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반지가 돼 산 중턱을 감싸고 있습니다. 500여 미터 남짓한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지만, 이 고장을 지켜낸 수호신마냥 산세가 자못 당당합니다. 더욱이 오래지 않은 때의, 여전히 식지 않은 뜨거운 역사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이어서 성스러운 느낌마저 드는 곳입니다.
잔뜩 흐렸던 지난 화요일(11일), 남원의 진산인 교룡산(蛟龍山)을 찾았습니다. 외지인이 남원에 들어서서 그곳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도로 표지판에 그 이름이 보이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춘향골’이라는 이미지가 워낙 큰 까닭이지 싶습니다.
우선 시내로 접어들어 ‘만인의총(萬人義塚)’을 지나야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로 넘어서려는 왜군에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죽어간 수많은 이름 모를 넋들이 묻힌 곳입니다. 그런 까닭에 오래 전부터 성역화되어, 광한루원과 함께 남원의 또 다른 랜드마크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곳을 지나 시멘트로 포장된 비탈진 고갯길을 오르면 촘촘히 쌓은 성벽과 마주하게 되고, 그곳이 등산객들이 신발끈을 조여 매는 교룡산 산행의 시작점입니다. 튼실하게 쌓은 교룡산성의 성벽은 산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선입니다. 성벽 높이라봐야 고작 어른 키 두세 배쯤에 불과하지만, 워낙 가파른 곳에 자리하다보니 난공불락의 요새가 따로 없습니다.
홍예가 오롯하게 남아 있는 성문을 통과하려면 돌계단을 에둘러 올라야 합니다. 생뚱맞게 반원형 옹성이 갖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느 읍성처럼 평지에 쌓은 것도 아닌데 무슨 필요인가 싶지만, 무척 견고해 보입니다.
이 철옹성이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곳을 거쳐 간 역사적 인물은 적지 않습니다. 멀게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이었던 처영과, 가깝게는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와 최시형, 그리고 동학농민군을 이끈 혁명가 김개남 등이 이곳에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특히 동학의 발상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남원에는 동학 관련 유적이 많습니다.
하나 같이 외침이나 폭정으로 인해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던 시기, 그들의 분노를 밑불 삼아 현실 극복의 의지를 들불처럼 활활 타오르게 했던 영웅들입니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남의 도시 뒷산’ 교룡산을 굳이 찾아 오르는 것도 그들이 남긴 역사와 교훈이 녹록지 않기 때문입니다.
‘김개남동학농민군주둔지(金開南東學農民軍駐屯地)’. 동학농민운동 당시의 것이라기보다는 훗날 누군가가 기다란 막대기에 적어 홍예문 옆에 꽂아 둔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 사실만큼은 잊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듯, 바탕의 하얀 칠 자국은 곳곳이 벗겨졌지만 검은 글자만큼은 여전히 또렷합니다.
그가 수많은 농민군을 이끌고 올랐을 길을 따라 오릅니다. 지금은 폐허로 남았지만 곳곳에 집터의 흔적이 보입니다. 개중에는 지금도 식당으로 쓰이는 집도 있고,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듯, 벽면에 주소 팻말이 붙어 있는 ‘버리기 아까운’ 곳도 있습니다. 이곳에서 치열한 접전이 있었을 과거에는 피난 온 백성들과 군사들을 위한 거처가 있었을 터입니다.
비록 가파른 곳이지만 길이 갈지자로 굽어 있는데다 어린 아이들도 너끈히 오를 만큼 돌계단을 촘촘히 다듬어 놓아 외려 경사가 완만합니다. 또, 길가로 소꿉장난처럼 헛담을 쌓고 군데군데 가로등과 이정표를 세워둔 것은 오르는 사람이 지루하지 않도록 한 배려가 아닌가 싶습니다.
홍예문에서 바쁠 것 없는 걸음으로 고작 10분 걸었을 뿐인데, 산성 속의 절, ‘선국사(善國寺)’에 닿았습니다. 수도 도량인 절이야 산의 품 안에 깊숙이 들어앉기 마련이지만, 이 절은 산에 기대어 있다기보다는 성 안에 들어앉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묘사일 듯합니다.
절이래봐야 성냥갑 같은 건물 서너 채와 손바닥만 한 안마당이 전부입니다. 규모로만 보자면 웬만한 암자보다도 작습니다. 사천왕상이 눈을 부릅뜨고 앉은 천왕문은커녕 그 흔한 일주문도 없습니다. 없어서는 안 될 불구(佛具)인 법고와 범종조차 대웅전 안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각 부재를 따로 깎아 세우지 않고 몸돌과 지붕돌의 구분도 없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 세운 ‘꼬마 7층탑’이 눈에 들어옵니다. 거무튀튀한 이끼가 세월의 더께마냥 탑 전체를 두르고 있어 아주 오래된 유물 같지만, 모양새를 보건대 기껏해야 몇 십 년을 넘지는 않을 듯합니다.
위치야 어떻든 법당과 나란하게 탑 한 기 자리한 것은 당연지사일 테지만, 탑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배롱나무 한 그루가 어린 아이를 품에 안듯 탑을 감싸고 있어 이채롭습니다. 백일홍이 만개할 즈음에는 탑의 검은 빛과 어우러져 한 폭의 멋들어진 컬러 화보가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불교 교리로 따진다면야 절의 중심은 대웅전이겠지만, 이곳을 찾은 관광객의 눈으로 보자면 단연 ‘보제루(普濟樓)’가 될 것입니다. 돌기둥 모양의 높다란 주춧돌 위에 세운 2층 누각이지만, 절 안마당에서 보면 평범한 단층 건물입니다. 절 전체가 계단처럼 높게 쌓은 석축 위에 만들어진 까닭입니다.
신발을 벗고 보제루에 올라서면 남원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일 만큼 탁 트인 시야를 자랑합니다. 비록 절의 부속 건물일 뿐이지만, 임진왜란과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는 작전을 지휘했던 본부가 있었음직한 건물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1960년에 이 건물의 마루에서 임진왜란 당시 임금이 승병장에게 하사한 ‘승장동인(僧長銅印)’이 발견되어 이곳이 ‘범상치 않은’ 절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동학의 교주, 최제우가 그의 깨우침을 글로 남겨 경전으로 묶어낸 곳도 이곳이며,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남원을 점령한 김개남도 이곳에 걸터앉아 전략을 구상하고 새 세상을 꿈꾸었을 겁니다. 비록 그들의 저항은 끝내 실패하고 말았지만, 온갖 핍박 속에서 살아온 민초들의 잠자고 있는 의식을 깨워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틀어내는 데에는 충분했습니다.
소박한 대웅전 현판 양 옆으로 용머리 조각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른편은 여느 것과 다를 바 없지만, 현판 왼쪽의 용은 입에 물고기를 물고 있습니다. 물고는 있으되 먹잇감으로 삼키려는 모습은 아닙니다. 모르긴 해도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예일 겁니다.
불교에서 용머리 조각은 중생들을 극락으로 이끌고 가는 성불(成佛)의 상징물로, 물고기 문양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중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불한 선지자가 가엾은 중생을 이끌고 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 독특한 조각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김개남을 떠올립니다. 그는 신분이든 재산이든 조금도 부족함 없는 양반가에서 태어나, 동학에 입교하여 비도를 자처하고 멀쩡한 이름까지 고쳐가며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혁명가입니다. 그가 남녘(南)에 열고자(開) 했던 새 세상이란 어떤 것이었을지.
어쩌면 이곳에서 농민군을 이끌며 그들에게 심어주었을 새 세상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조각으로 새겨져 남은 것은 아닐는지. 갑오년(1894년) 동짓달, 그는 끝내 공주 우금치를 넘지 못한 채 물러나 자신의 고향인 태인에서 잡히고, 재판도 없이 열흘 만에 효수되고 맙니다.
그는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고, 폭도라며 손가락질해대는 양반들에게 침을 뱉으며 사자후와도 같은 유언을 남깁니다.
“너희 양반 놈들이 백성들 등쳐먹을 줄만 알았지,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한 일이 대체 무어냐!”
나라(國)를 좋게(善) 만든다는 뜻의 절 이름과, 하늘로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蛟龍), 곧 때를 잘못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한 영웅호걸의 산이라는 이름이 공교롭게도 혁명가 김개남의 삶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산을 내려와 남원 시내로 들어서니 곳곳에 어지러운 현수막이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대통령 선거가 코앞입니다. 때가 때이니만큼 그들 모두 성공과 행복과 미래를 앞 다퉈 얘기하지만, 지금껏 정치인으로 살아온 그들이 정작 국민을 위해 무얼 했는지는 쉬이 떠오르는 게 없습니다. 외려 앞서 말한 김개남의 말에서 ‘양반’을 ‘정치인’으로 바꿔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지경입니다.
핑크빛 사랑 얘기 가득한 ‘춘향골’ 남원에도 쓰라린 역사를 견뎌낸 핏빛 저항의 몸짓이 곳곳에 남았습니다. 그 한복판에 교룡산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일상이 버거워 삶이 자꾸만 현실에 길들여지려 한다는 사람들에게 짬을 내어 '김개남'의 생애를 더듬어보라고 권합니다. 그 느낌이 바로 해답을 줄 거라면서.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