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뭐라고?"
"세종대왕자태실…. 성주에 있는…."
"그런데 태실이 뭐야?"
"옛날 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태’를 따로 보관했다고 하네."
"아, 그럼 세종대왕 태가 있는 데야?"
"아니, 세종대왕이 아니고, 세종대왕의 아들, 그러니까 왕자들의 태가 있는 데래."
"아아~!"지난봄 우리 부부가 경북 성주군 월항면 '세종대왕자태실'에 가려고 계획을 세울 때 나눴던 얘기예요. 사실 그때만 해도 '태실'이 뭔지 잘 몰랐거든요. 또 낱말을 다닥다닥 붙여서 '세종대왕자태실'이라고 하니 세종대왕의 태가 묻힌 곳인 줄 알았어요. 차라리 '세종대왕 왕자태실'이라고 했더라면 더욱 좋았을걸….
지난봄에 성주에는 어떤 문화재가 있는지 알아보려고 찾던 가운데 미리 맛보기로 이곳에 다녀왔었습니다. 그런데 컴퓨터 하드가 망가지는 바람에 그때 찍었던 사진과 함께 그 많던 사진 자료를 몽땅 날리고 말았어요. 글을 쓸 때 썼던 한두 장을 빼고는 말이지요. 이참에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고 사진도 새로 찍자는 생각에 지난 일요일(25일)에 다시 다녀왔어요.
사촌동생 탯줄을 곱게 싸서 따로 두시던 할머니
세종대왕의 아들들 |
제5대 임금이 되는 문종, 제7대 임금이 되는 세조 그리고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이렇게 8명입니다.
그리고 첩의 자식으로는 화의군,계양군,의창군,밀성군,익현군,녕해군,담양군,한남군,수춘군,영풍군 이렇게 10명, 모두 18명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자태실에는 이 열여덟 왕자들의 태실과 세종대왕의 왕손인 단종의 태실까지 모두 19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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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혹시 태어날 때 자기 탯줄을 따로 보관해둔 걸 본 적이 있나요? 난 어렸을 때, 사촌동생이 태어난 며칠 뒤에 아기 배꼽에서 떨어져 나온 탯줄을 한지에 곱게 싸고 명주실로 꼼꼼히 묶은 뒤에 안방 벽, 가장 높은 곳(고모님 집에서는 사진틀이 걸린 못에 걸어두었어요)에 걸어둔 걸 봤어요.
어린 마음에 그게 궁금해서 할머니한테 물었더니, 아기 탯줄은 이렇게 잘 싸서 모셔놓아야 한다고 했어요. 그 뒤로도 아주 오랫동안 고모님 집에 드나들 때마다 사진틀에 걸려있는 탯줄을 봤지요.
요즘 사람도 이렇게 아기 탯줄을 소중하게 다루어 모셔(?)두는지 모르겠어요. 지난날에는 여염집에서도 이렇게 집안에 아기가 태어나면 '태'를 소중하게 여겼는데, 하물며 왕의 자식들이야 오죽 귀하게 모셨을까 싶어요.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가 묻힌 곳구미에서 시원하게 뻗은 찻길을 뒤로하고, 약목면 무림리 산길로 올라가서 꼬불꼬불 재미난 길을 따라 칠곡군과 성주군이 나뉘는 월항면에 들어섰어요. 지난주만 해도 맞바람이 불고 영하 5도나 되는 궂은 날씨 때문에 몹시 힘들었는데, 오늘은 포근하고 맑아서 자전거 나들이를 하기에 딱 좋은 날씨라서 무척 기분이 좋았어요.
지난봄, 태실 들머리에 한창 댐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큰 덤프트럭 여러 대가 연방 흙을 퍼 나르고 있었어요. 세종대왕의 왕자 태실은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서진산 기슭 태봉 꼭대기에 있어요.
때마침 '2007 경북 방문의 해'를 맞아 경북에는 요즘 관광지마다 손님들이 많이 찾아와요. 우리가 갔을 때에는 벌써 부산에서 왔다는 산악회 모임 식구들이 한 삼십 명쯤 와 있더군요. 안내하는 곳에도 지난번과는 달리, 안내원 아주머니가 자리를 지키기도 했지요.
이 태실은 세종 20년~24년(1438년쯤) 사이에 만들어졌는데, 수양대군(세조)을 비롯하여 세종대왕의 열일곱 왕자와 왕손인 단종의 태까지 모두 19기를 모셔두었어요. 넓고 평평한 터에 우리가 절집에서 자주 보았던 '부도' 같기도 하고, 큰 돌 항아리 같기도 한 태실이 따로따로 있는데 저마다 그 앞에는 누구의 태실인지를 알리는 빗돌이 있어요.
퍽 아쉬웠던 건 빗돌은 모두 한문으로 씌어 있어서 그 앞에 한글로 된 안내 글이라도 따로 있으면 좋으련만 솔직히 어떤 게 누구의 태실인지 통 알 수 없었어요.
만든 때로부터 560해 남짓 되는 세월이 흘렀으니 켜켜이 이끼가 쌓이고 시커먼 게 아주 오래되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어요. 태실 들머리에 있는 안내판에다가 이 태실을 만든 방법과 지난날 역사를 적어두었는데, 그것으로나마 세종대왕 왕자태실을 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었어요.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왕자가 태어나면 태를 깨끗이 씻은 뒤에, 백자 항아리에 잘 보관했다고 해요. 그리고 이 항아리를 묻을 좋은 터와 날짜를 따로 잡아서 '안태식'이라고 하는 의식을 크게 치렀다고 합니다. 이같이 왕자들의 태를 소중하게 다루는 데는, 우리 조상들의 슬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사람이 나고 자라고 귀하게 여김을 받으며, 앞으로 큰 사람이 되는 것은 바로 이 '태'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나 봐요. 그래서 '태'를 더욱 정성껏 보관했다고 하네요. 또 왕자가 나중에 국왕에 오르면 태실을 덧입혀서 가봉을 했다고 해요.
조선왕조 하늘 같은 권력이 태실까지 파헤치다지금 있는 태실 19기 가운데 14기는 옛날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요. 그러나 몇몇은 다른 태실과 모양이 매우 달랐어요. 가장 위에 있는 항아리 모양은 오간 데 없고, 땅 위에 올라앉은 연꽃받침 모양으로 된 기단석만 있을 뿐이었는데, 그 까닭을 알아보니 참 놀라웠어요.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수양대군(세조)이 조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빼앗았지요. 그때 반대하던 이들이 여럿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바로 수양대군의 동생들인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 계유정란 때 죽은 안평대군까지 이 다섯 왕자들의 태와 빗돌(장태비)를 모두 파헤쳐서 산 아래로 던져버렸대요. 이걸 1975년에 다시 찾아내어 이곳에 함께 앉혀 놓았다고 하네요.
이런 슬픈 역사 때문에 지금은 이들 다섯 왕자의 태와 빗돌은 없거나 깨진 채로 다른 태와 같이 모셔져 있어요. 퍽 안타까웠어요.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세우려는 욕심으로 자기 핏줄한테까지 모진 짓도 서슴지 않는구나 싶어 매우 씁쓸했답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하나 또 있어요. 세조의 태실 앞에는 다른 빗돌과 달리 아주 큰 빗돌이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틀림없이 있어야 할 글자(비문)가 하나도 안 보였어요. 그 까닭도 따로 있더군요.
조카를 밀어내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 자기를 반대하던 이들의 태까지 파헤쳐 버린 죄가 벌을 받았을까? 세조가 왕이 되었을 때, 예조판서 홍윤성이 세조의 태실 앞에 '세조대왕 가봉비문'을 써서 빗돌을 세웠어요.
그런데 뒷날 세조가 저지른 잘못을 미워한 백성들이 이 빗돌에다가 오물을 붓고, 돌로 찧고 갈아서 망가뜨렸다고 해요. 빗돌에 아무 글자도 알아볼 수 없었던 게 바로 이런 까닭이었어요. 아마 이래서 복수는 몹쓸 고리가 되어서 돌고 도는 건 가 봅니다.
세종대왕 왕자태실을 받드는 절집 '선석사'이 세종대왕 왕자태실 가까이에는 ‘선석사’라고 하는 절집이 있어요. 신라 때 의상대사가 지었다고 하는데, 처음엔 지금 자리 잡은 곳보다 서쪽에 있었대요. 절 이름도 ‘신광사’라고 했는데, 나중에(고려 말쯤)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우면서 터를 닦을 때 커다란 바위가 나왔대요. 그래서 이름을 ‘선석사’로 고쳤다고 하네요.
지금도 대웅전 앞뜰에는 그때 나왔던 바위가 삐죽이 나와 있어요. 또 이 절은 세종대왕 왕자태실을 수호하는 절집이기도 한데, 영조임금이 손수 써서 내려준 글(어필)도 있다고 합니다.
태실을 둘러보면서 꼭 풍수지리나 미신 같은 걸 들먹이지 않더라도 왕실에서 '태'를 소중하게 여기고 다뤘던 모습과 함께 보잘 것 없지만 지난날 할머니가 '애지중지' 귀하게 여기셨던 탯줄을 견줘보면서, 엄마 뱃속에서 목숨줄을 잇고 있던 탯줄에서부터 소중한 대접을 받으며 태어난 몸이니, 스스로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답니다. 아울러 권력을 세우고,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온갖 나쁜 짓도 서슴지 않는구나 싶어 퍽 씁쓸하기도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