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루한 자에게 무릎을 꿇을 줄도 알아야 하는 것, 그것이 정치다"<대왕 세종>에서 태종(김영철)은 당시 왕세자인 양녕대군에게 준엄한 목소리로 일렀다. 과연 이게 단지 드라마일까? <대왕 세종>이 <이산>에 이어 드라마로 보는 또 하나의 '제왕학'이 될지 모르겠다.
<대조영> 후속으로 1월 5일 밤 9시 40분 첫 방송 하는 80부작 KBS 대하사극 <대왕 세종>(극본 윤선주, 연출 김성근)이 20일 오후 KBS 신관에서 제작발표회를 열었다. 제작발표회에서 공개된 일부 장면에 따르면, <대왕 세종>이 그린 세종은 우리가 아는 세종과 또 다른 모습을 선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드라마 5회까지, 세종대왕의 어린시절 충녕대군을 연기하는 아역 이현우는 "충녕은 천방지축이라, 사람들 몰래 밖에 나가 사고도 치고 잡혀가기도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며, "내가 알던 세종대왕과는 달라서 재밌었다"고 말했다. 실제 맛보기로 상영한 <대왕 세종>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어린 충녕은 어린 '세종 대왕'하면 떠오르는 자애롭고 후덕한 어린이 모습은 아니었다.
태종도 다르다. 사극에 단골로 출연해 굳은 이미지인 격분 잘 하는 태종이 아니다. 태종을 연기하는 김영철은 "이번 태종은 여태껏 해왔던 태종이 아니다"며, "조용하고 모든 걸 절제하며 폭발보다 내면으로 끌어들이는 그런 태종 캐릭터"라고 말했다.
그뿐 아니다. <대왕 세종>에서 현실 정치인 모습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을 듯 해 보인다. 김성근 PD는 "세종이 왕위 오를 땐 태평성대 아니라 나라 세운지 이삼십년 밖에 안돼 혼란스런 시기였다"며, "주변사람들과 함께 공조하는 그분 통해서 이상적인 조직 모델을 제시하고, 세종이 왕이 되면서 정진해 태평성대 이끌기까지 과정과 노력을 보여주겠다"고 설명했다.
그래서일까? 세종을 연기하는 김상경도 "<대왕 세종>이 왕권을 확립하는 이야기라, 정치하는 분들이 보면 재밌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극이 그저 옛날 이야기던 시대는 간 걸까?
김성근 PD는 "이 분이 기본적으로 많은 걸 갖춘 상태에서 왕을 시작한 분이라기보다 끊임없는 실천과 노력 속에 대왕 자리에 오른 분"이라며, "그걸 많이 보이려고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세종 역을 맡은 김상경과 나눈 일문일답.
꿈에 세종을 만나고, 내게 세종은 운명
- 세종 대왕 역할 제의받고 운명이라고 했더라. 어떤 게 운명이란 건가? "우연찮게 산에 갔다 김성근 감독을 만났다. 전혀 약속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또 내가 사실 꿈을 꾸었다. 세종 대왕 꿈을 꾸었다. 그게 운명이라 생각한다. 또 여주에 있는 영릉(세종의 릉)에 가봤다. 개인적으로 '기' 같은 걸 잘 느끼는데, 영릉에서 좋은 기를 많이 느꼈다. 운명적이지 않나 싶다."
- 세종을 어떻게 다르게 연기할 생각인가? "작가와 감독이 초반 얘기한 게 뭐냐면, 세종을 우리가 아는 성군 이미지로만 그려지면 너무 완벽한 사람으로 드라마적으로도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왕자지만 평범했던 세 번째, 왕위를 이을 가능성이 없는 세 번째 왕자로, 점점 우리가 알고 있는 성군이 되는 과정이다. 인간적 고뇌라던가, 어찌 보면 평범한 인간적 견지에서 그릴 생각이다. 세종은 밖에서 돌아다녔다. 술도 마시러 다니고."
- 오늘 하이라이트에 나온 아역 장면 보니, 부담되지 않나?"(아역 이현우를 바라보며) 우는 장면 보고 개인적으로도 울 뻔 했다. 아. 똑바로 해야겠다 생각도 들고…(웃음). (이현우를 가리키며) 저 친구 굉장히 잘했다. 생긴 것도 귀티 나게 생겼잖나? 꼬마애가. (웃음) 고맙다. (이현우를 보며) 열심히 할 게."
- 어제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나라의 지도자가 가져야할 덕목이 뭐라고 보나?
"<대왕 세종>은 실록에 있는 걸 기본으로 하고, 작가가 쓴 거다. 세종은 '백성'이란 단어에 굉장히 신경 쓴다. 내가 살펴야할 백성이 누군가 고민 많이 한다. 대통령 되신 분이 50퍼센트 가까운 지지율 나왔잖나. 일반인들 마음이 원했잖나.
사실 굉장히 단순한 이야기지만, '한글'이라는 게 어리석은 백성들이 자기 뜻을 편하게 펼 수 없다는데서 시작한 거잖나. 사랑하는 백성들이 쓰기 어려운 말을 하기보다 쉬운 말을 만들어야겠다로 시작했다. 세종이 백성을 굉장히 사랑한 거 같다."
피 바람 안 나면서 재밌게
- 세종 대왕 역을 하긴 어떤가?
"그 동안 세종 대왕을 다루는 드라마가 없었다. 나왔어도 지나가는 역할이거나 아들로 있을 때 모습이지. 다루는 드라마가 없던 건, 그 시기가 굉장히 어려운 거다. 일화들이 자세하게 된 것도 없고, 태종이 왕 될 때 <용의 눈물> 보면 죽이고 살벌하잖아? 드라마 소스로 좋은데, 세종이 했던 건 피바람 나고 그런 것보단 왕권이 확고해지는 과정이 굉장히 재밌다. 피바람 안 나게 하면서 재밌다.
장점은 대본에 있는 것 같다. 윤선주 작가가 진짜 잘 쓴다. <불멸의 이순신>과 <황진이>도 둘 다 다루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여자 분인데 사극에 맞는 것 같다. 대사 하나하나가 연기하고 싶게 용솟음치는 게 있다. 그게 장점 같다. 대본이 좋다.
혹자는 세종이 빈이 많았던 걸 궁금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저희 드라마가 야사 쪽으로 가진 않을 것 같다."
- 80부작이다. 괜찮나?"지금까지 한 드라마 중 가장 긴 드라마 같다. 걱정이 뭐냐면, 난 사실 긴 드라마를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이 정도는 거의 처음이다. 영화는 시나리오가 완성돼 있잖아. 드라마도 될 수 있음 단막극 같은 게 재밌다. 시작 있고 끝이 명확하다. 이리 긴 드라마는 시간에 쫓겨 짜임새가 헐렁해진다거나 초반 재밌던 게 약해질 우려가 크다.
그런데 <대왕 세종> 대본이 지금 11부 12부 정도가 나오는데, 작가가 문장을 굉장히 재밌게 쓴다. 그런데 엄청 어렵게 쓴다. 돈도 많이 들어야 하고, 배우들도 고생 많이 해야 하는 신들을 많이 쓴다. 사실 찍기 어렵게 써야 보는 분도 재밌다. 작가가 아까 '11, 12부는 각오 하셔야 할 거예요'라 하더라. 감독님은 '뭘 상상하든 그거 이상일 거예요' 그러더라(웃음)."
청렴 상징 황희 정승이 실은 비리의 온상?- 힘들진 않나?"말 타느라 죽는 줄 알았다. 세종대왕이 말 탈 줄 몰랐다. 그런데 세종이 말 타고 달리더라. 세종이 굉장히 재밌는 분이다. 어려서 결혼해 밖에 산다. 궁에 안 살고. 바깥 문물을 굉장히 접하기 쉬운 입장이었다. 예전에 세자로 책봉되면, 교육 받았다. 왕이 될 교육을. 양녕은 받았다. 세종은 공부 하고 싶어도 주지도 않고.
'제왕학'이라고 해서 왕이 되는 책들이 있다. 일반 사람이 보면 안 된다. 그런데 (충녕을 가리키며) 어린 친구가 관심이 많아 그걸 자꾸 보고 싶어 하고, 백성들 만나러 가출하고 그런다. 또 지루하지 않게 심심할 만하면 칼싸움을 시킨다.
이번에 세종 한다니까 '축하한다' 전화 오고 그랬다. 그런 전화 처음이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세종에 대한 관념이 굉장히 큰 거다. 굉장히 부담스럽다. 기대하는 치가 있잖아. 누구나 세종 대왕 이미지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거기 벗어나면 분명 뭐라 그럴 거다. 그렇다고 상투적으로 웃고만 있을 순 없지 않나. <대왕 세종> 포스터도 좀 다르게 하려는 의도가 들어간 포스터인데, 사람들이 연산군인 줄 알았다고 하더라(웃음)."
- 세종은 어떤 사람인가?
"세종은 참 무서운 사람이다. 조선시대는 신분 차별이 굉장했는데, 능력만 있으면 고용했으니. 사실 황희 정승은 정적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왕이 된 다음에 황희를 중용한다.
우리가 황희를 청렴하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완전 비리 온상이었다. 돈 많이 받아먹고, 별짓 다 했다. 상소 올라오고 잘라야 한다 별 이야기 다 올라오는데 세종이 안 들어준다. 일만 잘하면 그걸 다 묻어줄 수 있다 생각한다. 특이한 분이다. 세종이.
그러다 하도 상소가 많아 유배를 보냈는데, 황희 정승이 유배지에 도착할 즈음 다시 부른다. 그땐 유배지 가는데 몇 백일 걸리고 그랬다. 그런데 도착할 즈음 다시 불렀다더라. 그만큼 특이한 분이다. 노비인 장영실을 중용하고. 그런 게 다 나중에 드라마 만들라고 그렇게 한 거 같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