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잡이 밤배가 칠흑의 밤바다를 밝히고
울진으로 향하는 동해안 바닷길을 따라가노라면 비릿한 생선 내음이 내내 코끝을 아려온다. 오징어잡이 밤배들의 총총한 불빛만이 연신 깜빡거리는 울진 후포항의 밤 풍경은 고즈넉하기만 하다. 시인은 동해바다 후포에서 가슴 밑바닥부터 내밀하게 파도쳐 밀려오는 내 안의 작은 목소리에 한껏 귀 기울인다. 맵고 모진 억센 파도로 자신을 채찍질하며 짙푸른 동해바다에 제 몸을 몇 번이고 담금질하며….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한 잘못이 맷방석만하게
동산만하게 커 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 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 보다.
멀리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 신경림의 ‘동해바다-후포에서’
후포에서 시인이 그토록 찾아 헤맨 것은 무엇일까? 심연의 파도로 너울대는 동해바다에게 넌지시 물어본다. 오징어잡이 밤배의 아득한 불빛을 바라보며 한 시인은 길 잃은 마음을 찾고, 나는 잃어버린 미각을 찾으려 애쓴다. 후포수산물도매센터에서 오늘밤 술안주로 쓸 싱싱한 산지직송 오징어를 골라볼 참이다.
오징어는 살아있는 것이 한 마리에 5000원인데, 요즘 오징어가 풍년이 아니라 예전보다 가격은 좀 비싼 편이란다. 육질이 탱탱한 놈 네댓 마리를 골라 횟감으로 잘게 썰어놓으니 쫀득쫀득한 입맛에 벌써부터 침 넘어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홍합 한 꾸러미와 오징어횟감을 챙겨들고 만선의 밤 항구를 서둘러 빠져 나왔다.
달빛 바다에 어리는 부처님의 산 그림자
7번 국도를 내달리는 동안 동해바다는 잠시 얼굴을 내보이다 이내 사라지길 되풀이한다. 만월의 새하얀 달빛이 검붉은 밤바다에 잘잘하게 부서지고, 달빛 바다에 어린 부처님의 산 그림자를 쫓아 백두대간의 큰 품으로 한 발짝 비집고 들어섰다. 굽이굽이 깊은 산과 물을 감싸 안은 불영계곡이 저 만치서 가슴을 열고 수인사를 건넨다.
계곡 초입부터 도로변에는 간간이 민박집들이 눈에 띈다. 불영사 아래 무지개펜션에 여장을 풀고 준비해 온 음식들을 방안에 풀어 헤쳤다. 산림이 울창하고 진귀한 물산이 많아 예부터 울진(鬱津)이라는데, 그 이름 값이 과연 거짓은 아니다. 대게, 과메기, 오징어, 홍합 등등 끝없이 쏟아지는 씨푸드의 향연에 모두들 감탄사만 연발해댄다.
동짓달 기나긴 산촌의 밤, 둥그런 달무리가 고향집처럼 푸근하고, 활활 불이 붙은 장작더미에 그리운 추억들만 밤새도록 타닥타닥 타올랐다.
아름드리 통나무를 깎아 머리를 수놓은 오색금단청이 투명한 아침햇살을 받고 한결 반짝거린다. ‘천축산 불영사’를 알리는 일주문이 사찰초입부터 활짝 두 팔을 벌리고 맞이한다.
불영사 일주문을 지나 산문에 닿는 소요한 숲길은 세간의 번잡함을 털어 버리기에 적당한 수행길이다. 나무그늘이 울창한 짙은 녹음을 한참이나 걸어가면 계곡의 양쪽에 걸쳐놓은 커다란 다리가 떡하니 앞을 가로막는다.
불영교는 새로 단장한 대리석다리로 특별히 눈여겨볼 것은 못되는데, 다리 위에서의 조망이 좋아 사진을 찍는 연인들이 난간에 드문드문 기대었다. 아래를 굽어보니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과 물의 조화가 산태극 수태극을 이루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펼쳐놓은 듯 장쾌하고 웅장하다.
한해를 보내는 연말은 교회나 절 집이나 분주하기는 매 한가지다. 교회는 성탄절 준비로 정신이 없고, 절 집은 동지 팥죽 끓이느라 시끌벅적이다. 동지는 절 집의 큰 행사 중 하나여서 불영사도 인근 신도들로 번잡한 모습이다.
대롱대롱 처마에 매달린 메주들의 앙증맞은 행렬
이맘 때 절 집의 이색적인 풍경 중 하나는 대롱대롱 처마에 간신히 매달린 메주들의 앙증맞은 행렬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턱걸이에 열심인 녀석들을 바라보면 장난꾸러기 동자승들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장독대들이 옹기종기 머리를 맞댄 공양간을 돌아나가면 아담한 삼층석탑이 자리 잡은 대웅보전 영역에 들어선다.
탑 앞에 단정히 놓인 배례석에 한 줄기 연꽃이 피어오른다.
배례석에 곱게 피어난 연꽃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문득 고개를 들자 수백 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불영사 영산회상도와 삼존불이 나란히 어깨를 겨눈다.
영산회상도 앞의 삼존불은 불영사의 600년 된 은행나무로 만들어 2002년에 새롭게 봉안한 불상들이다.
300년 된 그림과 600년 된 나무, 겨울 불영사에서 천년의 시간이 찰나 속에 스쳐갔다.
대웅보전 기단아래에 묻힌 돌 거북이 한 쌍이 유난히 눈길을 끈다.
커다란 법당하나를 온몸으로 짊어지고 어디론가 힘차게 기어가는 모습이다.
이 석물은 불영사 창건당시의 것으로 전해지는데, 천축산의 강한 화기(火氣)를 억누르기 위한 풍수비보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란다.
바닷가에서는 예로부터 거북이가 바다를 지키는 영험한 동물로 모셔졌을 터, 절집마당에서 뿌리 깊은 우리문화의 원형을 다시금 찬찬히 되짚어보았다.
언제부터인가 절 집에 오면 생긴 버릇
언제부터인가 절 집에 오면 물맛을 보는 버릇이 생겼다. 명산대천에 샘솟는 물이 약수 아닌 곳이 없는 까닭이다. 달달하고 시원한 감로수 한잔을 연거푸 들이키고 작은 연못을 따라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본다.
연못의 깊숙한 곳, 다소곳한 모습으로 불영사의 가장 오래된 옛집인 응진전이 돌아앉았다. 응진전은 3칸짜리 작은 건물인데 가운데 칸만 문을 달고 양 옆은 벽체로 꾸몄다. 옅은 안료로 색을 칠했는데, 불그스레한 연분홍 빛이 마치 새색시의 수줍은 볼을 연상케 한다.
불영사 연못에 천축산의 그림자가 잠든다. 누구든 불영계곡 불영사에서 정성을 한 껏 다한다면, 부처님의 그림자가 언젠가는 마음 속 작은 연못에 잔잔히 어릴 날이 오지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