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30일~12월 2일 강화도 '오마이스쿨'에서 개최된 '한-일 시민 친구만들기 2007' 행사에 참가했던 일본 시민기자들이 한국에서 보고 느낀 것을 기사로 써서 <오마이뉴스 일본판>에 속속 올리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몇 편을 번역해 소개합니다. 이시카와 마사유키 기자는 첫 한국방문에서 평소 읽었던 재일교포 작가들의 작품 속에 그려져있는 산하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왜 이렇게 재일교포 문제에 무관심한지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편집자말] |
이번에 연이 닿아 '한일 시민 친구 만들기 2007'의 일원으로 한국에 가게 되었다. 문득 1992년 5월 일찍 세상을 등진 이양지의 작품 <유희>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앞에는 바위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변화무쌍한 능선은 하늘을 향해 있었으며, 보이는 모든 곳에 산자락이 자리했다." (<이양지 전집>, 고단샤, 448쪽)
1989년 제100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한국에 유학했음에도 한국어와 인간의 실체에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오는 여대생을 하숙집에 사는 '내'가 회상하는 식으로 그린 침울한 중편이다.
처음 이 작품을 접한 이후 산을 등지고 있는 서울의 풍경을 몇 번인가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막연히 고베(神戸)와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직접 서울에 가서 확인해 보지는 못하고 있었다. 최근 몇 년간 한류 열풍으로 주위의 몇몇 지인들이 한국으로 여행을 가고 있고, 작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일하게 된 후에도 적극적으로 한국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이양지의 작품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풍경을 실제로 내 눈으로 확인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기억의 저편에 묻어두었다. 이런 내 모습은 그대로 내 자신에게 재일한국인 문제에 대한 거리감을 상징하는 것이 되어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강화도로 건너가 마지막 날까지 서울 시내로 가는 일정이 없었기 때문에, 예의 그 풍경을 직접 볼 수 없을지도 몰라서 동행한 기자와 현지에서 만난 몇몇 한국인 기자에게 "서울은 산을 등지고 있는 도시인가요?"라고 거듭 같은 질문을 했다. 하지만 "글쎄요"란 대답만 돌아왔다.
강화도 역사탐방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나라(奈良)를 연상시키는 풍경이었다.
고대에서 근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항상 무거운 의미를 지닌 사적지를 조민재 선생의 설명을 들으며 돌아보면서, 학창시절부터 여러 번 갔었던 만엽집(萬葉集,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歌集) 관련 유적 탐방을 할 때와 아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문화적∙풍토적으로 비슷한 것이 있구나 하고 실감했던 것 같다.
그다지 거리감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국 기자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쉽게도 역시 언어의 벽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많은 한국인 기자가 능동적으로 일본어를 배우고 있어서 의사소통을 하는 데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심도 있는 화제가 나오면 서로 대화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내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지만, 어학능력이 뛰어난 통역사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독점할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더 밀접한 관계를 맺기 위해 심도 있는 문제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마음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동행한 몇몇 일본인 기자가 최근에 배웠다는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내 자신이 얼마나 나태했는지를 느끼게 됐다.
이양지가 그린 여대생 유희는 '아'와 'あ(아)' 사이에서 언어의 장벽에 부딪쳐 번뇌하다 결국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늦은 밤까지 계속된 한일 시민기자 교류 현장에서 참가자들이 아무 도움 없이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시대가 변해가면서 이양지가 남긴 주제는 소원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한국 방문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화두, 재일한국인 실제로 대부분의 한국인 기자가 이양지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이양지와 김석범, 김학영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유미리라면 읽어본 적이 있다고 말한 20대 기자가 있었다. 한국에서 인기가 있는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야베 미유키 정도였다. 애당초 재일한국인이라는 말 자체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 <오마이뉴스> 기자의 말에 따르면 한국에서 재일한국인 문제는 거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재일한국인이란 일본 특유의 문제일 뿐이다. 거리감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일찍이 다케다 세이지가 쓴 다음 구절이 무겁게 내 마음을 눌렀다.
"민족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일본인이 인간, 삶의 방식, 사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일교포에게 불가역적인 물음일 수밖에 없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욕망에서 나온 것이지만 소위 일본의 전후사회 속에서 '신화학(神話學)'적인 유형으로 존재하고 있다." (<'재일한국인'이라는 근거>, 고쿠분샤, 227쪽)
즉 일본인이 한국∙북한 국적의 사람들을 색깔이 칠해진 어떤 테두리로 에워싼 채 무거운 주제를 떠맡긴 셈이다.
강화도에서 고대에서 근대까지의 역사에 대해 말씀해주신 조민재 선생은 한국에서 고대사를 중립적으로 가르치지 않는 것이 불만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일본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러한 실상은 양쪽 모두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탄식하셨지만, 재일한국인 문제와 관련해 현재 일고 있는 몇몇 변화상을 보면 변화의 징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도움 받을 필요 없이 여러 나라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들이 대다수가 되어 한국∙북한 사람들을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게 된다면 한쪽으로 치우친 역사인식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약해지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조 선생도 체념을 벗어버릴 것이다.
일정 마지막 날.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창밖으로 서울 시내에서 보이는 뾰족한 바위산의 모습을 드디어 볼 수 있었다. '이것이 이양지의 작품을 읽고 나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산이구나!'하며 남몰래 감회에 젖었다.
"날씨가 좋았다. 바람도 없고 아침 햇살은 따사로웠다. 바위의 빛깔과 푸른 하늘,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모든 광경이 평온하고 청명했다." (<이양지 전집>, 448쪽)
작품의 무거운 분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 그런 평온한 대목에 걸맞은 순간을 선물로 생각하면서 한국에서의 운 좋은 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