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회사가 나를 고용해서 언제 어떤 일을 하라고 지시하고, 근무지를 옮기라고 하고, 당번근무를 시키고, 시간외 근로 내역을 보고하게 하고 직급까지 발령을 냈다면 그 회사가 내 회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렇게 몇 년 동안 그 회사에서 일하다가 이제 와서 여긴 당신 회사가 아니니 그만 두고 나가라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런 비상식적인 '불법파견' 사건들은 그 전부터 있어 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런 사건들이 더욱 더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비정규직법' 때문이다이 법안이 7월 1일부터 시행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데 부담을 느낀 기업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용역·외주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 한 해 내내 노동계의 주요 현안으로 떠올랐던 이랜드 사태가 그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이랜드 사태가 계속 관심을 모으며 주목을 받고 있던 와중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이와 비슷한 사례들이 비일비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코스콤(옛 한국증권전산) 사건이다. 코스콤은 정규직 사우회에서 100% 출자한 자회사인 증전엔지니어링 등을 통해 10년 넘게 노동자들을 파견받아 사용해왔다. 비정규직법에 따르면 이들 중 코스콤에서 일한 기간이 2년이 넘은 사람들은 코스콤에서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한다. 하지만 코스콤은 비정규직법 시행을 앞두고 그동안 코스콤에 노동자들을 파견해왔던 회사들과의 관계를 민법상의 '도급'으로 전환했다. 업무 자체를 외주화함으로써 파견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코스콤이 직접 단체교섭에 나설 것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여왔다(관련기사: "비정규직법이 만든 또 하나의 거리의 투사, 코스콤") 하지만 코스콤의 이런 '꼼수'에 제동이 걸렸다. 11일, 서울남부지방법원은 코스콤이 민주노총 사무금융연맹, 증권노조, 코스콤비정규지부을 상대로 낸 '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의 판결에서 코스콤이 "적어도 협력업체의 근로자들의 근무시간 할당, 노무제공의 양태, 작업환경 등을 결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관해 "단체교섭의무를 부담한다"고 판시했다. 사실 이 가처분은 비정규직노조가 회사 건물 안으로 들어오거나 회사 앞에서 농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 코스콤 사측이 법원에 신청한 것이었다. 코스콤으로서는 "법대로 하자"며 들이민 칼이 부메랑이 되서 돌아온 셈이다. 물론 코스콤이 신청한 가처분을 받아들인 부분도 있다. 법원은 ▲회사 사옥 및 그 경계담 안쪽 지역을 점거하는 행위, ▲사옥 경계담 바깥 반경 10m 이내에 구조물을 설치하는 행위와 그 외 지역에 2.5m 이상의 망루를 설치하는 행위, ▲단체교섭 목적이 아닌 경우에 사옥에 출입하는 행위, ▲유인물 부착·게시와 소음발생 행위 등은 중지하도록 하고 위반 시에는 1회당 3백만 원의 벌금을 부과하도록 했다.
법원은 또한 코스콤이 단체교섭에 응해야 하는 범위도 한정했다. ▲휴일근로의 제한, ▲작업일정 사전통보, ▲본사 조합원의 본사 출입카드 사용보장, ▲비정규직 지부 조합원들이 근로하는 장소의 사무공간을 확장하고 컴퓨터 등 사무기기를 개선해 줄 것을 요구하는 사항, ▲ 증권선물거래소 구내식당 및 주차장 이용시 정규직원들과 동일한 처우를 해달라는 사항, ▲복지후생시설인 휘트니스룸의 장비 개선 요구 등 7개 항이다. 반면 ▲고용안정, ▲노동조합 활동에 관한 기본사항, ▲시간외 수당의 지급, ▲적법한 기준에 의한 임금지급을 요구하는 부분 등 4개 항은 단체교섭의무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법원은 이 4개 항에 대해서도 "근로자 지위확인 등 소송의 본안판결 확정 시까지 단체교섭에 응할 의무가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신청인과 협력업체들과의 위임도급계약이 불법파견근로관계에 해당한다고 볼 여지를 배제할 수 없는" 사건인 만큼 "노조가 '교섭' 자체를 요구하는 것을 위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단체교섭을 위한 목적으로 출입하는 경우에는 건물 진입을 허용하는 등 단체교섭의무 사항이 아닌 부분마저도 코스콤의 사용자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번 판결로 코스콤 사태의 획기적인 진전이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비록 코스콤 사측의 사태 해결에 관한 기본 입장이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의 법적인 판단결과에 따르겠다"는 것이지만, 이는 대법원의 확정판결까지 가겠다는 '버티기 작전'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원이 지난 4월에 건설노동자들과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하는 판결을 잇따라 내놓은 데 이어 이번 코스콤 사건에 있어서도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놓음에 따라, 이런 흐름들은 내년 7월 100인 이상 기업으로의 비정규직법 적용 확대를 앞두고 기업들의 위장도급 관행에 제동을 거는 기준이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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