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잔치가 끝나고 잔치는 끝났습니다. 일요일 북적북적 넘치던 사람 물결은 쏘옥 빠져나갔습니다. 그래도 보수동 헌책방거리를 찾아오는 사람은 제법 많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참고서붙이를 찾는 손길이 있고, 자기 마음밭을 살찌울 인문학 책을 찾는 발길이 있으며, 싼값에 즐길 수 있는 책 하나 바라는 눈길이 있습니다. 온갖 책손이 다 다른 곳에서 찾아와 다 다른 눈으로 책을 만납니다.
‘보수동 헌책방골목 잔치’는 부산에 이만한 책쉼터가 있음을 좀더 널리 알리고, ‘책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놀이판입니다. 우리 삶을 밝혀 주는 책을 느끼고, 책 하나를 손에 쥐면서 마음이며 몸이며 차분히 다스려 보자는 이야기를 건넵니다. 큰잔치가 있다고 해서 잔치날에만 사람이 모여들지 않겠지요. 책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큰잔치가 있든 작은잔치가 있든 틈틈이 책방 나들이를 합니다. 새책방도 찾고 헌책방도 찾으며 도서관도 둘러봅니다. 주머니돈을 털어서 장만하는 책 하나도 좋지만, 주머니돈이 모자라 책을 장만하지 못할 때에는 한두 시간쯤 서서 책을 읽어도 좋아요. 마음에 담는 책이기 때문에 조용히 구경하며 새겨읽을 수 있는 터전만 있으면 됩니다. 책방이든 도서관이든 으리으리한 집에 마련하지 않아도 좋고, 여름에는 안 시원하고 겨울에는 안 따뜻해도 됩니다. 책이 있으면, 마음을 움직이고 매무새를 갈고닦을 책 하나 있으면 넉넉합니다. <2> 조용히 살펴본 책
잔치가 끝난 이튿날에도 책손이 많은 <우리글방>을 찾아갑니다. 골마루마다 한두 사람씩 책시렁을 살핍니다. 비어 있는 골마루로 들어섭니다. 먼저 손바닥책 <에릿히 케스트너/전혜린 옮김-파비안>(문예출판사,1972)이 보입니다. 저한테는 <파비안> 다른 번역판이 있어서, 이 책과 얼마나 다를까 궁금하여 고릅니다. 집으로 가지고 와서 살피니, 저한테 있던 다른 <파비안> 번역은 1967년에 동민문화사(東民文化社)에서 낸 녀석. 두 책은 1967년과 1972년에 옮겨진 햇수만 다를 뿐, 달라진 모습은 없어 보입니다. 다만, 1967년 판에는 앞쪽에 번역시 하나가 더 실려 있습니다. 1972년 판에는 이 번역시가 빠졌어요. - 시든 이파리 (Welkes Blatt) -
모든 꽃은 과일이 될 것을, 모든 아침은 밤이 될 것을 원한다. 영원이란 지상에는 없다. 변화와 도피밖에는. 찬란한 여름조차도 가을과 조락을 느끼기를 원한다. 멎거라, 이파리여, 고요히! 바람이 너를 데려가려고 하면. 너의 놀이를 하고 반항하지 말아라. 조용히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어라. 너를 꺾는 바람이 너를 집에 불어 가도록. <井上洋治/김희진 옮김-사람은 왜 사는가>(분도출판사,1995)라는 작은 책이 보입니다. 일본에서 오랜 세월 신부 일을 해 온 분 이야기책입니다.
.. 제자들은 예수를 따랐지만 자기 목숨이 아깝기 때문에 선생을 모른다고 하고 모두 예수를 저버리는 겁니다 … 제자들은 그때 예수의 십자가를 거들어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지는 일을 아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선생은 십자가를 지고 두 번, 세 번 넘어져 피와 땀투성이가 되었고 마침내 십자가상에서 죽으셨습니다 .. 〈108∼109쪽〉
예수가 죽은 다음에는 제자들이 무엇인가 느꼈을까요? 느꼈겠지요. 느꼈으니까 예수를 믿고 따르며 곧바르고 아름답게 살자고 다짐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이어지겠지요.
.. 5세가 되면 남성은 글자를 배우러 회당에 가서 구약성서를 공부합니다.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남편만 따르면 된다는 것입니다. 12세에서 12세 반쯤 되면 부모가 정해 준 사람과 결혼합니다 .. 〈129쪽〉
천주교 규칙이기는 하겠지만, 남자들은 신부로만 되고 여자들은 수녀로만 되어야 할까 궁금합니다. 믿음은 남자와 여자가 다르지 않을 테며, 믿음을 나누거나 베푸는 깊이가 남자하고 여자가 다르지 않을 텐데.
.. 그분은 당시 겁내며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았던 나병환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법률을 어기면서까지 찾아가서 그들의 고독과 괴로움을 받아주셨습니다. 매춘부나 적국 로마의 앞잡이처럼 되어 있는 세리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들처럼 싫어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그들의 외로움과 눈물을 자기 품안에 받아주셨습니다 .. 〈140쪽〉
어리석은 사람을 깨우치는 말씀은 언제나 ‘낮은 자리가 아름답다’입니다. 하지만, 아직 깨우치지 못해서 그러한지 모르겠으나, 우리들 살림살이나 마음씀씀이는 늘 ‘높은 자리가 좋다’입니다.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분조차 ‘서민 주머니를 두툼하게 하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볼라치면 아찔합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돌아볼 대목은 ‘두툼한 돈뭉치’일까요. 두툼하지 않은 주머니로도 언제 어디서나 누구하고도 즐겁게 울고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터전으로 가꾸어 나가기는 어려울까요. 만화책 <김원빈-주먹대장 (1)>(우석,1994)를 봅니다. 오호라, <주먹대장>이라. 1994년에 한 번 다시 나왔는가 보네요. 예전 판은 찾아볼 수 없겠지만, 이렇게 다시 나온 판이라도 드문드문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 “주먹아, 일어나라. 비겁한 녀석들과는 사귀지 않아도 좋아. 어울려 봤자 이로울 게 하나도 없다.” “모두 미워!” “하지만 동네 애들만 탓할 수 없는 노릇이야. 차라리 그 전부터 전해 오는 인습 탓으로 돌리자.” “그게 뭔데요?” “전부터 이곳 사람들은 짝짝이가 태어나면 큰 재앙이 내리는 걸로 믿고 있단다. 그 그릇된 인식이 불행하게 태어난 사람들을 더욱 슬프게 만들고 있지.” “그럼 저는요?” “너는 주먹 때문에 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 네 할일만 떳떳이 해 나가면 되는 거야.” .. 〈27∼28쪽〉
저도 아주 어릴 적에 이 만화를 보았을 텐데, 줄거리는 잘 안 떠오릅니다. 다시 펼치니 어렴풋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아무튼, 김원빈 님 그림결은 퍽 깔끔하면서 훌륭하다고, 줄거리나 대사나 짜임새가 탄탄하다고 느낍니다. 요즈음 쏟아지는 우리 나라 만화쟁이들은 쉬 따라가지 못하도록.
화보책 <부산>(부산시,1978)을 집어듭니다. 책을 펼치면 맨 처음으로 ‘自主總和 國利民福’이라는 글씨와 박정희 얼굴이 큼직하게 나옵니다. 부산 시내가 넓게 펼쳐진 사진을 봅니다. 시내가 온통 뿌옇네요. 이때에도 이만한 공기였다면……. 바닷가 모래를 체질하는 할머니 사진이 있습니다. ‘노인들의 해변정화 봉사’라는 꼬리말이 붙습니다. 할머니들은 어이하여 이런 데까지 끌려나와야 할까요. 한 줄로 죽 서서 체질을 하며 깨진 병조각을 훑는 할머니들을 보니 안쓰럽습니다. ‘주민자력의 새마을가꾸기로 정비된 마을안길’이라는 꼬리말이 붙은 사진을 봅니다. 넓게 트인 동네 골목길에 꼬마 몇이 자전거를 타고 놉니다. 참 넓구나 싶은 골목길인데, 이제는 이런 골목길은 없겠지요. 모두 재개발을 한다면서 빌라로 바꾸지 않았겠습니까.
<3> 큰아저씨와 책 구경을 마칩니다. 책값을 치르고 책방 문을 나섭니다. 어디로 가 볼까 생각하면서 헌책방 골목을 걷다가 국제시장과 자갈치시장 구경을 가 볼까 싶어 발걸음을 옮깁니다. 건널목 앞에 섭니다. 뒤쪽에서 누군가 반가운 목소리로 부르기에 뒤돌아봅니다. 아, <우리글방> 큰아저씨입니다. 헌책방 골목 한복판에 있는 <우리글방>은 다른 일꾼한테 맡기고(그래서 그곳은 작은아저씨가 지킵니다. 나이로는 위입니다만), 큰아저씨는 새로 마련한 길가 책방을 꾸미는 일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우리글방> 큰아저씨는 새로 얻어서 꾸미는 자리를 구경해 보라면서 손짓합니다. 쫄래쫄래 걸어갑니다. 튼튼하고 좋은 나무를 맞추어 목수 두 사람이 부지런히 새 책꽂이를 짭니다. “헌책방도 문화공간으로 꾸밀 수 있다고 생각해요. 보통은 헌책방 하면 헌책만 있는 곳으로 생각하지만, 이 헌책 하나에도 깊은 문화가 담겨 있어요.” “대여점 책꽂이 뜯어 와서 하는 것도 답은 안 나와요.” “헌책방이라는 게 문고판부터 대형 책까지 다 있는 곳이잖아요. (새로 여는) 매장이 넓다 보니까, 골목에 있는 작은 책방에서는 못하는 일을 해 보려고요. 넓은 곳은 넓은 곳답게 그동안 꽂고 싶었는데 자리가 좁아서 못 꽂았던 책들도 꽂아 놓고, 국어사전도 보기좋은 자리에 꽂아 놓고요.” “이렇게 책꽂이 새로 짜고 하니까, 주변 사람들이 아주 새책방 할 거냐고 물어요. 그러면 ‘나는 헌책쟁이지 새책쟁이가 아닙니다’ 하고 얘기해요.” “여기 말고 3층에도 있어요.” 하시기에 가방을 내려놓고 3층으로 올라가 봅니다. 3층은 텅 비어 있습니다. “여기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직 그림이 안 잡혀서요. 최종규 씨 생각에는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하고 물으십니다. <우리글방> 큰아저씨와 아주머니 생각이 조금 벌어진다며, 서로서로 ‘북까페’와 ‘동네 도서관’ 생각에서 오락가락이라고 합니다. 건물 3층이고 한쪽은 창문으로 길게 이어져 있으니, 창가에 책걸상을 마련해 놓기만 해도 책쉼터 노릇 할 자리를 꾸밀 수 있습니다. 동네 도서관으로 꾸민다면, 온갖 책이 알뜰히 갖추어진 열린 자리에서 느긋하게 앉아서 공부도 하고 시간도 보내고 다리쉼도 할 수 있는 책사랑방 노릇 할 자리로 꾸밀 수 있어요. 어느 쪽이든 동네사람들한테 도움이 되는 일이고, 동네사람들 누구한테나 즐거움을 나누는 일이며, 동네사람들 스스로 마음밭을 일구며 세상을 한층 더 톺아보도록 이끄는 일이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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