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헌책방을 사랑하게 되었느냐?
사람마다 다르리라 봅니다. 저처럼 헌책방을 사랑하는 분들도 있을 테고, 아직 헌책방을 안 사랑하는 분들도 있을 테며, 굳이 헌책방을 사랑해야 하느냐 묻는 분도 있겠지요. 헌책방을 딱히 사랑하지 않더라도 가끔 찾아가는 분들이나 자주 찾아가는 분들도 있으리라 봅니다. 어떠하든 좋습니다. 저는 저대로 헌책방을 쭈욱 다니는 동안 어느새 사랑에 푹 빠졌습니다. 그러면 왜 헌책방을 사랑하게 되었느냐? 다름아닌 한 가지입니다. 헌책방에는 온갖 책이 골고루 있거든요. 흔히 말하는 잘 팔리는 책도 있지만, 잘 안 팔리는 책도 있습니다. 누구나 말하는 좋은 책도 있지만, 썩 안 좋은 책도 있습니다. 아주 소중하다고 할 만한 책이 있는 한편, 종이뭉치도 안 되는 쓰레기책도 있습니다. 많은 이가 알아보며 아끼고 반기는 책이 있지만,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외로운 책도 있습니다. 그럭저럭 찾는 사람이 있어 헌책방 임자가 꾸준히 사들이는 책이 있으나, 거의 찾는 사람이 없어서 헌책방 임자가 아예 안 사들이는 책도 있습니다.
또한 어른책과 어린이책이 한 자리에 있습니다. 그림책과 사진책이 나란히 꽂혀 있습니다. 이문열 책과 조정래 책이 함께 꽂혀 있어요. 전여옥 책과 이오덕 책도 얌전하게 꽂혀 있습니다. 정약용 책도 있고 몽테스키외 책도 있습니다. 성경도 있고 불경도 있고 꾸란도 있습니다. 문제집과 참고서와 교과서도 있군요. 코딱지 묻은 책도 있고 커피 자국 묻은 책도 있습니다. 아 참, 라면국물과 김치국물 묻은 책도 더러 있답니다. 쥐가 쏠아먹은 책, 파리똥이 앉은 책, 더께가 짙게 내려앉아 빠지지 않는 책마저 있네요. 파짓간에서 찢어버렸으나 헌책방 임자가 소중한 보물을 주워오듯 가지고 와서 살살 매만지며 풀로 붙이고 테이프로 감고 호치키스로 찍기도 해서 다시 묶어내는 책마저 있습니다. 새책방에서 안 팔려 어느덧 판이 끊어진 책이 헌책방에 들어옵니다. 도서관에서 자료로 갖추지 않고 내다 버린 책이 헌책방에 들어옵니다. 비매품 책으로 찍어서 공짜로 이곳저곳 돌렸다가 흘러나오는 책, 그러니까 신문뭉치와 함께 버려졌다가 헌책방으로 흘러드는 책도 있습니다. 헌책방 헌책은 한마디로 '우리 얼굴' 국회의원이나 시장 후보로 나온 이들이 자기 돈으로 마구마구 찍어서 뿌렸다가 들어오는 책도 있어요. 가난한 글쟁이가 이름난 글쟁이한테 허리 숙여 선물했다가 버려진 책도 있지만, 고운 뜻을 접어서 더는 보기 싫어졌다면서 내다 버리는 ‘사인해서 선물한 책’도 들어옵니다. 그러고 보니, 사랑했던 사람이 갈라서면서, 시름시름 앓던 사람이 죽으면서, 이제 한국을 사랑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나라밖으로 떠나면서 내놓는 책도 들어오는군요. 헌책방 헌책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우리 얼굴’입니다. ‘우리 목소리’라고 해도 되겠네요. 우리 얼굴과 목소리는 다 다릅니다. 헌책방 헌책도 다 다릅니다. 새책방에 꽂히면 모두 같은 책이지만, 헌책방에 들어오는 책은 다 다릅니다. <한국의 일상 이야기>(눈빛)라는 책이 새책방에 꽂혀 있으면, 책뒤에 찍힌 값대로 팔리는 똑같은 상품입니다. 그러나 이 책이 헌책방에 꽂혀 있으면, 저마다 다른 사람 손길을 타고 저마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느낌으로 읽힌 뒤 다 다른 이야기를 안고 헌책방에 팔린 책입니다. 같은 책이 하나도 없는 곳이 헌책방이라고 할까요. 같은 사람이 없고 같은 얼굴이 없고 같은 목소리가 없듯이, 헌책방 헌책도 저마다 다른 빛깔과 냄새와 이야기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저는 온갖 사람들을 두루 만나기 좋아합니다. 한 갈래 사람만 보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제가 안 좋아하는 정치 성향을 드러내는 사람은 좀 꺼리고 싶군요. 뭐, ㅎ당은 끔찍하게 싫은데, ㅇ당 또한 마찬가지고, ㅁ당이라고 나을 바 없어요. ㅁㄴ당은 그럭저럭 괜찮지만,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웬만해서는 벽을 세우지 않고 누구나 스스럼없이 만나고 싶습니다. 그래서 세상 온갖 모습과 이야기를 부대끼며 껴안고 싶습니다. 이런 저한테는 ‘잘 팔리는 책’ 중심으로, 또 ‘영업사원 힘이 좋은 출판사 책’ 중심으로, 또 ‘새책방에 마진 많이 남겨 주는 출판사 책’ 중심으로 꽂아 놓고 있는 큼직한 새책방으로는 발길을 옮기고 싶지 않습니다. 동네책방이 좋아요. 그래서 저는 새책을 살 때는 몇 군데 동네책방에 미리 전화를 해서 무슨무슨 책을 갖다 달라고 이야기한 다음 찾아갑니다. 제가 미리 말해 놓은 책을 고르고, 그 책방마다 알뜰하게 갖춰 놓은 다른 새책을 두루 구경한 뒤, 미처 몰랐던 새로운 책을 사곤 합니다.
사람 공부, 세상 공부할 수 있는 헌책방 헌책방을 갈 때는 아무 생각 없이 갑니다. 그저 그날그날 제 운에 따라서, 발길에 따라서 만날 수 있는 책을 만날 뿐입니다. 마음 가볍게 책방 나들이를 즐겨요. 오늘은 이 책을 만나서 좋고 내일은 저 책을 만나서 좋은 헌책방입니다. 이렇게 홀가분하게 책을 구경시켜 주고, 책마다 다 달리 품은 이야기를 저한테도 고맙게 들려주는가 하면, 헌책을 오래도록 매만져 온 헌책방 임자들 살아 있는 목소리와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헌책방을 오랫동안 찾아다닌 단골손님 삶도 함께할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는 사람 공부요, 세상 공부요, 자기 다스림도 되는 헌책방 나들이예요. 이러니까 헌책방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온갖 책이 골고루 꽂혀 있는 헌책방이니까 안 찾아갈 수 없습니다. 서울에 있든 광주에 있든 제주에 있든 부산에 있든 진주에 있든 청주에 있든 춘천에 있든, 어디로든 자전거를 타고 찾아갑니다. 때때로 기차나 고속버스도 탑니다. 언제 한 번 비행기 타고 일본 헌책방 나들이도 떠나 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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