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서울역사는 일제 강점기인 1925년 세워져 최근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을 묵묵히 지켜본 역사의 상징물이다. 이제는 현대식 새 역사에게 기능을 물려주고 고된 한 세기의 노력을 한숨 쉬고 있다. 무서운 세상 인심은 벌써 옛 서울역사의 존재를 다 잊었는가 싶었는데 21일 오후 이색적인 공연이 열려 새삼 그곳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 곱씹게 해주었다. 멀리 떠나 보았거나 먼 곳에서 서울을 찾았던 오랜 추억을 가진 사람이라면 서울역사의 아련함과 낯섦을 기억할 것이다. 특히 조택원이라는 젊은 청년이 머나먼 동경과 유럽으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그곳에 섰을 때의 감회는 참 남달랐을 것이란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사람, 한국 신무용의 선구자 조택원을 기리는 이색 무용공연이 옛 서울역사에서 21일 오후 3시에 열렸다. 2008년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되기 전 마지막 모습을 새기기에도 좋은 기회였다. 또한 향후 이 공간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도 적잖은 참고가 되어줄 시도였다 현대식 극장에서 보는 화려한 세트와 조명과 달리 . 옛스런 공간에 걸맞은 구식 조명 아래 보는 춤은 또 다른 향수와 멋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 날의 주인공 조택원은 세상이 다 아는 무용가 최승희와 함께 일본 신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와 같은 시기에 무용을 배웠다. 최승희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북쪽에서 활동한 것과 반대로 조택원은 이북 함흠에서 태어나 남쪽에 본거지를 두었다. 묘하게 엇갈린 두 무용가의 삶은 대단히 흥미롭다. 1926년 3월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이시이 바쿠의 신무용에 매료된 두 사람은 시기는 조금 달라도 결국 동경 이시이 바쿠의 무용단에서 만난다. 두 사람 모두 국내외 활동으로 한국 무용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는 데 공헌했다. 그러나 최승희가 일반에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해 조택원은 그리 인지도가 높지 않다. 정치적 이유로 인해 미국과 일본에서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국내에 그의 춤을 알리기 어려웠다. 김백봉에 의해 최승희의 춤과 존재가 국내에 꾸준히 알려진 것과 달리 조택원은 국내 기반이 미비했다. 그러다 자유당 정권이 몰락한 1960년 13년만에 꿈에도 그리던 고국땅을 밟게 되었다. 귀국 후 타계하기까지 17년 간 조택원은 한국 무용계를 위해 많은 일들을 해나갔다. 대한일보에 무용가 최초로 칼럼을 연재했고, 한구일보사 고문 취임, 서울시 문화상 수상, 한국예총 상임고문 취임, 한국민속예술단 창단, 거액을 출자하여 무용용어 통일안위원회 발족, 최초의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최승희에게 김백봉이 있다면, 조택원에게는 제자 송범이 있었다. 송범은 조택원의 춤을 받아 전후 황폐한 한국무용계를 부흥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했으며, 오랜 국립무용단 단장을 맡으며 서양 전막 발레와 견줄 대형 무용극을 만들었다. 또한 국수호, 조흥동, 정재만, 채상묵 등 한국무용계 남성춤의 산맥을 형성하였다. 조택원은 1907년 함흥 명망가의 3대독자로 태어났다. 한일합방 후 부친은 상해로 망명을 떠나고, 청소년기에 조부와 함께 서울로 이사해 휘문고보에 전학하였다. 휘문고보 시절 테니스 선수로 무패 기록을 세운 조택원은 어릴 적부터 관심이 높았던 춤의 열망을 꺾지 못하고 1921년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신극단체인 토월회의 ‘사랑과 죽음’에 출연하여 춤을 춘 것을 시발로 조택원의 무용가로서의 삶은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아직 정구선수의 명성을 유지하던 26년 보성전문 재학시절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경성공회당 공연을 계기도 마침내 운동선수가 아닌 무용가로의 결심을 굳히게 된 조택원은 그해 10월 이시이 바쿠의 제자로 입문하게 되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1928년 이시이바쿠 무용연구소에 들어가 몇 달 후 무대에 서게 되었고, 불과 1년만에 동경에 조택원 후원회가 결성될 정도로 폭발적인 반향을 끌어냈다. 이시이 바쿠에서의 무용유학을 마친 조택원은 1932년 첫 결혼과 더불어 조택원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국내 신무용 활동을 열었다. 이듬해인 33년에 첫 무용발표회를 가졌고, 이 때 선보인 ‘승무의 인상’은 지금까지도 조택원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 되었다. ‘승무의 인상’은 후일 시인 정지용에 의해 ‘가사호접’으로 개칭되기도 했다. 두 해가 지난 1935년에 또한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만종’, ‘포엠’ 등이 발표되었다.
두 번의 무용발표로 신무용가로서 자리를 굳힌 조택원은 좀 더 넓은 시야를 갖기 위해 1937년 유럽으로 떠나게 된다. 떠나기 전 그는 현존하는 한국 최고(最古)의 영화 ‘미몽’에 그의 무용단과 함께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1년 일본무용협회 현대부 이사에 피선되고, 1942년 발표한 작품이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해서 광복직후 친일무용가로 낙인 찍혀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총독부의 창씨개명 강요에 맞서 “조택원은 이름이 아니라 흥행의 상표”라고 받아넘겨 개명에 거부하였고, 일제를 피해 상해로 망명한 부친의 영향 등을 생각하면 조택원의 친일은 쉽게 단정지을 일은 되지 못할 것 같다. 그렇지만 1947년 무용단을 조직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조택원은 그것이 13년의 기나긴 여정이 될 것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조택원은 미국과 일본, 유럽 등지에서 한국춤을 심는 데 주력했다. 미국 전역을 돌며 수백 회의 공연을 가졌으며, 프랑스에서만도 200여 회의 공연을 올렸다. 그러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세계적 무용가와 교류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조택원의 춤을 한층 더 발전하고 세련되는 계기를 가졌다. 조택원 사후 20년이 지난 1996년 국립극장에 조택원 동상이 건립되고, 다시 10년 후인 2006년 무용전문지잡지인 <춤>지 창간 30년 기념으로 조택원 화보집이 발간되었다. 이 화보집 발간으로 인해 조택원기념회가 결성되고 뒤늦은 감은 있으나 한국 근현대 무용사의 뿌리를 찬찬히 되밟아가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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