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대통령 선거. 이제 꼭 2주일 남았다. '재미없는 대선' '이상한 대선' '끔찍한 대선' '최악의 대선'… 정치인도 기자도 "이런 대선은 처음 본다"라며 혀를 찼던 대선이 이제 막바지로 들어섰다. 마지막 최대 변수였던 'BBK 사건'도 검찰의 '무혐의' 발표로 이명박 후보는 날개를 달았다.
돌아보면 이번 대선에서 가장 흥미진진했던 대목은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의 경선이었다. 두 여인이 대세를 이끌던 두 남성 후보를 제끼느냐 마느냐, 박빙의 승부를 펼쳤던 순간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경선에 지고서도 "졌지만 이겼다"는 언론의 평가를 받았다. 주인공은 박근혜·심상정 의원이다.
연말이면 정치부 기자들의 설문을 바탕으로 선정하는 '백봉 신사상'(12월 7일 시상식)에서도 두 여성은 최상의 평가를 받았다. 박근혜 의원은 '가장 뛰어난 정치적 리더십' 항목 등에서 1위를 차지했고 심상정 의원은 '모범적 의정활동' 항목에서 1위를 차지했다. 종합 순위에선 박 의원이 1위, 심 의원이 3위를 차지했다.
여전히 대선을 안주거리로 삼는 이들은 "박근혜가 됐더라면" "심상정이 됐더라면"이라는 가정을 놓고 설왕설래한다.
심상정 의원의 경우, 삼성 비리 사건이 대형이슈로 터지면서 "'삼성 저격수' 심상정이 당선됐다면 민주노동당이 진보의 혁신을 주도하면서 여권을 삼킬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말들이 나온다. 물론 이제 와서 하나마나한 얘기다. 심 의원은 경선이 끝난 직후, 권영길 후보를 위해 열심히 전국을 누비고 있다.
박근혜의 선택지가 열렸던 11월, 그러나...박근혜 의원의 경선 여진은 좀 더 오래갔다. 한 달 전, 이회창 후보가 대선판에 뛰어들면서 정치적 선택지를 남겼다. 이회창 측에선 노골적으로 구애의 손길을 뻗쳤고, '불안한 후보론'의 확산 속에 이명박 후보는 위태로웠다. 박근혜의 '입'에 모든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친박 의원들 사이에서도 이런저런 견해가 부딪치면서 격론이 오갔다. 전략통인 유승민 의원의 탈당설도 돌았다.
한 친박 의원은 "박근혜 대표에게 '당장 MB(이명박)에게 '올인'(다걸기)하지 말고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정치적 선택지를 만들어 가자는 건의가 있었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명박이냐, 이회창이냐'를 당장 선택하지 말고 중립지대에서 정치적 공간을 넓혀가며 여차하면 탈당까지 결행할 수 있는 수준으로 행보를 하자고 주문한 쪽이다.
이 인사는 BBK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결국 이명박에게 면죄부를 주는 꼴"이라는 생각이다.
"우리는 경선 때부터 BBK에 많이 매달리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BBK의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 다 깨끗하고 BBK만 문제라면 모르지만 도곡동 땅 문제나 각종 위장취업·위장전입 사건에 국민들이 더 분노하는 것 아닌가. BBK 사건에서 뭔가 나오지 않으면 이명박을 도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다."'위장 시리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난 한달 이명박 후보의 각종 위장 사건이 터졌을 국면을 활용해 정국 주도권을 쥐자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박근혜 의원은 '모험'을 하지 않았다. 지난 달 9일, 이회창 후보의 출마는 "정도(正道)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고, 30일부터 지원 유세에 나섰다. '정권 교체'의 대의를 주장하는 선에서 그칠 것이란 예상을 깨고 "이명박을 선택해 달라"는 적극적 내용을 유세에 담았다.
박근혜 의원은 온건파의 견해를 수용했다. 이들은 "이회창의 등장과 각종 악재로 이명박의 불확실성이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대세론이 깨질 만큼 정국의 긴장도가 높지 않은 상태에서 굳이 위험부담을 지고 나설 필요가 있겠냐"는 쪽이다. 결정적 흠결이 나오면 그 때 가서 움직여도 늦지 않다는 계산이다.
지난 8월 경선 직후 박근혜는 백의종군을 선언하면서, '원칙'과 '정도'를 정치적 자산으로 얻었다. 앞으로 당권이든 차차기 대권이든 그가 딛고 설 중요한 기반이다. BBK 등 상황이 종료된 뒤 이명박 지원에 나서는 것은 비겁하게 비칠 수 있고, 당내 입지 역시 좁아질 수 있다는 판단이었던 것이다.
이회창-박근혜, 영남·충청에서 어찌 만날까?결과적으로 박근혜의 행보는 맞았다.
지난달 29일 고 육영수 여사 숭모제에 참석한 박근혜 전 대표는 'BBK 수사결과가 나와도 지원 유세를 계속 할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 "발표가 나오면 그건 그 때 가서 또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6일 강원도 지원 유세를 예정대로 진행할 방침이다. 비서실장을 지낸 유정복 의원은 "이제까지의 행보대로 대선까지 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탈 움직임을 보였던 강경파 역시 "당분간은 움직여볼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유승민 의원은 '탈당설이 사실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내 입에서 나간 얘기는 아니다"고 말했다. 에둘러 말했지만 소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유 의원은 "탈당 안 한다, 박근혜 대표와 끝까지 같이 간다"고 말했다.
박 의원이 지난 30일 전남 무안에서 첫 지원유세를 나섰을 때 이명박 캠프의 한 관계자는 '이명박' 이름을 직접 거론한 것을 반기면서도 "왜 영남이 아닌가"라는 점에 대해 정치적 해석을 깔았다.
"보통 유세는 집토끼부터 잡고, 산토끼로 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호남부터 갔다. 이명박 후보와 거꾸로 돌겠다는 것 아닌가."
박근혜의 지원유세는 이제까지 총 4차례. 전남·경기·제주·전북을 돌았다. 6일 강릉 유세를 마친 뒤 다음 유세지는 어디일까? 대구·경북일까? 충청은 언제 갈까? 두 지역은 '박심'의 향배를 읽어볼만한 전략지다.
대구·경북은 한나라당의 상징적인 지지 기반이자 박근혜의 정치적 고향이다. 이명박 후보는 이 곳을 완벽히 장악하지 못해왔다. 그 틈새를 이회창 후보가 비집고 들어가 보수의 정통성을 호소했다. 또 이회창 후보는 심대평 후보와의 단일화를 통해 자신의 고향인 충청권을 장악에 나섰다.
이회창의 전략적 거점인 대구·경북과 충청에 대한 박근혜 의원의 유세는 어떤 내용일까?
5년 전과 뒤바뀐 2007년, 이회창은 나갔고 박근혜는 남았다
이회창 후보는 이날 두 번 황당해 했다. 검찰의 수사결과에 대해 "황당하다"고 말했고, 한나라당의 후보 사퇴 요구에 대해 "황당한 소리"라고 일축했다.
강삼재 전략팀장의 강도는 더 셌다. '반부패 국민 서명운동'을 벌이겠다며 반(反) 이명박 대오에 함께 할 뜻을 밝혔다. 오는 12일 예정된 한국보수당(가칭) 창당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대선 전 이회창-박근혜 연대의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문제는 대선 이후다. 이 후보측에서 노리는 대목이다. "대선 이후 박근혜는 한나라당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희망섞인 전망을 하고 있다. 대선 이후 한나라당이 당권을 둘러싼 한판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예상은 공공연하다.
총선을 앞두고 당권=공천권으로 통하는 시기다. 박근혜측에선 "당이 깨질 수 있다"는 각오로 이명박측을 견제하고 있다. 최근 정몽준 의원의 한나라당 입당으로 당권을 둘러싼 싸움은 박근혜-이재오-정몽준 3파전이 될 공산이 크다. 이회창 변수가 살아있는 이유다.
박근혜 의원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한 인사는 "이회창은 현재 자기 힘으로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라며 "MB가 이회창과 심대평을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보수신당의 탄생 가능성은 높다"고 말했다.
2002년 대선 때 박근혜는 이회창 후보의 당권, 대권 독식에 맞서다 탈당을 결행,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지만 다시 복당해 이 후보를 도왔다. 이번엔 처지가 뒤바뀌었다. 이회창이 나갔고 박근혜는 남았다. 이들이 다시 조우할 날이 있을까?
이명박 후보는 BBK 수사 검찰 발표로 날개를 달았지만 보수는 아직 내전 중이다.
"이회창? 내용 없는 출마 실망... 박근혜? 잘 가고 있다" 보수진영 전략가 윤여준 "경선 직후 이명박 3번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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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진영의 전략가로 통하는 윤여준 전 의원은 이회창 후보와 지난 두 번의 대선을, 박근혜 의원과는 지난 총선을 함께 치렀다. 이번 대선에선 이명박 후보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채 자문역을 하고 있다. 한나라당 경선 직후 이 후보를 세 차례 만났다고 한다.
5일 BBK 검찰 발표가 있는 직후 윤 전 의원을 전화 인터뷰했다. 윤 전 의원은 "저렇게 되면 이 후보를 지지했다가 중립지대로 빠진 사람들, 지지하는 사람들에 중에도 체중을 싣지 않았던 사람들이 안정을 찾게 되면 지지율이 올라갈 것"이라며 "앞으로 남은 2주일 사이에 정동영·이회창 후보에게 방법이 없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대권 삼수에 도전하는 이회창 후보에 대해 유 전 의원은 "차림새는 바뀌었다"면서도 내용에 대해선 "급하게 나와서 너무 준비가 없었던 것 같다"며 "이명박·정동영과는 다른 차원의 메시지가 없는 것을 보고 너무 실망했다"고 혹평했다.
또한 "이 후보는 확실한 2위인가"라고 반문한 뒤 "(정동영 후보와) 등수가 바뀌면 완주의 의미가 없다"며 "보수진영 내부에서 단일화 요구가 거세지고 입지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심대평 후보와의 신당 창당에 대해선 "(이회창 후보가) 충청당의 대표가 되면 그게 의미가 있나, 지역주의 타파 쪽으로 가야지 지금 상황에서 또 하나의 지역당을 만드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일축했다.
반면 박근혜 의원에 대해선 “잘 가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박근혜 의원도 공력이 있는 사람"이라며 "이번엔 졌지만 정치적 장래를 높게 본다"고 말했다.
"박근혜 의원은 다른 정치인과 다르게 자기의 정치적 이해보다 원칙을 앞세운다. 지금은 손해를 보는 것이 있어도 원칙과 정도로 가려는 모습을 보인다. 탈당? 정치인으로 한 번쯤 생각하지 않았겠나. 하지만 승복한다고 했으니 (이명박 후보의 비리와 관련해) 새로운 사실이 나오면 몰라도 선거운동이 시작된 마당에 지원하지 않으면 졸렬하고 야비한 것 아닌가. 훌륭하다. 지원유세를 해도 적극적으로 안 할 것이라 짐작했지만 아니었다. 다른 정치인들이 배워야 한다."
정몽준 의원의 한나라당 입당으로 박근혜의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했다는 시각에 대해선 "(정몽준 의원) 만만치 않다, 정치적 상징성과 영향력이 큰 사람"이라면서도 “한나라당 내 무슨 기반이 있냐, 시간이 지나면 몰라도 현재로선 그런 경쟁 구도가 안 된다"고 말했다.
윤 전 의원은 정몽준 의원의 등장이 한나라당이 보수에서 중도로 노선이 이동하는 촉진제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는 "시대적 상황이 중도로 가지 않을 수 없다"며 "박근혜 의원도 내년부터는 정치적 전망을 점검하면서 상당히 유연해질 것이라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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