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의 내남 없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임종진의 북녘사진전 '사람사는 거이 다 똑같디요'가 일반 시민과 국회 관계자의 따뜻한 관심 속에 성황리에 치러졌다. 지난 11월 13일부터 15일까지, 늦가을 운치가 융단처럼 깔린 낙엽 길을 따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을 찾은 관람객들은 92점의 작품을 한 장 한 장 찬찬히 둘러보는 등 북녘 동포들의 사는 모습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마침 전시장 천정에서는 탐스러운 노란 햇살이 쏟아져 사진 안과 밖 사람들의 해후를 축복했다. 뿔 달린 인민군 없고 사람만 보이네...
“저 햇살처럼 사진이 따뜻하네요. 여기 전신된 사진들과 똑같은 소재를 갖고 충분히 어둡게 찍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인민장교의 사진이 인상 깊습니다. 인민장교가 눈을 매섭게 떴다면 아마 학교 다닐 때 배운 ‘괴뢰군’이 됐을 텐데요. 신기하게도 가슴에 주렁주렁 달린 붉은 뱃지는 안 보이고 사람 좋은 웃음만 보이네요.” 여의도가 직장인 회사원 최종호(39)씨는 신문에서 사진전 관련 소식을 듣고 점심시간을 이용해 들렀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해마다 반공포스터를 열심히 그리며 자라난 세대로서 그때만 해도 이런 북녘사진전이 열리는 건 상상도 못했을 일인데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일부러 먼 길 찾아온 세 명의 사십대 주부도 눈에 띄었다. 라디오에 출연한 사진작가의 얘기를 듣고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는 말에 마음이 끌려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그들은 “한 동포라서 그런지 표정이 친숙하다” “하나 같이 웃는 모습이 참 맑고 예쁘다” “그냥 사람 살아가는 평범한 모습인데 뭉클한 감동을 준다”고 각각 소감을 밝힌 뒤 “국회에 들어오는 절차가 복잡하긴 했지만 와서 보길 잘했다”며 활짝 웃었다. 중고생을 대상으로 논술을 가르치는 김은숙(47)씨는 “마지막 사진까지 다 보고나니 눈물이 찔끔 나더라”며 “때로는 한 장의 사진이 두꺼운 책보다 많은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것 같다. 다름과 소통의 메시지를 보았다. 기회가 되면 아이들에게도 꼭 보여 주고 싶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동료 교사 손효신(45)씨는 “헬레나 노리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의 사진들이 생각난다. 그 책에 나오는 히말라야의 오지 라다크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지만 아무도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북한 사람들의 검박한 모습과 때 묻지 않은 표정에서도 비슷한 사람 냄새를 느낀다”고 평했다.
추억의 앨범 넘기듯... 옛 생각 물씬
전시장을 찾은 최고 연장자는 팔순을 넘긴 어느 할머니였다. 묻기도 전에, 아들 넷이 전부 유명대학을 나왔고 ‘사’자 들어가거나 대기업에 근무한다는 얘기로 당신의 한 평생 헌신적 삶을 증명해낸 그는 “한글이 시원찮은데도 사진 아래 글씨를 다 읽었다”며 온 얼굴을 다 접어 웃었다. “저기 할매 사진 옷이 옛날에 내가 다 입던 거야. 개구쟁이 남자애들 보니 우리 애들 키울 때가 생각나네. 사는 거 다 똑같지 뭐. 옛날 생각나니 너무 좋네.”
이불 속에 폭 싸인 고물고물 신생아부터 밭고랑처럼 주름진 어르신 모습까지. 인간의 생장과정을 촘촘히 묘사한 전시 작품은 보는 이들의 진한 향수를 자극하는 듯 보였다. 대학생 애들을 둔 아빠라고 밝힌 한 중년남성은 신혼부부 사진이 가장 좋았다며 다시 새신랑이 된 듯 함박웃음을 띤 채 말문을 열었다. “사진을 잘 보세요. 두 사람이 무척 수줍어하거든요. 어떻게 보면 둘이 안 어울리는 거 같기도 하고 천생연분 같기도 하죠. 어쨌든 어색한 그 모습이 풋풋해서 좋은 거야. 나 결혼할 때도 중매결혼이 많아서 딱 저랬거든요….”
20대 "요즘 보기 드문 얼굴이다" 디카로 찰칵 친구의 권유로 전시장을 찾은 약사 정민아(38)씨는 다소 아쉬움을 드러냈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는 화두가 좀 늦은 감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한 5년 전에 전시를 열었으면 더 효과가 컸을 것 같네요. 하지만 대한민국 정치의 심장부에서 이런 사진전이 열린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죠. 다음에는 일반인들의 접근이 쉬운 곳에서 내가 뽑은 최고의 사진, 북녘동포에게 말 걸기 등 이벤트를 곁들여 사진전을 연다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 전시가 30대 후반 이후의 연령대에게 ‘따뜻한 문화적 충격’으로 받아들여진 반면 20대의 반응은 ‘그냥 평범하고 약간 재밌다’는 반응이었다. 국회에서 근무중인 의경들은 교대시간을 이용해 간간히 전시장을 들렀다 가곤 했는데 이상효(22)씨를 비롯해 대부분이 “별 다를 게 없다”며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행사 진행 차 국회에 들렀다는 정지혜(20)씨와 김도희(20)씨는 디카를 들고 작품마다 자리를 옮겨가며 열심히 포즈를 취했다. 그들은 마치 인기 연예인 사진이라도 되는 양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작품을 훑었다. “요즘 볼 수 없는 얼굴이니까 재밌잖아요. 되게 가난해서 불행하고 또 체제적이라 자유롭지 못할 거 같았는데 생각보다 표정이 밝네요. 특히 저 꼬마아이 앙증맞은 표정 너무 귀여워요. 첨엔 좀 애어른 같아서 약간 어색했는데 작가님이 써놓은 글 보니, 북한과 우리의 정서적인 차이네요.”
이재정 통일부 장관 "더 많은 시민들 보면 좋을 것" 11월 13일, 사진전이 열린 첫날에는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다녀갔다. 그는 “이런 사진은 세종문화회관에서 많은 국민들이 보면 좋을 것”이라는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이인영 의원은 전시회 오프닝 행사에 참가해 축사를 남겼다. 김태년, 정봉주, 이계안, 배기선, 강성종 등 십여 명의 국회의원도 전시장을 찾았다. 지난5월에 북한을 다녀왔다는 강성종 의원은 사진마다 찬찬한 관심을 드러내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갔다.
“여기는 대동강이네요. 이건 만경대에서 찍었군요. 우리는 사는 곳만 다르지 여기 이 사진처럼 낯빛과 언어 모두 똑같습니다. 빨간 도포를 입은 스님 사진과 한반도 모형의 사진이 가장 맘에 듭니다. 저 노승은 우리 민족이 한반도를 새처럼 자유롭게 넘나드는 평화로운 그 날이 오길 염원하고 있겠지요.”
국회 직원들의 발길도 꾸준히 이어졌다. 김종해씨는 “어느 게 진짜인가요”라고 탄식하듯 화두를 던지며 작품들 사이로 진중한 발걸음을 옮겼다. 30여 분 사진을 둘러본 뒤 그간 북한 사람들의 한 면만 보아왔는데 또 다른 모습을 ‘정지된’ 사진으로 곱씹어 볼 수 있어 좋았다며 감회에 젖었다. “문득 ‘인간은 선하고 제도는 악하다’는 루소의 말이 떠오르네요.”
"외신기자가 찍은 사진 같다" 국회입법조사처 정환규(50)씨는 “외신기자가 찍은 사진인 줄 알았다”며 운을 뗐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람은 이념적 선입견을 갖고 사람보다는 체제나 구조에 초점을 맞추기 쉬운데, 여기 전시된 사진들은 시각이 투명하고 감정의 결이 살아 있어요. 오롯이 사람을 보여주네요. 꼭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전시입니다.” 고경화 의원실 이동준 보좌관은 “사진도 좋지만 글이 더 좋더라”며 “사진작가님이 글을 써도 되겠다”고 말했다. 박계동 의원실 이문영 비서관은 “아이들 사진이 너무 해맑고 인상적이다”며 눈길을 떼지 못했다.
전시 마지막 날, 울긋불긋 화려한 차림의 여성 15여 명이 전시장에 출몰해 시선을 끌었다. 각각의 작품 앞에서 삼삼오오 사진을 찍고 전시장 복판에서 꽃무리 지어 기념촬영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진을 감상한 그들은 새민커뮤니케이션즈 소속의 북한 예술단원이다. 대표 이정환씨는 <오마이뉴스> 기사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전시장을 찾아왔다며 작품의 면면을 세심히 둘러봤다. 지나는 길에 들렀다는 역술인 김창만씨는 “관상과 풍수지리의 관점에서 사진을 보니 북한이 곧 잘살 게 될 것 같다”는 덕담을 건네 주위에 잔잔한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
11월 15일 오후 8시 국회 의원회관 특별전시장, 햇살 충만하던 그곳에 어둠이 차오르고 전시는 막을 내렸다. 삼일 내도록 살뜰한 눈길을 던지던 북녘사진 속 주인공들은 노곤한 몸을 뉘였다. 사진이 다 떼어지고 다시 태초의 허로 돌아간 그 침묵의 공간에는, 그러나 여전히 따뜻한 광파가 흘렀다. 그간 다녀간 이들이 남긴 소곤거림이 할머니의 옛이야기처럼 아련히 들려온다. “정말이네… 사람 사는 거 똑같네… 제목 한 번 잘 정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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