니요, 전혀요! 오래 전 조선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느낌이에요!"
정말 우문으로 던져 본 한마디 물음에 상쾌한 답변으로 나를 기분좋게 하려는 듯 배려하여(?) 말해주는 한 꼬마 녀석의 슬기로움이 고마웠고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그들이 더 자라고 어른이 돼서 친구들과 함께한 가을날의 왕릉 숲 속 여행이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오래도록 떠올리며 사람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릉에 도착해서 언덕(강) 위 무덤 봉분을 보려하니 제법 경사진 지대라 무덤의 머리 끝 일부분만 대머리처럼 살짝 드러나 보일 뿐 그 형태를 가늠할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아래편 남서쪽 기슭 낮은 언덕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올라 무덤 셋이 나란히 자리 잡고 앉은 모습을 그나마 살펴볼 수 있었다.
경릉은 제24대 헌종과 그의 비 효현왕후 김씨 및 계비 효정왕후 홍씨가 나란히 누워 있는 무덤이다. 헌종이 승하하고 이어서 보위에 오른 일자무식 농사꾼 '강화도령' 철종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놀아난 백수 임금으로서 병권을 놓친 허수아비 임금에 불과했었다. 따라서 안동 김씨 세도가의 전횡으로 능역이 3단에서 2단으로 생략되었으며 원래 선조 왕릉이었던 '목릉'을 천장했던 파묘자리에 능지를 택한 풍수상 가장 큰 문제가 걸린 왕릉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난간석 안에 모든 능침이 들어 있는 양식으로서 헌종왕릉은 안동 김씨 김조근의 딸이 오른쪽에는 남편을, 왼쪽에는 남편의 첩까지 양편에 끼고 있는, 지엄한 조선 왕릉이 안동 김씨 여식의 무덤을 따라간 해괴한 사연을 안고 있는 왕릉인 것이다. 그것은 안동 김씨가 전주 이씨와 남양 홍씨를 세도정치의 들러리로 삼은 조선 말기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엄연한 현장이기도 하다.(*참조: 왕릉풍수와 조선의 역사-장영훈 저)
경릉을 마지막으로 동구릉 왕릉답사는 1막을 내리기로 하고 아이들과 함께 조선왕조 9명의 왕과 17명의 왕비 및 계비가 잠들어 있는 경기도 구리시 검암산 자락 품에 안긴 동구릉과 이별하기로 했다.
아무리 아이들이 생기와 에너지가 충천하더라도 59만평 넓은 동구릉 능역 주요 지역을 걸으며 답사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에는 분명한 듯하다. 나는 아이들과 왕릉의 숲을 살펴 돌아보며 그간 소모한 뱃속의 힘(뱃심)을 튼실히 채우기 위해 주변 음식점들을 수상한 간첩(?)의 눈초리로 두리번거렸다.
아이들과 보물찾기하듯 제법 그럴 듯해 보이는 식당을 찾은 뒤 우리는 뚝배기불고기와 버섯뚝배기 만두국, 냉면을 시켜 오붓하지만 왁자하게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조선 말기부터 대한제국 패망시기까지 보위에 있다가 가슴 아픈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고종과 명성황후, 순종과 그의 비들이 잠들어 있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릉 '홍,유릉'으로 향했다.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는 경복궁 뒤편 건천궁 곤녕합에서 일본 낭인의 칼에 시해되어 시신이 불태워졌다. 이후 고종은 지금의 청량리 부근 홍릉에 시신도 없는 무덤을 만들어 국장을 치렀다. 그런데 고종이 승하하자 조선총독부는 조선 왕조의 궁궐인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강등시키고 고종왕릉을 능이 아닌 원으로 격하하려는 의도를 노골화했다. 이에 조선의 인사들은 명성황후의 홍릉을 파궁하여 지금의 능역으로 천장하였고, 이후 고종을 합장하여 안치하니 '홍릉'이라는 능호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홍릉 홍살문 아래 잠시 서서 참도를 바라보고 일자각을 바라보며 깊고 애달픈 한숨을 나도 몰래 휴~하고 내뱉었다. 나는 그 시절 그 때의 치욕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을씨년스런' 한기가 감도는 고즈넉한 홍릉의 참도를 아이들과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걸었다.
걸어가는 참도의 좌우로 조선왕조의 전통 능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석물들이 매우 어색하고 정떨어지는 모습으로 기립하여 있으니 왠지 이국(중국)의 왕릉(관광지)에 잠시 구경삼아 들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영 찜찜했었다.
해괴한 모양의 기린, 사자, 낙타, 해태, 말 그리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외국인같은 형상의 문인석과 무인석의 도열은 이곳이 중국의 황제릉을 모방하여 조성한 조선왕조 최초의 황제릉 형식임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홍릉의 일자각 뒤편 장대석에 아이들을 편히 앉게 하고서 앞에 높이 보이는 무덤의 언덕(강)을 가리키며 조선 말기부터 대한제국시기 우리 민족이 겪었던 국치와 굴욕을 안고 누워계신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해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지막히 말해주었다. 아이들이 분노하기고 하고, 희한하다는 눈빛으로 두리번거리기도 하며,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해, 왕릉의 역사에 잠시라도 동화되는 듯했다.
홍릉을 걸어 나오며 능역 좌우 주변에 소나무 숲이 쓰러질 듯 산발한 상태(도시혈)로 불안하게 간신히 서 있는 풍경을 봤다. 역시 이 곳을 택지한 친일 지관들과 조선총독부의 교활한 '식민풍수'의 음모가 보이는 듯하니 입에서는 '육두문자'가 조용히 그러나 과격하게 쏟아져 나왔다.
홍릉의 옆으로 난 샛길을 따라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릉인 순종과 부인 순명황후, 계후 순정황후가 합장된 '유릉'으로 걸음을 옮겼다. 쓰라린 역사의 굴욕을 머금은 왕릉 숲에는 전나무 무리가 적당한 간격으로 한적하게 살고 있다. 오래 전 역사의 회한을 침묵으로 바닥에 펼쳐놓았는지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전나무 숲이 미동도 없이 조용했다. 그런데 청설모 한 마리가 느닷없는 오도방정으로 풀밭을 달음질하니 순간의 정적이 호호호~ 깔깔깔~ 웃음소리에 허물어져버렸다.
'유릉'앞 홍살문 입구에 서서 전체 능역을 조용히 관망하니 황제릉을 모방한 홍릉과 그 형식은 거의 같은 상태인데 참도 좌우편 석물들의 형상이 뭔가 다르게 보였다. 살펴보니 석물의 크기가 조금 커졌고, 석물의 모습이 세련되게 조각되어 홍릉의 석물보다는 그럭저럭 봐줄만한 수준으로 기립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확연히 보이는 것이 한 가지 있었으니, 홍살문부터 참도를 거쳐 일자각(침전) 뒤편 유릉의 봉분까지 일직선 상으로 배치되어야 할 무덤의 기본 형식이 빗겨서 있는 것이었다.
아뿔싸! 이것은 그야말로 조선왕조 오백년의 역사가 더 이상 발흥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조선총독부와 친일파 지관들의 음흉한 풍수상의 술수가 숨겨져 있는 국치왕릉의 모습이 아닌가! 오호~ 통제라! 오호 통제라!
아이들과 함께 홍유릉 왕릉의 숲 잔디밭에 모여 앉아 오늘의 왕릉답사 여행을 차분히 정리해 보기로 했다. 그저 임금이 죽으면 땅으로 묻히는 무덤일 뿐이었던, 사람이 죽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숭고하고 존엄한 장소에 불과했던 이 곳. 인간의 애증과 굴욕과 음모와 술수가 흔적으로 남아 역사를 증거하고 있으니 오늘 우리는 왕릉의 숲으로 들어가 조선왕조 시대부터 대한제국시기까지를 낙엽을 밟고, 가을바람 같은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다닌 역사여행을 한 셈이다.
휘이익~ 아~ 한줄기 바람을 풀어 낙엽을 날리며 조선의 왕들이 잘들 가라고 배웅을 하고 계신다.
덧붙이는 글 | 11월 10일 동구릉, 홍유릉 답사여행을 하고나서 쓴 글입니다.
<나만의 테마여행 응모글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