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義)'에 굶주린 백성들
내가 기산도 의사를 알게 된 것은 2003년 가을이었다. 나의 길 안내자인 동북아역사재단의 장세윤 연구위원이 한번 취재해 볼 만한 인물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때 나는 <의를 좇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그런 인물을 찾아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다. 6월 항쟁의 불씨를 지핀 박종철씨 아버지 박정기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 이사장 대담에 이어,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를 10여 년간 추적 응징한 권중희 선생을 취재할 무렵이었다.
그 연재는 자그마한 파장을 일으켜 권 선생과 내가 미국 국립문서기록청까지 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나는 그 연재를 하면서 우리 백성들은 ‘의(義)’에 매우 굶주리거나 목말라 있다는 걸 느꼈다.
누리꾼의 제의로 성금을 모을 때, 단 이 주 만에 일천여 명이 4300만원을 보내주셨다. 한 누리꾼의 “망설이다가 일당을 보냅니다”라는 성금을 받고는 눈시울이 뜨거웠다.
우리의 현대사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가 본인은 물론 그 후손까지 작위를 이어가며 활개를 치고, 기울어져는 나라를 바로 세우겠다고 일어난 의병들을 일제는 ‘폭도’로 몰아 형장의 이슬로 보내거나, 해외로 망명의 길을 걷게 했다. 그리고 그 매국노의 후손들은 지금도 이 사회의 주류로 행세하는가 하면, 이와는 달리 폭도의 후손들은 아직도 대부분 가난하거나 역사의 그늘에서 살고 있다.
대한제국 군부대신이 을사늑약에 찬성, 그 공로로 이듬해 일본정부로부터 훈1등의 훈장을 받고 한일병탄 후에는 자작에 매국공채 5만원이란 큰돈을 은사금으로 받았다. 그러면서 애첩을 데리고 호의호식하는 걸 보는 백성들의 울분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해방 후에도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 대낮에 암살을 당했는데도 그 범인은 일 년 만에 형집행 정지로 풀려나 건설회사 부사장으로, 강원도에서 두 번째로 세금을 많이 내는 군납업자가 된 것을 보고는 울분을 참지 못해 곽태영, 권중희, 박기서 이런 분들이 ‘정의의 칼’을, ‘정의봉(몽둥이)’을 들고는 겨레의 이름으로 이들을 응징한 것이다.
문명사회에서, 법치국가에서, 사형(私刑)은 정당화 될 수 없다. 하지만 오죽하면 백성들이 정의의 자객으로 나섰겠는가. 이들이 휘두른 정의의 칼날에 백성들은 환호하고, 몇 십 년 묵은 체증을 ‘뻥’ 뚫은 양 통쾌해 했다.
나라를 지키는 데 가장 앞장 설 군부대신이 오히려 적의 주둔군사령관인 하세가와와 결의형제를 맺고, 침략의 원흉인 추밀원장인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로 거들먹거리는 그를 거의 ‘회 쳐놓다시피’ 온 몸을 쑤셔놓은 기산도 의사의 칼날은 민족정기가 살아있음을 보여준 장쾌한 의거였으리라.
"같은 깃의 새는 같이 모인다"나는 장세윤 연구위원으로부터 소개받은 기산도란 인물에 관심을 가졌지만 강원도와 전라남도 고흥과는 워낙 먼 거리요, 그 후손을 찾는 일도 만만치 않아 접어두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 전라도 창평,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 의병장 추모대제 때 고영준 선생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 끝에 기산도 의사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하자, 바로 그분이 당신 대고모부라고 하지 않은가. 곧 기산도 의사는 녹천의 사위라고 했다. 그래, 나는 고 선생에게 길 안내를 부탁드린 바 있었다.
“같은 깃의 새는 같이 모인다”는 속담이나, 서로 같은 자끼리 패가 된다는 ‘유류상종(類類相從)’이란 고사 성어처럼 우리나라 항일명문가 혼맥(婚脈)을 보면 서로 얽혀 있었다. 특히 만주로 망명간 왕산(旺山), 석주(石洲), 일송(一松) 집안간은 사돈에 겹사돈으로, 동지에다 혈연으로, 똘똘 뭉쳐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백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간도 사돈 간이다. 백범 선생의 큰 자부(인의 부인) 안미생씨가 안중근 의사 동생 안정근 선생의 딸이다. 녹천 선생은 기산도의 의기(義氣) 하나만 보고 당신 사위로 삼았나 보다.
이번 나의 호남 항일유적지 답사 기행은 구한말 의병 유적지 중심이지만, 기산도 의사는 같은 시대의 인물이요, 의병이 한 일과 크게 다르지 않고, 늘 별러왔던 분이기에 답사 순서에 넣었다. 지난 가을, 고 선생은 이미 기산도 후손에게 취재 답사를 간다고 연락한 모양이었다.
평생을 떠돌이로 살다12시 40분, 순천을 출발하여 벌교를 거쳐 고흥반도에 접어든 고 선생은 핸들을 잡은 채 기산도 의사에 얽힌 얘기들을 주섬주섬 늘어놓았다.
“나도 갑갑하지만 그(기산도 의사 아들) 사람도 어찌나 깝깝한지(세상 물정에 어둡고 영악스럽지 못한지) 참 답답하더만. 내가 찾아간다고 해도 별 반응도 없고, 오히려 귀찮게 여기더만. 당신 찾아온 사람들이 자료를 달라고 해서 주면 돌려도 안 준 담시로, 매번 속고만 살았는지 남은 도둑놈 심보로 여기더만. 그래 내가 한 소리했지. 내가 바로 당신 외가 사람이요. 당신 아버지 국립묘지로 이장할 때 내 손으로 당신 어머니 묘소를 파묘를 해서 안장한 장본인이라고 하자 그제야 알아듣더구만.”고 선생은 기산도 의사보다 당신 대고모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영감님 양기를 도무지 받을 수 없어 후손도 없이 친정살이를 하다가 친정에서 돌아가셔서 친정 선산발치에다 묻어드렸다는 아픈 얘기를 전했다. 대고모는 아버지(녹천)의 명으로 기산도 의사와 혼인을 하였지만 집안은 조금도 돌보지 않고, 역적들 응징하는 일에 골몰하다가 유치장과 감옥을 내 집처럼 드나들면서 모진 고문에 반신불수로 몸이 망가지고, 천성이 역마살로 유리표박, 떠돌이로 평생을 살았으니, 남편에 대한 원망이 얼마나 컸겠는가. 대고모는 친정도 시집도 일제에게 모두 대가 끊기는 화를 입었으니 예사 박복한 인생인가.
녹천 의병장도 양자로 대를 이었고, 기산도 의사도 동생의 큰아들을 양자로 들였는데, 후사(後嗣; 대를 잇는 아들)가 없어 다시 둘째인 기노식씨를 양자로 맞았다고 기산도 의사의 집안 내력을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떠돌이 거지 지사, 기산도의 영혼이 잠든 곳을 찾다지도에서 보면 고흥반도가 마치 쇠불알 같기도 하고, 고구마 같기도 한데 실제로 달려보니 여간 먼 길이 아니었다. 다행히 길은 시원스럽게 잘 닦아져 있었다. 이 고장에서 평생은 산 앞자리의 두 고씨는 옛날이야기를 했다. 1970년 대 초만 해도 이 길은 비포장도로로 흙먼지 길이었는데 제3공화국 시절 이 고장 출신의 신형식 의원이 건설부장관으로 재임 때 이 길을 포장했다고 한다.
그때 고흥군민이 고마운 정을 담아 신형식 장관 공덕비를 세우려고 하자, 장관이 깜짝 놀라 서울에서 이곳으로 달려와 “누구를 죽이려고 공덕비를 세우려고 하느냐”라고 크게 꾸짖어 세우지 못했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아주 야무지게 부하를 통솔했다고, 그때는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대통령 앞에서는 발발 기었다는 칭찬 같기도 하고, 비난 같기도 한 말도 했다.
가도 가도 끝없는 전라도 길이 이어졌다. 영남 태생인 나는 솔직히 호남 지리는 익숙지 않다. 워낙 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해남, 벌교, 보성은 두 차례 거쳐갔지만 고흥반도는 난생 첫 걸음이다.
도로 표지판에 나라도 우주센터가 보였다. 이 궁벽한 고흥반도 나라도에 우주개발센터가 들어서서 2010년대에는 우리가 개발한 인공위성을 발사할 계획이라니, 이제 이 지역은 뽕나무 밭이 바다가 된 최첨단의 섬으로 거듭 난 셈이다. 개발이 늦은 지역이 오히려 최첨단의 개발지구로 탈바꿈 하니 사람도 인생 역전을 하고, 땅도 역전을 하는 게 아닐까.
고흥반도 밭에는 마늘이 바닷바람에 잘 자라고 있다. 마침내 우리가 찾는 고흥군 도화면에 이르렀다. 승용차를 도화신협 앞에 세운 뒤 고 선생은 손 전화를 눌렀다.
“‘산 아래로 쪼게만 더 오라’고 하는디, 사방이 산인데 방향도 가르쳐주지를 않고 어디로 오란 말인가.”
고 선생은 전화기 폴더를 닫으며 역정을 냈다. 그러면서 당신네가 이리로 오라고 하였다고 예서 기다리자고 하였다. 마침 마트가 보여 나는 잠깐 기다리는 시간에 쇠고기 두 근을 샀다. 곧 택시를 타고서 기산도 의사 아들 내외인 기노식(81)씨와 정복덕(76)씨가 왔다. 고령으로 꾸부정했다. 얼른 택시로 다가가 요금을 치른 뒤 우리 승용차로 모셨다.
기산도 의사 추모비가 당오리 시장 들머리에 있으니 거기부터 참배하자고 했다. 엎어지면 무릎 닿을 곳에 추모비가 서 있었다. 추모비 앞에는 기산도 의사의 유언 “유리언걸지사 기산도 지묘(流離焉乞之士 奇山度之墓; 떠돌이 거지 지사 기산도의 묘)”라는 글씨가 나무 비 대신 돌에 새겨져 있었다.
“저 비를 세웠으니 아주 맴이 편안해요.”기노식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두 내외는 비석 언저리의 티끌을 주웠다. 의사 기산도, 살아서는 떠돌이 거지 지사로 핍박받은 삶이었건만 돌아가신 뒤 후손의 보살핌으로 영혼이 편히 잠들고 있는 듯하여 나그네의 마음이 아주 산뜻하였다.
"사람은 관(棺) 뚜껑을 닫은 뒤 100년이 지나야 제대로 평가된다"는 말이 빈말을 아니었다. 폭도(暴徒)가 의사(義士)가 되고, 군부대신이 매국노가 된 현실을 눈앞에 보고 있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