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이순신이 있다면, 중국에는 악비(岳飛, 1103~1141년)가 있다. 선조가 한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평양으로 의주로 도주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외로이 바다를 지키며 조선을 살려내고는 장렬히 전사한 이순신 장군과 매우 흡사한 인물이 바로 중국 송나라의 악비다.
송나라를 끌어들여 1125년에 요나라를 멸망시킨 금나라는 바로 그 해 연말부터 동맹국 송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금나라 군대에 밀려 송나라는 황하도 빼앗기고 회수도 빼앗기고 이제는 양자강 유역까지 빼앗길 절대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말 그대로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바로 악비였다. 만약 금나라가 쳐들어오지 않았다면, 악비도 그처럼 ‘출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무명 장교로 일생을 끝냈을지도 모른다.
많은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둔 '악비'하늘이 악비에게 내린 ‘선물’은 소속 부대의 궤멸이었다. 송나라 건염 1년(1127) 9월에 왕언이란 장군이 지휘하는 송나라 군대가 대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이 부대에 소속된 악비라는 장교가 패잔병들을 모아 독립적인 부대를 조직한 뒤에 조정의 명령을 받아 대(對)금나라 항쟁에 나선 것이다.
처음 한동안은 별다른 소득이 없던 악비의 부대는 이후 금나라 군대는 물론이고 국내의 반란세력들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송나라의 지배영역을 양자강 이북으로 또 회수 이북으로 또 황하 유역까지 끌어올리는 데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송나라 고종 황제는 악비가 얼마나 대견했던지, 소흥 6년(1136) 9월에는 호부낭관에게 악비 군대의 보급을 책임지도록 조치했다. 중앙정부의 실무책임자에게 일개 부대의 보급을 책임지도록 한 것이다. 그만큼 악비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가 바로 악비의 전성시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이후부터 악비에게 시련이 닥쳐 그의 내리막길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를 모함하는 세력들이 노골적인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황제 마음에 의심의 씨앗 던져 넣은 악비의 라이벌 '진회'소흥 7년(1137) 3월에 악비가 황제에게 회서 지방의 군대를 자기 부대에 통합시켜 줄 것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전력을 증강함으로써 금나라를 상대로 한 압박에 탄력을 불어넣기 위한 의도였다. 황제도 그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윤허를 내렸다.
하지만, 바로 이때에 악비의 라이벌인 진회(秦檜, 1090~1155년)가 황제의 마음에 의심의 씨앗을 던져 넣었다. 한국인들이 원균을 이순신의 라이벌로 생각하듯이, 중국인들은 진회를 악비의 라이벌로 인식하고 있다.
<송사> ‘고종본기’에 따르면, 진회는 황제에게 “악비의 의도가 의심스럽다”고 진언했다. 은근 슬쩍 악비를 모함한 것이다. 창세기의 뱀이 하와에게 의심의 씨앗을 심어준 것과 유사한 일이었다.
악비가 반란을 꾀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으면서도, 어딘가 그럴 것 같은 느낌을 황제에게 심어준 것이다. 그래서 황제도 처음의 윤허를 보류하고 말았다. 악비를 전폭 지원하던 황제의 태도가 갑작스레 신중해진 것이다. 당시 금나라와의 전쟁 중에 관료들의 반란이 심했기 때문에, 황제로서는 그런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악비, 황제에 대한 서운함에 '사표'를 쓰다자기 덕분에 영토를 회복해 가고 있는데도 황제가 진회의 말을 따른 사실이 내심 속상했는지, 1개월 뒤인 소흥 7년(1137) 4월에 악비가 갑자기 황제에게 사표를 내민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상복을 입겠다는 것이었다.
그 전년도인 소흥 6년(1137) 4월에 악비는 모친상을 당해 상복을 입게 되었지만, 며칠 뒤에 황제로부터 “복직하라”는 명령을 받고 다시 전선에 나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새삼스레 악비가 다시 상복을 입겠다고 나선 것이다.
물론 명분은 효의 실천에 있었지만, 누가 보더라도 황제에 대한 서운함 때문에 사표를 쓴 것이었다. 황제도 그런 악비의 속마음을 알아챘는지,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계속 일할 것을 명령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대파들이 또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악비는 황제에게 서운함을 느껴서 사표를 제출한 것이지만, 반대파 장준은 “악비의 본심은 군주를 협박하려는 것”이라면서 황제의 마음을 다시 흔들기 시작했다. 황제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데 모친상을 빌미로 주군을 협박하고 있다면서 악비를 비난한 것이다.
반대파들의 모함으로 1141년에 투옥·살해되다결국 이번에도 황제의 마음은 또 움직였다. 하지만 전시 중에 악비를 해임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병부시랑을 보내 악비의 군대를 감찰하도록 했다. 소흥 6년 9월에는 호부낭관에게 악비 군대의 보급을 책임지도록 하더니, 이번에는 거꾸로 병부시랑을 보내 악비 군대를 감시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사실상 악비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사건이었다. 중앙에서 감시관까지 파견될 정도라면, 악비가 얼마나 불신을 받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악비의 군대는 금나라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소흥 9년(1139) 3월에 중원의 상당 부분을 회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순신이 해상에서 연전연승을 거둔 것처럼, 그는 육상에서 그 이상의 성공을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악비는 반대파들의 모함을 계속 받다가 결국 1141년에 투옥·살해되고 만다. 그리고 진회의 주도 하에 송나라는 금나라에 대해 굴종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물론 진회의 선택은 더 이상의 희생을 중단시켰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는 일이었지만, 악비 등의 주전파를 제거함으로써 송나라가 황하 이북을 수복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렸다는 점에서는 부정적 평가를 받을 만한 일이었다.
'어떻게 살아왔느냐'를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그런데 당시의 상황을 보면, 악비에게 정말로 ‘나쁜 마음’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당시 송나라에서는 웬만한 능력만 있으면 반란군 수장이 되거나 아니면 금나라와 손을 잡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악비는 끝까지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행적만 놓고 보면, 악비는 결코 주군을 배신할 마음을 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고토 수복뿐이었다.
그런 그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것은 그의 주군인 고종 황제였다. 그는 겉으로는 중원 수복을 외쳤지만, ‘혹시 악비가?’라는 염려 때문에 악비를 보호하지 않았고 결국 그 때문에 중원을 완전 수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에게는 국토 수복보다는 정권 유지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송나라 고종처럼 말로는 나라와 백성을 염려한다고 떠벌리는 통치자들이 많지만, 그들 중 일부는 실제로는 나라나 백성보다는 자기 정권의 유지를 더 우선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을 ‘감별’하는 기준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느냐를 보면, 그 사람이 나라를 위해 살 사람인지 자기 자신을 위해 살 사람인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나라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갈 것이 뻔한 사람이 통치자가 된다면, 그런 나라에서는 이순신이나 악비 같은 사람들이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용렬한 통치자들은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하긴 하지만 자신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두 눈 뜨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