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좋아하는 친구가 갑자기 묻는다. "야, 해운대 12경이 어디 어디냐 ?"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해운대 살아도 해운대의 12경을 갑자기 물으니 더듬거린다. 해운대 하면 오륙도인데 오륙도는 해운대에 소재하지 않고 부산 남구 용호동에서 담당한다. 해운대의 '월출'은 너무나 유명한데 '달맞이 길'과 광안리 대교도 해운대의 12경에 속한다.
우물쭈물하다가 "해운대 요트 경기장이 멋지다. 거기가 해운대 12경이야" 라고 대답하니 친구는 "아니, 해운대 요트 경기장이 어떻게 해운대 12경이야? 미포가 진짜 해운대 바다 아니니?"하고 질책한다.
물새들은 날개를 접고 걷지도 않고 모래사장에 가만히 앉아 있다. 새우깡을 던지면 물새들은 하나같이 날개를 펴고 낮게 선회하다 다시 모래사장에 앉는다. 날개 연습에 지친 것일까. 그도 아니면 사람들이 던져주는 '새우깡' 맛에 길들여져서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일을 잊은 것인가. 넓은 바다에 갈매기와 물새들은 보이지 않고, 바닷가를 떠나지 않는 물새들의 발자국이 화살표처럼 쿡쿡 찍혀 있다.
흰 파도들은 달려와서 물새 발자국을 지우고 달아난다. 바다에 오면 인간의 시간이란 덧이 없고, 오직 파도의 움직임이 바다의 시간을 알려준다. 시간은 과거로 흘러가지만, 바다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언제나 함께 공존한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 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 김남조 '겨울바다'
해운대 하면 대개는 토종 동백꽃이 붉게 피는 동백섬을 떠올리거나 동백섬 하면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을 흥얼거리게 된다. 동백섬 쪽의 바다는 낭만과 서정의 파도소리가 좋다. 그러나 생생한 현장 미포는 동백섬과 오륙도가 환히 보이는 생활의 바다, 작은 어촌이 존재하고 있다.
해마다 포구의 크기가 작아지고 어촌의 풍경은 점점 화려한 네온 간판을 거는 회센터의 분위기로 바뀌지만, 손바닥만 하게 남아 있는 이 포구에 오면 여자라도 배 한 척을 빌려 타고 바다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된다. 마침 어구를 손질하는 선주가 있어 몇 마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통발어선 선장이자 선주라는 선장님은 태어나서 줄곧 해운대에서만 살았다고, 자신이 진짜 해운대 주민이라고 강조한다. 해운대의 신시가지 아파트 주민들은 대개 해운대 원주민들이 아니다. 해운대의 원주민인 이 선장님은 곧 출항을 하기 때문에 바쁘고 한가할 때 다시 찾아오면 해운대의 역사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며 명함까지 건넸다.
이야기하는 내내 어구를 손질하던 선장님은 요즘 뱃일하는 사람을 구하기 힘들어서 부부가 함께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한단다. 배 한번 얻어 탈 수 없느냐고 하니, 이 선장님은 절대 여자들은 배에 안 태우신다고 하신다. 그래서 "부인도 안 태우세요 ?" 하고 물으니 "나는 내 마누라도 안 태운다"고 한다.
그 말이 약간 귀에 거슬리지만, 예로부터 고깃배에 여자를 태우면 부정했다고 하니 이해할 수는 있다. 배들 대부분 발이 묶여 있고 압류 딱지 붙은 배도 있고, 요즘은 워낙 땅의 경제가 안 좋듯 바다도 경제가 많이 안 좋다고 덧붙이신다.
선장님이 직접 잡은 생선을 주로 넘기는, 방파제에 있는 '횟집'은 푸짐했다. 아나고 회를 주문했는데 대합과 소라 멍게 등이 서비스로 나왔다. 회를 먹고 나와 뉘엿뉘엿 저무는 노을의 겨울 바다를 보더니 친구는 환호성을 외친다.
해운대 바다보다 더 좋은 겨울 바다는 없다고 몇 번씩이나 되풀이한다. 사실 해운대 바다는 화려하고 해안도로가 복잡한 편이지만, 미포의 바다는 해운대 호텔이 많은 쪽의 바다보다 한가하고 조용하다.
미포에서 동백섬을 바라보니 점점 노을로 물든 저녁 하늘과 바다가 장관이다. 가을이 물러가고 겨울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초입의 겨울바다… 소녀 취향적 낭만의 해운대 바다와 너무나 생활적인 미포 바다가 공존하는 해운대.
하얀 모래사장은 둘이 걸어도 좋지만 혼자 걸어도 좋다. 물새가 뒤를 따라와서 발자국을 수없이 만드는 혼자일수록 많은 것을 생각하고 얻어갈 수 있는 겨울바다. 바다는 계절이 없는 듯하지만 봄 바다 여름 바다 가을 바다 그 중 겨울 바다는 가장 바다다운 바다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얀 파도가 쉴 새 없이 부서지고 또 부서지고 수평선은 어느 여인의 아이라인처럼 점점 선명해 가는데, 백사장은 점점 좁아지고 있어서 안타까운 마음이다. 백사장이 점점 좁아지는 이유는 광안대교 건설 때문이라는 소리도 있다.
부산은 해안선을 따라 도시가 형성되어 있고, 육지의 도로는 뱃길로 이어져서 세계의 길로 이어진다. 미포는 작은 어항. 예전에는 다양한 고깃배들도 많았지만 지금은 통발어선들이 주로 출입항한다.
그 옛 포구의 모습은 간 곳이 없지만, 영원재귀처럼 밀려오는 하얀 파도소리는 여전하다. 해운대에 살면서 실은 해운대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고, 일상의 분주함으로 일 년에 한번 해운대 바닷가를 찾기도 어렵다.
지척에 있으나 먼 타지방의 해수욕장처럼 느껴지는, 이 세계적인 명소의 해수욕장을 두고 이 고장 사람들은 타지역의 해수욕장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여름이면 발을 딛기 어려운 해운대 해수욕장. 여행이란 사는 곳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떠나는 낯선 경험이 중요하지만, 자신이 사는 고장의 명소를 자주 찾아 전에 느끼지 못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확인하고 것도 의의가 있지 않을까.
해운대 바다는 낭만과 생활이 공존하는 바다다. 해운대에 미포가 있어서 그 낭만은 더욱 아름다운 천 년의 서정으로 존재한다. 여기 와서는 낭만과 꿈과 현실이 톱니바퀴처럼 잘 물려 커다란 '바다의 바퀴'를 굴리는 신의 소리를 듣게 된다. 아름다운 자연은 정말 누구에게나 귀한 신의 선물이다.
덧붙이는 글 | 테마가 있는 나만의 여행 응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