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5일, 대한민국 고3 학생들의 숙원인 '대입수학능력시험'이 있었다. 이 날 결과를 토대로 많은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해 오랫동안 꿈꿔온 대학 생활을 시작할 것이다.
매년 2월말에서 3월초에 각 대학 입학식이 몰려있다. 많은 새내기들이 '자유인' 대학생으로 거듭나는 날이다.
하지만 이미 대학생으로서 생활이 5개월째인 새내기들도 있다. 수시 입학으로 정시 입학생보다 일찍 대학을 확정지은 이른바 '수시생'들이다.
수시제도 이전 세대들과 언론은, 아직도 대학입시라고 하면 '수능 수능' 하지만 수능으로 대학 가는 학생은 전체 대학 선발인원의 절반 정도다. 지난해 대입 시험을 예로 들자면 전국 200개 대학에서 37만7463명을 모집했는데 이 중 19만4000명을 수시로 선발해 정시보다 1만1000여명 더 많은 인원을 선발했다.
물론 이 중에는 수능 성적이 포함되는 2-2수시생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거의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수능과 상관없이 대입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수시 1학기 발표는 9~10월경, 2학기 발표는 10월 중순경에 난다(2-2제외). 그럼 그 순간부터 대학 입학이 확정된 이 예비 대학생들은 어디서 뭘 하고 지낼까.
한 교실 두 마음, 두 교실 두 마음?이미 수시합격을 통해 대입을 확정지은 수시생들은 (수능이 포함되는 2-2수시를 또 응시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은 학교 수업에서 거의 '열외인원'이다. 한 대학교
의 수시합격생 모임 커뮤니티를 통해 설문한 결과 수시생들의 고등학교 생활은 크게 세
부류로 나타났다.
정시생들과 같이 교실에서 수업에 임한 경우, 교실에 같이 있기는 하나 수업에서는 열외 되어 자율학습을 한 경우, 그리고 따로 격리된 교실에 모여 자율학습을 한 경우이다. 이 중 정시생들과 같이 교실에서 수업에 임한 경우도 수능이 가까워 오는 시기에 대부분의 수업이 자율학습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임을 볼 때는 두 번째의 유형과 같은 경우이다. 이외에 토익학원 수강, 체험학습 등을 신청하고 등교하지 않는 경우도 일부 있었다.
같은 '고3'이지만 그들은 결코 '같은' 고3은 아닌 셈이다. 지난해 '수시생'으로 고3시절을 보냈던 07학번 새내기와, 올해 10월 수시모집에 합격하고 '수시생'이 된 예비 08학번 새내기들에게 '수시생, 그들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수시생' 시절 뭘 하고 보냈고, 뭘 하고 보내고 있나요?07년도 수시입학생 "고등학교에서는 그야말로 열외인원이었죠. 언제 졸업하나, 그냥 그것만 보고 시간을 보낸 것 같아요. 남들 다 한다는 토익공부, 한자공부를 한다고 학원도 등록하고, 책도 많이 샀지만 그 들뜬 시기에 공부를 제대로 하기는 힘들었어요. 정말 많은 걸 할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그 때 뭘 했나'고 생각해보면 오직 같은 학교 수시에 합격한 친구들을 사귄 기억 밖에는 없는 것 같아요. 보통 주위 친구들은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08년도 수시합격생 "지금은 그저 꿈만 같아요. 대학생이 되자고 그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정말 대학생이 된 거잖아요. 갑자기 이렇게 정말 되고 싶었던 게 이루어 지고 나니까 뭘 해야 할지 그냥 막막해서 아르바이트부터 구하고 있어요. 곧 토익·한자 공부도 해야겠죠."
- 우리의 고등학교 & 대학교에 수시생을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일까요?07년도 수시입학생 "올해 같은 경우 많은 학교에서 수시1학기가 폐지되어서 다행이지만 2학기보다 두 달 가까이 더 빠른 1학기에 합격한 경우에는 그 때부터 정말 고등학교든 대학교든 어느 쪽으로도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요. 아직 고등학생이니까 고등학교를 등교한다고 해도 가서 그냥 시간만 보내다 올 뿐이고, 아직 대학생인 건 아니니까 대학에 가도 당연히 할 건 없고, 미리 과목을 이수하는 예비학교가 시행되긴 했지만 수강자도 적었고 모두 별로 중요성을 느끼지 못 했어요.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수시합격생이 참여할 수 있는 좀 더 효율적인 프로그램이 마련되었으면 좋겠어요. 대학 예비학교도 좀 더 많은 과목이 개설되면 그에 대한 관심도도 높아지지 않을까요?"
08년도 수시합격생 "합격하고 대학이 정해지고 나니 뭔가 하긴 해야하는데 아직 뭘 해
야 할지 모르겠어요. 물론 이제 대학생이니까 스스로 길을 찾아가야겠지만 제가 찾아갈 길 조차 충분히 만들어져 있는 것 같지 않아요. 특히 내가 합격한 학교의 경우는 올해부터 예비학교도 폐지되었는데 그에 대한 대체 프로그램도 마련되있지 않아서 결국은 뻔한 아르바이트나 토익학원 수강 정도 밖에는 할 게 없는 사정이예요. 힘든 입시시기를 지나고 났으니까 좀 쉬는 것도 좋지만 고등학교든 대학교든 수시 합격생들이 뭔가 참여하고 배울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으면 좋겠어요."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친구 사귀기
그들을 위한 것이 아무것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이 시기, '수시생'들이 찾아가는 곳은 같은
사정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수시생 커뮤니티'다.
수시입학 제도를 운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학교에서 그 해 신입생 또는 그 전 해 수시입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인터넷 커뮤니티를 만든다. 그리고는 같이 모여 미리 진학하게 될 학교의 선배들과 친분을 쌓고 친구들을 만든다.
매해 이맘 때면 수시 1학기 합격생과 2학기 합격생이 몰려들어 많은 수시 관련 커뮤니티들은 바삐 돌아간다.
서울 한 대학교 08학년도 '수시생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는 이주호(20)군은 수시 커뮤니티 운영에 대한 노하우부터 이야기했다.
"가입자 수가 많아야 그 학교 커뮤니티에서 가장 확실한 커뮤니티로 인정받고 사람이 몰리기 시작해요. 충분히 모이고 나면 각 학과별로 신입생 후배들을 챙겨줄 선배들을 섭외하고 정기모임에 참석할 후배들을 파악하고 선배와 후배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한 많은 것들을 준비하죠."왜 이런 일들을 하냐구요? 말 그대로 오갈데 없는 수시생이거든요. 어디에도 수시생에게 필요한 제도는 마련되어 있지 않아요. 지난해 저도 그랬고 올해 예비 입학생들도 할 수 있는 일은, '같은 상황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 밖에는 없어요. 예비 학교라는 시스템도 그다지 제대로 운영되지 않을 뿐더러 우리의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 해요. 엄청난 공부량에 시달려온 아이들에게 바로 똑같은 공부를 시작하자고 손을 내밀어도 아무도 그 손을 잡을리 없죠. 흥미를 끌 수 있는 예체능 계통의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우리의 학교들, 그들에게 무엇을 줄 건가요?대부분의 고등학교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안이 없다. 대학입학이라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고등학교에서는 이미 대학입학을 이룬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 이들을 안고 또 다른 목표를 향해 같이 달려가야 할 대학교들에서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
서울대학교에서는 올해 전체 모집정원(3162명)의 55.7%에 해당하는 1761명을 수시모집으로 선발할 예정이며, 모집단위에 따라 영어(TEPS) 또는 수학 과목에 대한 특별시험을 실시해 성적이 일정 수준 미만인 경우 입학 전 특별강좌를 실시하고 있다. 그 밖에도 예비 신입생에 대한 행사들을 단과대별로 준비, 시행하고 있다.
연세대학교는 2008학년도 수시1, 2학기 모집에서 총 입학정원(3400명)의 약 60% 정도를 선발예정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수시 합격생들을 대상으로 입학전 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지만 올해의 경우 (시행가능성이 높기는 하나) 아직 세부 내용 및 시행여부가 완전히 확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한양대학교는 올해 전체 모집정원의 50%를 수시모집을 통해 선발하며 수시 선발생들을 대상으로 '미리 가 본 대학'이라는 예비대학강좌 수강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부터 수시 1학기 모집이 사라진 고려대 서강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중앙대 등의 대학은 운영 중이던 예비대학을 폐지하거나 대체 프로그램 마련을 준비 중이다.
입시지옥, 대한민국에선 아직도 대학입시가 곧 교육의 '끝'으로만 자리 잡고 있나 보다. 대학을 보내는 것이 끝이 아니고, 대학에 선발해 놓는 게 끝이 아니다. 그 시점에서 그들은 다시 또 새로운 시작을 해야하는 처지다.
전체 대학 입학 정원의 절반인 '수시생'. 그들은 지금도 고등학교와 대학교 사이의 빈 공간에서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