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사표를 던지다1년간 국내에서 준비하여온 결과를 가지고 ‘은빛미디어’의 ‘염석주를 찾아서’ 대단원의 장을 찍기 위하여 할머니 군단은 지난 11월 26일 장도에 올랐다(오마이뉴스 10월 24일자 입력 ‘얼어붙은 만주벌 달굴 '할머니 군단' 참조).
할머니 군단 일행 8명(3분의 할아버지 포함)은 26일 장춘 공항에 도착하여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오후 늦게 연길로 들어가게 되었으나 중국답게 3시간이나 연발이 되었다. 덕분에 장춘 시내 관광을 덤으로 하게 되었고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만찬(?)을 즐기며 1주일간의 안내를 맡을 연변동포와 계획을 재검토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연변대학교밤 12시가 되어서야 연변공항에 도착하였고, 마중 나와 추위에 떨며 기다려준 우리의 동포 안내자가 연변에서 좋다는 따듯한 호텔로 데려다 주어 고단한 나그네들의 포근한 첫날밤을 안겨주었다.
연변대학 민족학연구소 손춘일 소장님과 전 연변대 교수 박창욱 교수님이 27일 아침 일찍 호텔까지 와서 우리들의 계획을 재확인하고 1주일간의 답사내용과 결과처리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연변대학 사범대학건물 3층에 민족연구소가 있으며 조선민족과 독립운동사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연구실적과 권위를 가지고 있다.
‘할머니 군단’은 연변대학 민족연구소와 함께 염석주를 찾기로 하였고 결과를 공유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연변동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연변의 밤을 즐기며 우리의 일정이 순조롭기를 기원하였다.
염석주는 어디에?염석주의 행적을 찾기 위하여 그나마 결정적인 증언을 하여주신 분은 염석주가 조성한 농장 ‘추공농장’에서 14세에서 16세까지 2년간 부모와 생활하였던 현 염씨종친회 회장님 염규택씨로 현재 92세로서 기억을 해낸 몇 가지 키워드가 고작이었다.
물론 염 회장의 증언은 3년 전에 별세한 당시 ‘추공농장’의 농장장이었던 주의득씨의 생전에 남긴 녹음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분들의 증언이 일치하기는 하였으나 현재의 지명으로 그곳이 어디인지를 넓은 만주벌판에서 찾아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약 3개월간 ‘할머니 군단’ 3명의 회원들이 불철주야 노력한 결과로 길림성과 흑룡강 성에 걸쳐 5군데의 현과 시 후보지를 선정하였고, 3차례의 답사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염석주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뚜렷한 행적을 남기려 하지 않았고, 게다가 관련인의 의도적인 훼손이 있었을 것으로 의심되며, 그동안 625와 사회적 격변기간 동안 자연히 소멸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대륙도 격변의 시기를 지나며 ‘추공농장’의 흔적을 찾기가 어려울 것으로 전제하고 당초부터 원하는 자료가 없어도 실망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을 다짐하고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답사경로 중 볼 만한 곳은 들러 보아가며 일정을 느긋이 짰다. 연길에서 2박한 후, 28일 일직 연길을 떠나 중국의 국경작전도로로 보이는 잘 포장된 연훈(연길-훈춘 간) 고속도로를 타고 두만강을 우측에 두며 도문시(圖們市)로 향하였다.
우리의 답사일정에서 경험한 바로는, 국가 및 현급 내륙도로도 아직 마차도로 수준이었으나 연훈고속도로는 어느 날 한국으로 재빨리 움직일 수 있는 중공군의 기동력을 상상하면 가슴이 섬뜩해진다.
남북의 아픔을 볼모로 장사하는 중국정부인민폐 20원을 지불하면 우선 강택민이 쓴 간판 위로 전망대를 내어 북한을 볼 수 있게 하고, 내려와서 북한으로 연결된 다리와 두만강의 중간인 ‘변경선’까지 가서 북한을 볼 수 있다. 20원을 내고 다리의 중간선을 넘어 다리 위에 입을 맞추고 어두운 마음으로 모두 기념촬영을 하였다. 황량하던 국경을 붐비는 관광지로 만들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이 반반 정도인 관광객들은 이른 아침인데도 끝없이 몰려와 서글퍼 보이는 북한을 건너다보며 대가로 중국인들에게 돈을 쥐어주고 있다.
3국 국경초등학교 때부터 우리나라 지도 오른쪽 맨 위에는 러시아와 중국을 국경으로 만나는 점이 늘 보아왔다. 중국에서는 훈춘시에 속하고 북한에서는 라진-선봉 자유무역지대에 접하여 함께 러시아와 접경을 하고 있는 삼각지점에 온 감회는 중국인이나 러시아인과 다를 것이다. 중국인들은 여기도 장사 속셈을 발휘하여 국경수비대 건물을 관망대로 사용하도록 하고 입장료를 또 두 당 인민폐 20원씩 징수한다.
아! 발해도문노인회 간부들과 공식회의를 마치고 점심을 대접을 물리치지 못하여 융숭한 오찬을 받은 후,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고 발해의 동경성을 향하였다. 우리는 발해가 고구려의 후신으로 알고 있고, 한국인들에게 ‘발해’는 가슴이 뛰는 일이며 그것도 발해의 수도 동경성을 방문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의 앞날의 모든 불안을 걷어가기 족하였다.
발해(동경성)은 민족의 ‘대종교’가 굳건히 항일운동을 할 수 있게 경제적인, 정신적인 터전이 되어준 곳으로 아직도 확실히 남아있는 거대한 왕궁의 주춧돌과 성벽으로 발해국의 영화를 엿볼 수 있었다.
또한 이곳은 1930년 대에 일본이 만주국을 통하여 만주를 확실히 지배하게 된 후, 군사력을 강화하여 독립군을 압박하였고, 이에 전세가 불리하여져 여러 곳에서 활동하던 여러 계통의 한국독립군들이 모여들었던 곳이다. 또 백산 안희제 선생은 ‘발해농장’을 설립하여 군량미를 공급하고, 대종교 제3세 교주 윤세복(尹世復)의 안전한 활동을 보장한 곳이 바로 동경성이며, 염석주를 찾기 위한 중요한 키워드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곳이기도 한 것이다.
황궁으로부터 4㎞ 이내에 ‘80쌍’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호수가 있는데 이것은 발해 왕실을 지을 때 성벽과 건물 기초석을 파낸 자리라 한다. 1쌍(垧)은 중국의 면적단위로 10,000 평방미터(㎡)이며, 80쌍은 800,000 평방미터(㎡)가 된다. 발해농장은 이근처의 하천을 끌어들려 논농사를 짓도록 개간하였으며, 여기서 생산되는 쌀은 석간쌀(石間米)라 하여 중국에서 최고의 품질로 아직도 인정받아 일반미의 5배 이상의 가격을 받는다.
중국정부는 복원을 향후 2년 내 완료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그것이 동북공정의 하나로 중국변방사로 전락시키려는 흑심을 노골화하고 있다. 강희정 단장은 간단한 제례를 올려 역사에 묻힌 발해의 원혼을 달래고 또한 염석주와의 만남을 빌었다.
영안에서 상지시(尙志市)로발해에서 여러 노인들의 증언을 들었으나, 발해농장에 관한 이미 알려진 정보 이외의 것을 얻기가 어려워 날도 저물어 걸음을 재촉하여 충하진으로 향하였다. 흑룡강성의 지방도로는 매우 열악하여 차로 달리는 것이 마치 말을 타고 달리는 듯이 엉덩방아를 계속 찧어야 했다. 오상시(五常市)에 당도하기 전에 우리는 영안시를 들러야 했다.
조선족 농민들이 많이 사는 곳이며 또한 그곳에서 나서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왔으며, 천도교를 아직까지 모시는 이인희씨와 이봉희씨 형제를 만나 좀 더 염석주에 가까이 가기 위한 증언을 기대한 것이다.
이인희(동생-대종교 책임자)씨는 한국으로 갔으나 마침 이봉희씨는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발해농장과 대종교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며, 얼마나 어려운 시기를 겪었는가를 증언하여 주었다.
역시 염석주 이야기는 거기에서 구할 수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하고 우리는 상지로 향하였다. 상지에 도착하자 날이 저물었다. 지방인들이 사용하는 중국식 여관에서 샤워는 물론 옷도 벗지 못하고 세수도 못한 채로, 이상한 냄새가 머리를 아프게 하는 방에서 하루 밤을 지새워야 했다.
오상현 충하진(冲河鎭)죽과 채와 빵으로 아침을 때우고 오상으로 향하였다. 중국음식에는 늘 너무 많이 주어 아깝고 먹다 남는 막대한 량(?)의 음식을 생각하며 안쓰러워하였으나, 중국인들은 음식이 모자라게 되면 아니 대접함만 못함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둥 일찌 마치고, 이번 답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정보를 얻을 충하진(冲河鎭)으로 향하였다. “하얼빈에서 기차를 타고 와서 마차로 갈아타고 며칠을 들어가야 충하에 도착한다”라고 했으나 하얼빈에서 마차를 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역에 내려야 하였는데 그 역이 오상이어야 하는 것이다. 충하에서 가장 가까운 역이 현재의 오상시이기 때문이다.
충하에 도착하여 초라한 인민정부에 들러 ‘추공농장’에 관련된 정보를 요청하였으나 중국은 혼란기 정보를 정리 및 보관하지 못하였고, 더구나 컴퓨터가 행정에 도입된 것은 2년도 안된다는 것이다. 중국지방정부에서 자료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재확인하였다.
조선인이 많이 살며 인구가 많아 정보가 많을 것으로 기대되는 오상시로 다시 와서 호텔을 정하고 모두가 흩어져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정보를 구하기로 하였다. 한국전문 여행사를 들러 수소문한 강명희 대원이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충하진 농민들과 대출 관련 업무를 하여온 신용협동조합(중국에서는 ‘신용사’라 한다) 당시 전무에 해당되는 직책을 가졌던 은퇴한 김춘봉(74)씨를 알게 되었고, 호텔까지 와서 자신은 알지 못하나 충하진에서 나서 현재 90세인 노인이 있으므로 그에게 정보를 구할 수 있다는 반가운 정보를 주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나기로 하고 마치 일이 다 끝이 나버린 듯이 우리는 오랜만에 즐거운 밤을 가졌다.
다시 충하진으로말을 타듯이 털렁대는 길을 다시 가고 있으나 충하진으로 가는 이번 길은 한결 즐거웠다. 현지 촌장을 통하여 충하진 태생의 중국인 허광발(90, 許光發)을 만나게 되었고 허 노인에게 결정적인 증언을 듣게 되었다.
염씨 종친회의 염규택 회장이 증언한 내용과 일치하는 증언을 같은 각본으로 대사를 외우듯이 증언하여 우리가 와야 할 곳을 정확하게 왔음을 확인시키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1933년에 한국인들이 상당히 큰 면적을 개간하여 논을 만들었으며 약 13호가 있었다. 1935년 일본인들이 경찰을 동원하여 와서 토비 소탕이라 하며 모든 집과 곡물을 불살라 조선인들이 모두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1945년에 모두 나가고 5가구만이 남았다. 그 사람들은 1947년 경에 떠났고 많은 돈을 벌어서 갔다.
중국인들은 한전(밭농사)만 하지 수전(논농사)을 그곳에서는 알지 못했으며 1980년대까지 조선인이 개간한 논 이외에는 모두 다 밭이었다고 한다. 고로 밭일구기가 어려워 버려둔 땅 황무지에 조선인들은 물을 대어 잡초를 없애고 개암나무 숲을 베어버려서 비료로 쓰며 논농사로 들어간다. 고로 조선족은 모두 생명의 줄, 강을 따라가면서 삶의 터전인 논을 일구어 살아온 것이다. 여기가 바로 ‘추공농장’이다.
1년 3개월간 추적하여온 염석주의 행적이 드러나게 베일이 걷히는 순간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하여야 할지도 몰랐던 지난해, 희미한 정보를 하나씩 하나씩 걷어들여 퍼즐을 맞추듯이 짜온 짧지 않은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수원 율전리와 안산의 둔대리, 본오리의 빈농 100명을 이민시키었고 충하진 무주공산을 모두 분양하여주고, 대석하(大石河) 물을 끌어들일 수로를 치고, 90만평의 논밭을 개간하였으며, 기름진 대지에서 첫 해부터 풍성한 수확을 하였다. 이민자들에게 배불리 먹이고, 김창환 장군의 독립군부대에 군량미를 공급하고 나머지는 멀리 상해까지 임시정부 경비를 조달한 것이었다.
대단원의 장을 접으며
한중합작사가 중국현지에서 만든 봉고는 성능이 좋았다. 우리일행 10명을 싣고 달린 거리는 장춘에서 연길까지 중국 국내선 비행거리를 빼면 1400㎞로서 우리는 1주일간 3000리를 훨씬 넘게 달렸던 것이다.
잊혀진 독립운동가, 우리들의 영웅 염석주를 다시 이 세상으로 불러오기 위한 우리들의 의지는 마치 마적 때처럼 만주벌을 달리게 하였던 것이다.
연변대학의 체계적인 연구를 거치는 동안 은빛미디어는 1년 3개월간 추적하여온 염석주의 행적을 하편의 다큐멘터리로 완성할 것이다. “염석주를 찾아서”라는 이름의 다큐멘터리가 ‘안산예술의 전당’에서 불원 시사회를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몇 개의 지상파 방송에서 방영이 될 것이다.
염석주의 모든 조사연구 결과를 종합하여 애국지사의 반열에 오르도록 2008년 3월 국가보훈처에 상신할 것이다. 맑고 푸른 5월에 우리는 다시 오상시 충허진으로 가서 염석주의 혼을 달래는 제를 올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