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생일 케이크와 설탕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설탕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 매우 강력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설탕은 백 년도 채 못 사는 무탄트(돌연변이라는 뜻으로 문명인을 지칭함)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인위적이고 피상적이며 가식적이고 달콤한 것을 추구하는 데 바치는가를 말해주는 단적인 예였다. 그 결과 평생을 사는 동안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의 영원한 본질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데 실제로 쓰는 시간은 너무도 적다는 것이다." - 말로 모건, <무탄트 메시지> 중에서 심양시 서탑가를 둘러본 우리는 철령시로 향했다. 철령시는 심양에서 100km가량 떨어진 곳으로 그다지 많이 알려진 도시는 아니다. 김철인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아마 평생동안 중국 철령시를 방문하는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처음 인천항을 바라보는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어요.” 할아버지에게 늘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란 김 선생님이 한국을 처음 방문한 것은 2002년. 연수생 자격으로 안산시에 소재한 작은 공장에서 일을 배우기 위해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하지만 벅찬 가슴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김 선생님은 프레스작업을 하다 오른쪽 팔이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우리 상담소와는 그렇게 해서 인연이 시작되었고 산업재해절차와 민사소송을 진행하면서 김 선생님은 상담소의 핵심 식구가 되었다. 1996년부터 많은 이주노동자와 재중동포들을 만나 왔지만, 아직도 그 원인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유독 재중동포 노동자분들이 끔찍한 재해를 많이 당하신다는 사실이다. 프레스에 손목 혹은 팔뚝부터 완전히 잘린 분들도 많고, 컨베이어 벨트에 머리가 말려들어가는 도중 죽기 살기로 발버둥쳐서 머리가 완전히 벗겨져 버리는 끔찍한 사고를 당한 여성 노동자분도 계셨다. 건설현장에서 추락사하시는 경우는 허다하다. 우리 상담소에서 진행했던 사고 가운데 가장 끔찍한 사고 중 하나는 재중동포 노동자분이 압착기에 말려들어가서 즉사하신 사건이었다. 김 선생님은 팔 한쪽을 잃는 큰 사고를 당하긴 했지만, 그나마 산업재해와 각종 보상절차가 잘 해결된 몇 안 되는 다행스런 분 중 한 분이다. 은혜를 갚는다는 마음으로 우리 상담소에서 각종 통역과 관공서 동행 등으로 몇 해를 같이 지내다 두 해 전 고향으로 귀국하셨다. 김 선생님은 비교적 좋은 아파트에 살고 계셨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해가 중천에 뜬 한낮이었는데, 온 가족이 모여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의 전자부품 회사에서 야간근무를 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은 후에 귀국한 이모도 와계셨다. 한국에 있는 동안 너무 커버린 딸이 처음에는 아빠를 몰라봤지만 이제는 아빠에게 버릇없이 굴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한국행을 준비하는 김 선생님의 부인과 어머님이 우리를 마중나왔다.
오랜만에 우리를 반겨준 것은 신발을 벗고 편하게 앉을 수 있는 한국식 아파트였다. 김 선생님은 다행히 한국에서 받은 보상금으로 귀국 후에 아파트를 하나 장만할 수 있었다. 대도시가 아니라서 아파트 값은 그리 비싸지가 않았다. 3천에서 4천여만원 정도면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다고 한다. 김 선생님도 3천여만 원을 조금 더 들여서 이 아파트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여장을 풀고 맨바닥에 주저앉았다. 2주 넘게 진행된 여행에서 쌓인 피로와 긴장감이 갑자기 풀리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일행들이 김 선생님과 그동안 밀렸던 이야기들을 나누는 사이 부엌에서는 된장국 냄새가 흘러나왔다. 중국 땅 변방도시에서 맡게 되는 우리 민족의 음식. 이것은 정말이지 고마움을 넘어서 감동이었다. 그리고 이내 그것은 한국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었다.
중국 구석구석에 이렇게 우리 형제분들이 살고 계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색깔을 가진 채 타 국가에서 타민족들과 어울려 이렇게 잘 살아주고 계시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어쩌면 우리 민족에겐 우리가 채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가 무진장 잠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국정부는 이들을 체포해서 추방하기에 바쁘고, 일부 한국시민들은 이들에게 ‘조선족’이나 ‘연변사람’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우며 정신적 추방을 그치지 않고 있다. 야속한 마음이 이국에서 맡는 된장국 냄새를 타고 내 가슴을 짓눌렀다. 김 선생님이 한쪽 팔을 잃어버린 것으로 인한 상처는 거의 다 회복된 듯했다. 오른팔을 잃어버린 채 귀국한 김 선생님을 보고는 어머님과 부인이 한 달간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족들은 서서히 현실을 인정하게 되었고, 김 선생님이 더 큰 사고를 당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 돈을 번다며 가고 나서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온갖 재해를 입어서 중상을 입거나 심지어는 숨지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각종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우울증으로 고생하거나 자살을 하는 경우도 종종 들려오는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 비하면 김 선생님은 그 고통에 견줄 수는 없겠지만, 보상금으로 새집도 마련할 수 있었고, 남들보다 조금 일찍 귀국을 할 수 있었다. 식구들은 한국으로 떠난 많은 재중동포 친지와 지인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점차 자신들의 상황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한국식 집의 아늑함과 된장국을 비롯한 정겨운 한국 음식을 남겨둔 채 쉬이 철령을 떠나기 어려워 우리는 하룻밤을 김 선생님 댁에서 묵기로 했다. 작은 도시라 구경할 거리가 아무 것도 없다며 한사코 산책을 주저하던 김 선생님을 끝내 설득하여 우리는 철령 시내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시내를 천천히 유랑하는 동안, 김선생님은 계속해서 한국 이야기를 하였다. “중국 도시 참 더럽고 지저분하죠? 여기 철령은 시골 같은 도시라 더 해요. 냄새도 많이 나고요. 한국 정말 좋잖아요. 빌딩도 높고 얼마나 깨끗한지. 여기 사람들 아직 멀었어요. 한국 따라가려면.” 한국에 있으면 중국인이 되어버리고, 중국에 있으면 한국인이 되어버리는 것 같은 조금은 혼란스럽고 복잡한 재중동포분들의 심경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난 중국인이냐 한국인이냐에 그다지 관심이 없으니. 한국에서 받은 보상금으로 귀국해서 더 예쁜 새 부인을 얻었다거나, 공장을 짓고 사장님이 되어 한국식 12시간 중노동을 도입해서 현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위치에 섰거나 하는 극단적인 사례를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된다. 가난한 삶과 나누는 삶을 통해서 우리는 얼마든지 윤택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전달하기에는, 이들에게 비춰진 한국의 화려함과 풍요로움이 너무나 강렬한 듯하다. 그리하여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이야기하는 나 또한 그들에겐 ‘나’이기 이전에 한국인일 뿐이다. 답답한 마음에 나는 일행에서 조금 떨어진 채 도시를 거닐었다. 김 선생님 댁에서 도로 하나를 가로질러, 철령시의 타워팰리스라는 부유층 아파트가 막 완공되고 있었다. 다만 내가 조금 여유로운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부유한 아파트 담벼락을 타고 펼쳐진 철령시의 재래식 시장과 장을 보러 거리로 나온 북적거리는 인파들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이런 풍경이 이어질지도 모른다.
도시는 어디나 늘 빠르게 변하기만을 바라왔다. 그리고 변방의 도시는 그다지 행복으로만 가득 찬 것 같지만은 않은 '좀 더 화려한' 도시들을 닮기 위해 오늘도 애쓰고 있다. 그 사이 사이에 틈새란 없다. 그것은 도시가 생각하는 행복을 빼앗아가는 방해꾼으로 여겨질 뿐. 그곳엔 조금 다른 삶의 형태가 추구되어지고 있을 거란 기대를 가진 내가 너무 어리석었던 것일까? 오래된 것과의 이별, 익숙한 것과의 작별을 조금도 가슴 아파하지 않는 사람들을 먼 타국에서까지 바라보는 것은 나에겐 아픔이었다. 그래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누구인지 고민하는 데에 쓰이는 시간은 정말이지 너무나 짧은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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