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이와 함께 열두살 꼬마 여행자가 아프리카로 날아왔다. 유럽에 이어 두 번째로 우리 부부의 세계여행에 끼어든 것이다.
꼬마 여행자의 이름은 전대한, 내 조카다. 그는 "너 커서 뭐가 되고 싶어?"하고 물으면 초등학교 2·3학년 때부터 이상하게도 "시인"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것도 "음유시인".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누가 무엇이 영향을 끼쳤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 아이의 엄마·아빠나 선생님, 혹은 주변사람들이 "시인은 배고픈 거란다. 의사나 변호사가 되어야지!"라고 답하는 대신 "넌 멋진 꿈을 가졌구나!" "고 놈 참 기특하네!"라고 격려해줬다는 것이다. 그래서 녀석은 언제나 누가 물어보면 자랑스럽게 자신의 꿈은 시인이라고 말하곤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다시 만났을 때 꼬마 여행자는 더 이상 꼬마가 아니었다.
'꼬마 여행자'의 일기장엔 무엇이 쓰여있을까?
조카는 나와는 한 뼘도 채 차이나지 않을 만큼 키가 커져있었고 얼굴에는 온통 여드름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녀석은 불과 1년 6개월 전의 유럽여행 때처럼 다리 아프다고 보채지도 않았다. 7㎏정도의 배낭을 메고도 자신만만, 날개를 달은 듯이 촐랑거렸다.
오히려 우리 부부를 성가시게 하는 건 40대의 나이에 접어든 누이였다. 누이가 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음식투정을 부릴 때도, 이런 지저분한 방에서 어떻게 잠자느냐며 기겁을 할 때도 그 아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나와 함께 케이크를 찾아, 적당한 가격에 깨끗한 숙소를 구하느라 발이 부르트게 온 도시를 헤매 다니면서도 그는 마냥 여행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또 그는 세상 보는 눈도 제법 깊어져 있었다.
요하네스버그에서의 일이다. 남아공은 케이프타운의 다운타운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여행자를 주눅들게 만든다. 가이드북은 물론이고 앞선 여행자와 현지 인포메이션센터까지도 섬뜩한 경고를 내리곤 했다.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싸울 때 풀려나간 총기들이 채 수거되지 않았으며, 백인들로부터 자유를 쟁취했지만 먹고사는 문제까진 해결하지 못한 때문이라 했다. 그 중에서도 요하네스버그가 가장 위험한 도시였다.
아니나다를까, 도착한 날 터미널을 순회하던 경찰관이 "혹시라도 배낭을 메고 터미널 밖을 나갈 생각이라면 그건 자살행위임을 기억하라"는 놀라운 충고를 던져주고 갔다. 그날 열두 살 꼬마 여행자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 곳의 DOWN TOWN은 무척 위험하다고 한다. 경찰들의 말에 의하면, 큰 배낭 같은 짐을 들고 터미널 밖으로 나가면 ‘끽’이란다. 무섭다. 그래도 용기를 내야겠지?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것도 참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도시가 삭막하다. 사람들의 표정도 여행자와 백인들, 그리고 아기들이 아니면 모두 어둡다. 너무 조용하다. 그리고 도시에 리듬이 없다고 해야 할까? 한 박자가 빠진 도시 같다. 남아공의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라는데 북적대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나는 그게 좋은데…….' (2005년 12월 28일 수요일 날씨 맑다가 비오다 그침)이 녀석, 키는 커지고 눈은 깊어졌다
한 가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꼬마 여행자는 여드름 말고도 달라진 점이 또 하나 있었다.
남아공 더반에서 만난 인도-아프리칸 친구 '아도'가 꿈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라이터(writer, 작가)'라고 대답한 것이다. 범위가 넓어졌다고 해야 할까, 이제 현실성을 찾아간다고 해야 할까.
물론 달라지지 않은 점도 있다. 늘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거다. 그야 한창 클 때니까 그렇다 치고. 단 하나 나를 괴롭게(?) 만드는 것은 시도 때도 없이 질문하고 수다를 떠는 거다.
한 번은 잠비아에서 탄자니아까지의 타사라 기차를 기다리며 대합실에 배낭을 깔고 앉아 있을 때였다. 그날도 그는 참새처럼 쫑알대는데, 가만 생각하니 2박3일 기차여행 동안 내 귀의 평화가 걱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시침 때고 한 마디 했었다.
"대한! 작가가 되려면 말이지. 책을 읽고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심하게 관찰하고 느끼는 것도 필요하거든! 우리, 엄마와 숙모가 돌아올 때까지만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앉아서 대합실 풍경에 빠져보는 건 어떨까?" 그날 밤, 꼬마여행자는 일기에 또 이렇게 적었다.
'ZAMBIA에서 TANZANIA까지 가려면 굉장히 멀다. 그래서 기차를 타러 역에 갔다.(NEW KAPIRI MPOSI) 1600㎞를 달리는 대장정이기 때문에 먹을 것을 사야했다. 엄마&숙모가 먹을 것을 사러 갔을 때, 삼촌이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해 보라고 했다.
웃고 떠들며 미소짓는 사람, 힘들어 보이는 사람, 화내는 사람, 조는 사람 등등. 그래도 힘들고 지친 사람들이 가장 많다. 너무 세상과 일, 그리고 가난에 찌든 것 같다. 같은 사람인데, 사는 것이 너무 차이가 많이 난다. 이들이 조금 더 잘 살기를 빌 뿐이다.'(2006년 1월 6일 금요일 날씨 맑음, 날씨는 좋은데 삼촌이(감기) 괜찮을지 걱정)
깡촌행 버스에서 '달리는 천연 머드팩'아내와 난 며칠에 한 번씩 그의 일기를 훔쳐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하지만 그것을 뺀다면 사실 둘이 여행할 때보다 힘든 시간들이었다. 우리들은 대한의 겨울방학 두 달에 맞추어 아프리카 최남단 케이프타운에서 최북단 카이로까지 당도해야 하는 강행군의 임무를 맡고 있는 셈이었다.
아무래도 가급적 위험한 곳은 피하게 되고, 시간이 부족하다보니 구석구석을 돌아볼 수도 없고, 잔지바르 섬 같이 마음에 쏙 드는 곳에서도 더 오래 머물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킬리만자로 등반은 차치하고라도 산 아래에서 하룻밤도 보내지 못한 것이 내내 가슴에 남았다.
이래저래 피곤이 쌓여가던 어느 날, 우리들은 탄자니아 아루샤에서 사파리를 마치고 신양가로 가는 새벽버스를 탔다. 신양가는 관광객이 특별히 갈 일 없는 이른바 '관광루트’' 벗어난 곳이었다.
버스 안에는 서너 개의 백열전구가 흔들리고, 천정에 붙여놓은 때묻은 카펫이 너덜거렸으며, 며칠치 식량이나 될까 싶은 허연 식빵들이 선반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버스 바닥은 여기저기에 난 구멍을 널빤지로 막아놓았지만 채 가려지지 못한 구멍사이로 먼지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버스가 내달리자 새어든 먼지로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것도 잠시. 종아리에서 질퍽한 느낌이 와 닿았다. 버스가 진흙길을 달리자 구멍 사이로 진흙덩어리들이 튀겨져 들어왔던 것이다.
"풋, 오토매틱 천연머드팩이구만!"그런데 버스는 1시간 간격으로 멈춰 섰다. 우습게도 타이어를 조이기 위함이다. 더 기가 막힌 건 다른 어떤 공구도 없이 헝겊과 노끈으로만 처방한다는 것이다. 차가 굴러가는 것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결국 버스는 고갯마루를 넘다 완전히 퍼져버렸다.
아프리카의 별은 땅에도 뜬다승객들은 모두 걸어서 산 아래의 '기림바'라는 깡촌 마을로 내려갔다. 이미 밤은 깊어있었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은 암흑이었다.
생전 처음일지도 모르는 동양인의 등장에 동네 아이들이 새까맣게 모여들었다. 정말 새까맣게! 우린 그 때 비로소 알았다. 아프리카의 별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피부가 새까만 아이들이 달빛을 받아 눈만 반짝반짝하는데,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아무래도 오늘밤은 힘들겠다며 모두가 버스에서 잠자기 위해 산을 향해 걸어가는데, 멀리서 불빛 하나가 '빵빵' 경적을 울리면서 달려온다. "브라보!!"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러고도 몇 차례를 더 멈춰섰던 버스는 예정시간 12시간에 2를 곱해서 꼬박 하루, 24시간이 걸려서야 신양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아침햇살을 받으며 터미널 마당 한 편의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젊은 흑인친구가 다가와서 인사했다.
"저는 다니엘이라고 해요. 마마 리가 기다리고 있어요!"
그가 '마마 리'라 부르는 사람은 이보연 선교사님이다. 그는 10년 동안 아프리카 오지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계셨는데, 큰처형을 통해 알게 되어 방문하고 싶다는 연락을 드렸더니 생면부지의 사람을 반갑게 맞아준 것이다.
"선교사님,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죠? 차가 고장이…."
"안 그래도 어제 저녁에 도착하신다는 메일을 받고 웃었어요. 여기는 말만 그렇지 항상 24시간 꼬박 걸리거든요!"
선교사님이 운전하는 지프를 타고 다시 비포장 길을 달렸다. 황량한 아프리카 풍경이 이어졌다. 메마른 황토벌판, 무너질 것 같은 흙집, 벌거벗고 맨발로 뛰어다니는 아이들. 30분 만에 콜란도토의 선교사님 집에 도착했다.
"말라리아? 가끔 걸려요, 이젠 괜찮아요"
"배고프죠? 금방 된장찌개 끓여줄게요!"
이 오지에서 그 귀한 된장을! 숨겨둔 폼이 아껴 드시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도 듬뿍 퍼 넣으신다. 그날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지내는 동안 대한이가 먹고 싶다고만 하면 냉면에 카레라이스에 미역국에, 선교사님 살림을 다 거덜 낼 판이었다. 구수한 된장찌개에 피곤이 녹아내릴 즈음 내가 물어보았다.
"선교사님, 말라리아 약은 어떻게 하시나요? 일주일에 한번 먹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던 데요!"
"전, 안 먹어요."
"그럼, 여긴 괜찮은 지역인가요?"
"아니, 가끔 걸려요."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고 우리들은 깜짝 놀랐다.
"말라리아가… 죽기도 하는 병인데요?"
"여기 있으면 안 걸릴 수가 없어요. 증상을 아니까 아차 싶으면 곧바로 치료를 받으러 가죠. 예전에야 힘들었지만 지금은 마을에 병원도 생겨서 괜찮아요."우린 할 말을 잃어버렸다. 우리에게는 아프리카 여행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인데, 그녀는 말라리아가 마치 원하진 않더라도 동행해야 하는 친구나 되는 양 얘기하고 있었다.
그리곤 그녀는 생활수칙을 하나 당부했다.
읍내인 이 곳은 하루 한두 번 수돗물이 나오지만 주변 대부분의 지역은 물이 아예 없다고 했다. 그래서 '물 두 바가지로만 설거지 할 것' '세숫물을 버리지 말고 모아서 변기물로 사용할 것' 등 물 사용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식사 때마다 "하나님 이 땅에 비를 내려주세요"라고 기도하곤 했는데, 가뭄이 심해서 올 한 해를 버텨나갈 곡식들이 다 말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물에 대한 간절함은 우리들을 자주 숙연하게 만들곤 했다.
젓갈 반찬 하나로 밥 한 그릇... 흙 씹혀도 맛있네
그 주 일요일, 지프를 타고 20분쯤 달려 나타난 깡촌마을에 있는 교회에 갔다가 근처 현지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울타리가 없는 마당 양쪽에 두 채의 흙집이 있었는데, 헛간처럼 생긴 부엌과 잠자는 공간이었다. 잠자는 방이라고 해야 흙바닥에 포대자루를 깔아놓은 것이 전부였다.
여주인이 손님이 왔다고 장작을 피워 급히 음식을 내어왔다. '우갈리(귀리와 조를 찧어 쪄낸 밥)'와 '다가(멸치 사촌?) 젓갈'이었는데, 우갈리를 손가락으로 주물럭거려 덩어리를 만든 후에 다가젓갈에 찍어 먹는 것이다. 선교사님이 시범을 보여주며 살짝 귀띔을 하신다.
"우리 보기엔 초라한 밥상이지만 여기 사람들은 이것마저 못 먹는 사람들이 더 많으니까, 맛있게 먹어주세요."
이미 꼬질꼬질한 그릇에 질려버린 누이는 먹는 시늉만 하고 있는데, 우리의 꼬마 여행자는 기특하게도 씩씩하게 먹는다. 그럼, 아내와 난? 가끔 흙이 씹히는 것만 빼면 제법 맛있어 한 그릇을 싹 비워내고도 입맛을 다셔야 했다.
그날 선교사님이 대한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았다. 열두 살 꼬마 여행자는 그날의 대화를 이렇게 일기에 남겼다.
'선교사님이 내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내가 작가라고 대답했더니 선교사님이 말하기를, "이 곳에 아이들은 꿈이 없어요. 시골이라 이룰 수 있는 꿈도 없고, 아이들이 가지지 않는 거죠."라는 말을 하셨다. 그렇게 치면 난 정말 행복하다. 지금도 내 꿈을 이루려 노력하고 있으니까!' (2006년 1월 20일 금요일 날씨 더움)'꿈이 없는 아이들, 꿈이란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하더라도 이룰 수도 없는 거라고 여기는 아이들…. 낮에 빈 양동이를 들고 황토벌판을 걸어가던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 그 소녀는 어디까지 걸어가서야 물을 길을 수 있었을까.
그날 저녁, 대한은 결심 하나를 털어놓았다. "나, 한국에 가면 '기아체험'에 참여해 볼래!"
배고픔을 인생의 가장 큰 고통으로 여기는 대한에겐 대단한 결심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당장은 뭐라 설명할 순 없겠지만, 이번 아프리카여행이 그의 가슴에 또 무언가를 남기리라.
3시간 거리... 여긴 꿈도 있고 물도 있구나
5일 만에 콜란도토를 떠났다. 케냐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빅토리아 호수변의 도시 무완자에 들렀는데, 남한을 풍덩 빠뜨리고도 남을 거라는 호수에서 여인들이 흥겹게 생선을 씻고 있었다. 콜란도토에서 3시간을 달려왔을 뿐인데도 황토벌판에서 빈 양동이를 들고 하염없이 걷던 소녀의 메마름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오후에 호스텔 근처의 힌두사원에 들렀다가 10살 안팎의 꼬마 숙녀들을 만났다. 부모가 인도 펀자브 출신의 시크교도인 그 아이들은 깔끔한 옷차림에 뽀얗고 예쁜 얼굴이었다. 한 아이는 의사를 꿈꾸고 또 다른 아이는 천문학자가 될 거라며 당당하게 말했다.
한 꼬마숙녀가 대한에게 꽃을 선물했고, 두 아이는 주소․이메일․전화번호 등을 교환하고 아쉬운 듯이 이별을 했다. 대한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아프리카에서 생긴 친구가 신기하고 좋은 모양이었다. 그리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삼촌, 재들은 콜란도토의 고통을 알까? 겨우 3시간 거린데…."
그날, 나는 비로소 미련을 떨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온 한 아이가 아프리카 아이들의 ‘생각할 수도 이룰 수도 없다고 여기는 꿈’을 기억해 준다면, 두고 온 킬리만자로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양학용 & 김향미 부부는 결혼 10년째이던 해에 길을 떠나 2년 8개월 동안(2003년 10월 16일~2006년 6월 4일) 아시아·유럽·북미·중남미·아프리카·중동·러시아 등 세계 47개국을 여행했다.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wetravel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