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주최 '제2회 전국 대학생 기자상 공모전' 응모기사입니다. 손기영 시민기자는 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4학년에 재학중입니다. [편집자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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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회관이야, 박정희 기념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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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기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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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어린 시절 앨범을 펼쳐봤다. 디지털 사진에 익숙해진 내게, 옛날사진들은 호기심으로 다가왔다.
앨범 몇 장이 넘어가자 초등학교 때 찍은 사진이 나타났다. 서울 능동 '어린이회관' 한편에서 멋지게 포즈를 취하고 찍은 사진이었다. 반듯하게 자른 '바가지 머리'를 보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선생님, 의사, 과학자, 군인, 경찰…. 지금도 꼬마들에게 물어보면 하나쯤 나올법한 장래희망 들 중, 내 꿈은 '과학자'였다. 학교 수업시간에 배우는 내용으로는 호기심이 채워지지 않아, 주말이면 엄마와 함께 집 근처 능동 어린이회관에 자주 갔다. 어린이회관은 당시 서울에서 유일 무일한 '어린이 과학관'이었다.
어린이회관 정문을 들어서면 조그만 야외전시장이 있었다. 거기에는 아폴로 우주선이 있었다. 물론 가짜였다. 호기심이 많았던 그 때, 내 키 몇 배나 되는 커다란 우주선 모형을 나는 '괴물'이라고 불렀다. 우주선이란 것을 모르진 않았지만, 너무 커서 붙인 별칭이었다. 아폴로 우주선은 내가 어린이회관을 찾는 첫 번째 이유였다.
당시 과학관에는 과학의 원리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여러 전시실이 있었다. 입구에 들어가면 바로 마주치는 '진자모형'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또 자동차 분해모형, 가정자동화 전시, 노래하는 로봇 앵무새 앞에서 내 눈은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어린시절 내 꿈은 '과학자'... 어린이회관은 호기심 천국시간을 흘러 벌써 난 대학졸업을 앞둔 청년이 되었다. 키도 어린 시절 '괴물'이라고 불렀던 아폴로 우주선 꼭대기와 가까워졌다. 장래희망도 바뀌어 기자를 꿈꾸고 있다. 낙엽에 떨어지는 늦가을…. 풋풋했던 추억을 다시 밟아보고 싶었다. 지금도 내가 좋아하던 '괴물'은 아직도 그곳을 지키고 있을까.
지난 16일 오전 능동 어린이회관을 찾았다. 중학교 2학년이던 1995년 이후로 이곳에 온 건 처음이다. 정문 너머로 보이는 과학관 건물(전시실)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정문을 지나자 어린 시절 내가 좋아하던 아폴로 우주선 모형은 없었다. '울컥….'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잠시 마음을 달래고 발걸음을 과학관(전시실)으로 향했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의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과학관 로비에 있던 커다란 '진자모형'도 볼 수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씨의 대형 영정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앞에는 조그만 모금함이 있었다.
육영수씨가 능동 어린이회관을 만든 육영재단(현재 이사장은 박근령 씨)의 초대 이사장이었고 그의 뜻을 기리자는 취지는 이해하겠으나 어린이들을 설레게 했던 과학모형이 있던 자리에 죽은 이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는 점은 조금 섬뜩했다.
또 그 옆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임기간 동안 외국 국빈들을 영접할 때 사용했던 검정색 고급 리무진이 전시되어 있었고 경부고속도로 개통, 구로공단 건설 등 재임기간 그의 업적을 기리는 홍보 동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과학관 건물 안에 들어오자마자 어린이들은 과학에 대한 호기심 대신 '정치홍보물'과 마주치게 되어 있었다.
다시 찾은 어린이회관... 과학 전시물 대신 박정희 유품들로 '가득'2층 전시관으로 오르는 통로 벽에는 박 전 대통령과 육영수씨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줄줄이 걸려있었다. 군부대를 방문해 신형화기를 시험해보고 외국정상들과 만찬을 하는 박 전 대통령의 모습, 새마을 운동을 하는 농민들을 격려하는 육영수씨의 모습 등…. 어린이 과학관의 전시내용과는 전혀 관련없는 사진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옆 장식장에는 육영수씨가 생전에 모았던 장식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과학관 2층에 올라가자 이곳 사정도 아래층과 마찬가지였다. 이 곳에서는 육영수씨가 지방을 방문할 때 즐겨 타던 이탈리아제 피아트 승용차가 관람객들을 맞이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의 유품 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박 전 대통령 리무진은 왁스를 잘 발라 광택이 났고, 차체 표면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주변에는 사람들의 손길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트도 쳐져 있었다. 육영수씨의 유품들은 고급 장식장 안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이곳을 운영하는 육영재단 측에서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는 듯했다.
어린이들이 찾는 전시실 사정은 어떨까. 현재 능동 어린이회관은 총 3개의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자동차의 구조와 발전 원리를 주제로 한 응용과학관(1층), 미래의 첨단기술을 소개하는 전자과학관(2층) 그리고 부분적인 수리를 해서 그나마 사정이 나은 기초과학관이다.
하지만 기초과학관은 평일에는 들어갈 수 없고, 4000원(성인은 5000원)의 관람료를 별도로 내야 한다.
먼저 1층 응용과학관을 가보았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내가 초등학교 때 자주 찾았던 전시실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자동차의 원리를 설명하는 각종 전시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향장치, 제동장치, 현가장치…. 그 종류도 여러가지 였다. 하지만 전시물들은 초등학교 때 봤던 그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94년 초에 출시된 현대자동차 엑센트 절개모형은 아직도 첨단 자동차 기술을 소개하는 전시물로 자리하고 있었다. 또 어린이들이 발전원리를 직접 체험하게 만든 전시물들 중에 고장난 것이 많았다. 전동기, 전자석의 원리를 설명하는 전시물은 버튼을 계속 눌렀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2층 전자과학관의 사정은 더 말이 아니었다. 디지털시대에 사는 요즘 어린이들에게 이미 '구형'이 되어버린 기술을 소개하고 있었다. PDP, LCD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른 지금, 브라운관 TV를 겹쳐 만든 '멀티비전'이 전자과학관의 '첨단기술'이었다. 또 공장 자동화 시스템 전시물에는 옛날 386컴퓨터가 그 원리를 설명하고 있었다.
과학관 전시물 '고장' 혹은 '구식'... 사람들 발길 끊겨말끔하게 관리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 유품들과는 다르게, 미래의 과학자를 꿈꾸는 어린이들이 찾는 과학관의 전시물들은 고장난 것이 많았고, 제대로 작동되는 것도 '구식'이 대부분이었다.
반나절동안 어린이회관 과학관을 둘러보았다. 조용했던 과학관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을 알리는 홍보영상 소리가 실내를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흥미없는 전시물 때문인지 관람객들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초등학교 때 과학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가던 공간이 '박정희·육영수 기념관'으로 변해가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또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심정은 묘한 여운을 남겼다.
아폴로 우주선은 어디론가 떠나가 버리고, 어린이회관 한편에는 '박정희 리무진'이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커다란 몸집에 반짝반짝 윤이 나고 먼지하나 없었지만, 어린 시절 내가 좋아했던 '괴물', 아폴로 우주선처럼 가슴 뛰게 하는 영웅은 아니었다.
어린이회관이 그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10여 년 전 나처럼 엄마 손을 잡고 '괴물'을 사냥하러 오는 꼬마 과학자들의 요람, '호기심 천국'의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