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리도 상처 입은 사람들일까? 그 빈곤함은 또 어떤가. 공선옥이 5년만에 내놓은 소설집 <명랑한 밤길>을 보면서 탄식이 나오는 건 어찌할 수 없다.
그녀의 소설을 보고 있으면 경제대국이라는 말이 우습게 느껴진다. 재테크 열풍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너무나 소박한 꿈을 지녔기에 눈물을 흐르게 하는 사람들, 그들이 말을 건네는데 그것이 보통 솜씨가 아니다.
표제작 ‘명랑한 밤길’의 ‘그녀’는 치매 걸린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집안은 어렵지만 이십대의 한복판에 들어선 그녀는 명랑하다. 가난하지만 봄바람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다.
그런 그녀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한 남자가 다가온다. 그녀는 그가 말하는 음악도 모르고 샴푸 이름도 모른다. 그래도 좋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연애란 그런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고작 무공해채소다. 그녀는 정성껏 준비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그들의 사랑을 보장해주겠는가. 하기야 그는 처음부터 순진한 처녀를 꼬드길 생각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원통해서 화를 내보지만 돌아오는 말은 겨우 “이거 필요없으니 가져가, 썅. 촌년이 발랑 까져가지구서는. 에잇 재수없어”다. 더 좋은 것 해주는 아가씨가 생기자 그녀는 그렇게 버림받고 만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외국인노동자들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외국인노동자들의 한스러운 탄식도 들린다. 그녀는 그들의 노래를 따라 부른다. ‘드림’이라고 말하는 무언가가 저 앞에 보여서 손을 내밀었건만, 사람들은 쫓겨나기만 한다.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은 겨우 그런 대중가요뿐. 그것이 그녀의 삶이다.
‘꽃 진 자리’의 그녀는 어떤가. 가족은 온통 ‘적’과 같다. 어머니는 투덜거리고 아버지는 화를 내고 자식은 말을 듣지 않는다. 남들처럼 오순도순 모여서 이야기라도 하면서 살아보고 싶건만 어쩐 일인지 그런 화목함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는 동료교사를 떠올린다. 동료교사와 살면 좀 괜찮아지려나, 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 생각에 못 이겨 그녀는 동료교사의 집에도 가보지만, 그것은 상상에 불과하다. 현실은 여전히 그녀를 옥죄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가을’의 그녀는 남편을 잃었다. 물난리에 남편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남편이 일을 해주는 조건으로 주인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쫓겨나야 한다. 갑작스럽게 찾아 온 봉변이다.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할 때 사방에서 비명소리와 한탄소리가 들려온다. 도대체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까? 산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보지만 찾아오는 건 메아리뿐이다.
‘도넛과 토마토’의 그녀는 포마이카 장롱 하나 갖는 것이 소원이다. 요구르트 아줌마의 꿈은 그것이건만 세상은 도와주지 않는다. 전 남편이 죽자 그와 살던 외국인 여자는 그녀에게 도와 달라 말한다. 거기에 써보려던 글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 장롱 하나 갖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인가? 남들은 뚝딱 뚝딱 잘도 해치우던데 그녀에게 그런 일은 요원할 뿐이다. 할 수 있는 것은 지하철에서 남에게 어깨를 빌려주는 것, 겨우 그런 것뿐이다.
다른 소설들도 분위기는 비슷하다. 공선옥의 소설에는 가난해서 힘겨운 사람들이 나온다. 가난 때문에 이혼한 사람들도 많고 그것을 벗어나 보려고 재혼했다가 더 힘들어진 사람들도 나온다. 가난하기에 배운 것 없어 남에게 속는 사람도 나오고 가난해서 갈 곳 없어 막연한 심정으로 주저앉은 사람들도 나온다. 가난해서 상처 받은 사람들이다. 제목에 있는 ‘명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분위기가 소설집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공선옥은 유머를 놓지 않고 있다. 긍정적으로 앞날을 보도록 하는 것은 어떤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이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하는 ‘뭔가’를 준비해 놓았다. 그것은 ‘희망’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 굳이 말하면 ‘그래도 살아간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병 주고 약 주는 것인가. 그런지도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 약이 다른 소설들의 ‘거짓 희망’보다 더 반갑다는 것을, 공선옥의 것이기에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