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입대를 10일 앞두고 우울함에 묻힌 녀석, 여자한테 차이고 우울함에 빠진 녀석 그리고 이들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나. 이 세 사람이 떠난 무계획 여행기. 고등학교 수업 때 배운 일본어와 책 한 권만 믿고 떠난 일본으로의 여행. 요코하마에 가다.
7월 3일 아침 도쿄의 숙소에서 몸을 일으킨 나와 친구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밖에선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가지고 나가기도 안 가지고 나가기도 어정쩡한 상황. 여행 내내 우리를 반겨주는 비를 보며 그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요코하마는 우리 숙소에서 거의 반대편에 위치한 도시이기 때문에 10시쯤 부지런히 움직여서 JR에 올라탔다.
요코하마는 도쿄 도심에서 JR을 타고 30여분을 가면 나오는 항구도시이다. JR을 타고 갈 수 있다고는 하지만 도쿄 도심의 종일권인 토구나이패스를 사용해서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니 따로 표를 사서 JR에 탑승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나와 친구들은 토구나이패스를 들고 요코하마로 향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해버렸다. 결국엔 몇 개의 역을 되돌아가 다시 표를 끊어서 요코하마로 가야만 했다.
물론 이날 사용하기 위해 발급받은 토구나이패스는 돈 낭비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770엔이라는 돈을 고스란히 날려버린 셈이다.
도쿄 시내를 빠져나와 요코하마를 향하는 JR 안에서 바라본 바깥풍경은 안개로 가득했고, 가랑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요코하마 JR역에 내릴 때쯤 안개와 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7월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 쬈다. 결국 들고 나온 3단 우산은 한순간에 짐으로 변해버렸다.
JR역을 나와서 가장 먼저 시선을 빼앗는 건물은 일본 제일의 높이를 자랑하는 랜드 마크타워. 70층 296m에 이르는 그 압도적인 높이에 위를 쳐다보니 목이 아플 정도였다. 들리는 소문에 랜드 마크타워 안에는 맛있는 음식점이 있다고 해서 찾아봤지만 결국 찾지 못 하고 편의점에서 도시락으로 대신 했다. 일본인에게 말 한 마디 걸 수 없는 무능하고 가난한 여행자들의 모습이랄까?
랜드 마크타워 옆의 메모리얼 파크에 정박해 있는 니혼마루는 최장거리 항해라는 기네스 기록을 가지고 있는 배이다. 2차 대전 당시에 군함으로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조용히 정박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지구를 몇 바퀴나 돌 정도로 먼 거리를 항해했다니 쉬는 게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친구가 배 안에 들어가 보자고 했지만 입장료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왜? 우린 돈이 없으니까.
요코하마는 일본의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만큼 수많은 외국인들이 드나들던 항구이다. 그런 이유로 일본이지만 이국적인 건물과 조형물들이 들어서 있다. 메모리얼 파크에서 10여분을 걸어가면 볼 수 있는 아카렝가 창고의 모습 역시 벽돌로 지어진 튼튼한 서양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탁 트여 있는 바다 옆에 자리를 잡고 있는 아카렝가 창고는 요코하마항 개항 당시에 창고로 사용되던 곳이다. 현재는 내부의 리모델링을 통해 기념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카렝가 창고는 붉은 빛 조명을 발하는 밤에 바라보면 훨씬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마린타워를 향해 가다가 잠깐 들렀던 아카렝가 창고에선 기념품들의 사진을 찍다가 일본인 직원이 다가와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바람에 머쓱해져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버렸다. 사실 직원이 무섭다기보다는 일본어가 무서웠다. 샤싱(사진)이라든가 몇 개 단어는 들렸지만….
아카렝가 창고에서 10여분을 걸어가면 물의 수호신이 있는 야마시타 공원이 나오고 마린타워도 볼 수 있다. 마린타워는 요코하마항 건설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61년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 자리를 잡고 있던 요코하마항의 등대를 개조해서 만든 것이다. 사실 며칠 전 도쿄타워를 보고 나서 마린타워를 보니 별다른 느낌이 오지 않았다. 마린타워에게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마린타워를 뒤로 하고 야마시타 공원에서 언덕으로 올라가니 예전 외국인이 거주지역이 나왔다. 이곳은 마치 유럽에 온 느낌을 받게 된다. 아기자기하게 지어진 건물들은 서양의 건물들처럼 예쁘게 벽돌로 지어져 있고 몇몇 건물은 나무로 지어져 있다. 그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은 요코하마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탈리아산 정원이었다.
이탈리아산 정원은 외교관이 거주하며 지내던 곳으로 현재는 관광객들에게 무료로 개방되어 있다. 이탈리아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내 친구가 일본에 와서도 이탈리아산 정원을 꼭 봐야겠다고 객기를 부리는 바람에 고생을 했지만 보고 나서 후회는 없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근데 일본에 와서 이탈리아인이 살았던 집을 보면 뭐가 좋을까? 친구 녀석의 생각에 대해 난 고민했지만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이 외국인 거주 지역 아래로 인천에도 있는 차이나타운이 요코하마에도 자리잡고 있다. 중국식으로 장식되어 있는 많은 건물들과 붉은 빛 조명을 발하는 건물들을 보면서 여기가 일본인지 중국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이곳에선 맛있는 만두와 중국 전통음식을 판다. 마음 같아선 중국 전통음식을 먹어보고 싶었지만 가난한 여행객인 관계로 라멘과 만두로 배를 채우고 다시 길을 나섰다.
차이나타운에서 나와 요코하마 스타디움으로 향했다. 요코하마 스타디움은 요코하마 마리노스의 홈구장이다. 야구 경기가 있었다면 관람이라도 했겠지만 경기가 없던 관계로 창살사이로 보이는 푸르른 잔디만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15분여를 걸어 랜드 마크타워로 돌아오게 되면 요코하마의 유명관광지를 한번 훑어본 게 된다.
랜드마크타워와 니혼마루가 보이는 메모리얼 파크에 도착한 우리는 해가 저물기를 기다렸다. 여름이라 그런지 7시가 되어서도 해가 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버티고 기다렸다. 그리고 30여분의 기다림 끝에 요코하마의 자랑인 아름다운 야경을 내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요코하마에 온 이유라고도 할 수 있는 니혼마루의 야경을 손에 넣은 나는 미소를 지었다. 요코하마를 돌아다니느라 힘든 몸을 이끌고 다시 JR에 올라타 숙소로 돌아오는 와중에도 난 카메라의 LCD를 확인하며 혼자 히죽거렸다.
도쿄와 그 일대 여행에 6일을 소모했다. 6일이라는 짧은 날들이었지만 지금 와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을 생각해 본다면 아마 그곳은 요코하마일 것이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시부야의 밤거리와 하라주쿠도 좋았지만 요코하마라는 도시에서 느낀 바닷바람과 색다른 시선은 도쿄에서의 5일보다 더욱 기억에 남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도쿄를 돌아보기도 바쁜데 언제 요코하마에 가겠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시는 도시마다의 매력이 있다. 도쿄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 요코하마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이국적인 매력이 있는 요코하마 한 번 가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