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이 자신의 역사를 추억할 때마다 떠올리는 이미지 중 하나는 ‘은자의 나라’(Hermit Kingdom)라는 표현이다. 조선이 서양에 알려지지 않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인상을 풍기는 표현이다.
그런데 조선이 정말로 우물 안 개구리였다면, 1866년 병인양요 때에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 군인들을 포함해서 당시의 서양인들이 조선의 고서적을 탐낼 이유가 있었을까? 우물 안 개구리들이 쓴 책을 탐낼 이유가 있었을까? 조선이 정말로 미개한 은자의 나라였다면, 차라리 성경책이나 뿌리고 갈 일이지 조선의 책들을 훔쳐 갈 이유가 없지 않았을까?
19세기 후반의 서양인들은 조선을 ‘은자의 나라’라고 불렀다. 그들은 조선이 서양에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런 표현을 생각해냈다.
서양인들이 제대로 본 것이다. 그들이 관찰한 대로, 조선은 주로 중국과만 관계를 가졌다. 조선은 동아시아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19세기 이전의 조선은 서양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조선이 왜 서양에 관심을 갖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조선이라고 해서 동아시아 세계 밖에 몰랐던 것은 분명 아니다.
한반도에서는 일찍부터 승려들을 통해 서역과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을 통해 서역의 문물을 접하고 있었다. 또 고려시대에는 아라비아 상인들도 직접 이곳에 찾아왔다. 이따금씩은 표류자들을 통해 서양을 접하기도 했다. 서역을 통해 서양의 존재를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굳이 서양을 알려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알면 다치기 때문이었을까? 그게 아니라, 알아봤자 이득이 없기 때문이었다. 19세기 이전만 해도, 서양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후진지역이었다. 그 이전만 해도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권이 세계경제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세계문화의 중심이었다.
세계적 석학인 안드레 군더 프랑크가 <뉴오리엔트>에서 밝힌 바와 같이, 19세기 이전의 약 400년 동안 중국은 세계무역의 중심지로서 마치 블랙홀처럼 세계 은(국제화폐)의 절반 정도를 빨아들였다.
세계 각국은 중국의 차·비단·도자기 등 고급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은을 싣고 중국으로 모여들었다. 이에 반해 서양은 중국에 마땅히 팔 만한 물건이 없었기 때문에, 세계의 화폐는 중국으로만 들어가면 밖으로 나갈 줄을 몰랐다.
또 도널드 라크와 에드윈 클레이가 1965년에 쓴 <유럽을 만든 아시아>라는 책에 따르면, 16~17세기에 유럽의 선교사·상인·선장·의사·선원·병사·여행자 등에 의해 수백 권의 아시아 관련 서적이 유럽의 주요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동양권의 문화 콘텐츠가 경쟁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병인양요 당시의 프랑스 군인들이 조선 서적을 탐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이전의 동양이 경제적·문화적 후진지역이었다면, 과연 위와 같은 일들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야구로 치면, 19세기 이전의 동양은 오늘날의 북중미 같은 지역이었다. 미국 메이저리그가 있는 북중미 같은 곳 말이다. 19세기 중반 이래로 서양이 군사적 우월을 배경으로 경제력의 역전을 이룩하기 전까지는 분명히 동양이 중심이고 서양은 주변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조선이 굳이 서양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을까? 서양에 마땅한 상품도 없고 또 우수한 문화도 없는데,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서양까지 찾아가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청나라 조정에만 가면 중국과 관계를 맺게 해달라고 사정사정하는 서양 ‘야만인’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런 서양인들의 모습이 조선인들의 눈에 어떻게 비쳐졌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메이저리그(중국)를 중심으로 한 동양이 세계의 중심이었고 조선은 메이저리그의 바로 옆에 있었는데, 무엇이 아쉬워서 저 멀리 서양에까지 가서 자신의 존재를 알릴 필요가 있었을까?
야심으로 가득한 캐나다 야구선수는 미국 메이저리그에만 진출하면 그만이다. 태평양 건너에 있는 저팬리그나 코리안리그에는 관심을 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는 한국·일본·대만 등 아시아 야구에서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갖지 않을 것이다. 아마 별다른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아시아 팬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하여 그를 ‘은자의 선수’라고 부를 수 있을까?
19세기 이전의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굳이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한성에서 조금만 가면 북경이 있고, 그 북경에만 가면 전 세계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다. 세계의 정보도 북경으로 모여들었다. 북경에만 가면 값진 상품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니 조선은 굳이 신천지를 찾아나서는 모험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모험이란 것은 15~16세기의 서양인들처럼 본래 아쉬운 쪽에서 하는 법이다.
세계의 중심인 중국을 바로 옆에 두고서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나선다면 그것은 효용성이 떨어지는 일이다. 그럴 시간에 중국과의 관계를 공고히 해두는 것이 조선에게는 더 이로웠던 것이다.
그에 비해 일본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달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 도발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일본인들은 언제나 ‘조선 때문에 중국과 제대로 교류를 할 수 없다’는 불만을 품고 있었다. 실제로도 일본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한민족의 훼방 때문에 중국과의 교류가 막히곤 하였다.
일본이 일찌감치 배를 타고 남쪽으로 진출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일본이 일찌감치 동아시아 이외의 지역에 널리 알려진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일본은 바로 옆에 중국을 두고도 그 중국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본은 일찍부터 서양에 알려지고 조선은 오래도록 서양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조선이라고 해서 해외진출의 중요성을 몰랐던 것은 결코 아니다. 조공무역의 횟수를 늘리려고 애쓴 점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조선은 국제무역의 필요성을 잘 아는 나라였다.
만약 중국과의 교류가 원활하지 못했다면, 조선도 일본처럼 원양 선박을 띄우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조선은 중국에 적당히 허리를 굽히는 대신 중국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어찌 보면, 조선만큼 중국을 잘 다루는 나라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조선이 무역 다변화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일정 정도는 비판을 받을 만한 일이다. 조선이 좀 더 넓은 바다의 세계로 눈을 돌리지 않은 것은 분명 잘한 일은 아니다. 중국이라고 해서 영원무궁토록 세상의 중심일 수는 없는 일인데, 조선은 중국이 쇠락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서양이 오늘날처럼 융성하지 않았던 당시 세계에서는 굳이 서양과 관계를 가질 필요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서양과 왜 교류하지 않았느냐?’고 힐책하는 것은 다분히 오늘날의 번영한 서양을 전제로 할 때에만 의미가 있는 일이다.
고향 캐나다와 미국 메이저리그 사이만 왕래하는 캐나다 출신 선수한테 “너는 왜 저팬리그나 코리안리그에 진출하지 못했느냐?”고 꾸짖는다면, 그 캐나다 선수는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먼 훗날 아시아 야구가 미국 야구를 능가하게 된다면, 그때는 그런 이야기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19세기 이전에 조선이 서양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은 그 시대로서는 전혀 나무랄 일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 크고 확실한 시장을 두고서,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별로 소용도 없는 미지의 땅으로 떠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서양이 동양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애쓰던 시기에 조선과 특정 서양국가가 서로 몰랐다면, 그 서양국가를 나무랄 일이지 조선을 나무랄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19세기 중반 이후로 동서양의 우열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동양을 바라보는 서양인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서양인들의 어깨에는 힘이 들어가고 목도 뻣뻣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서양의 우월성을 합리화하는 학문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만해진 서양인들은 자신들이 오래 전부터 동양보다 우월했었다는 착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세계사도 상당 부분 왜곡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양인들은 자신들의 우월성을 합리화할 만한 역사적 근거를 찾아내기 위해 ‘사실은 별로 대수로울 것도 없는’ 르네상스니 종교개혁이니 과학혁명이니 하는 것들로 역사를 포장하기 시작했다. 서양인들의 인종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서양 자연과학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대체로 그 시기를 전후해서였다.
1882년에 <조선, 은자의 나라>라는 책이 서양에서 발행된 것도 기본적으로 서양이 동양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기 시작한 이후의 일이었다. “조선은 왜 우리 서양에 알려지지 않았는가?”라는 오만하고 독선적인 물음에서부터 ‘조선은 은자의 나라’라는 결론이 도출된 것이다. 자신들을 중심으로 역사를 새로 쓰다 보니, 자신들이 잘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는 ‘미개’라는 레테르를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19세기 이전의 세계에서는 동양이 서양을 경제적·문화적으로 능가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는 조선이 굳이 서양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필요가 없었다. 조선은 경제적·문화적 중심지인 중국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기만 해도 얼마든지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래로 동서양의 우열이 바뀌면서 서양은 자신의 우월성을 합리화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과 거리가 먼 것들을 비하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서양이 이전에는 자신들보다 우월한 입장에 있던 조선을 ‘은자의 나라’라며 다소 비아냥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의 경제적·문화적 역전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19세기 후반의 서양인들이 조선을 은자의 나라라고 불렀다고 해서 그것이 특별히 수치스러운 일은 아닌 것이다. 세계의 중심권인 동양에 속해 있는 조선을 몰랐다면, 아쉬운 쪽은 조선이 아니라 서양이었다.
물론 19세기 이전의 조선이 비주류 세계인 서양에 대해서도 지식을 축적해 두었더라면, 19세기 이후의 변화에 좀 더 잘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중국 이외의 세계에도 눈길을 주었다면, 중국 말고 영국·러시아·프랑스·독일 등이 득세하는 세상에도 좀 더 잘 적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지만, 그렇지만 19세기 이전만 해도 세상이 그렇게 뒤바뀌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왜 서양을 몰랐느냐?”는 비판은 19세기 이후의 역사 변화를 잘 알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오늘날의 우리들도 먼 훗날 또 다른 세력에 의해 ‘은자의 나라’라는 비판을 받을지도 모른다. 미국 밖에 모르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혹시라도 훗날 이슬람권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날에는 ‘이슬람권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이슬람문화를 잘 모른다’는 이유로 또다시 그런 조롱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훗날 저승에서 그 광경을 목도한다면 얼마나 분통이 터질까? “저것들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며 소리치고 싶어질 것이다. “20~21세기에는 세계의 중심인 미국이나 유럽하고만 관계를 잘하면 ‘장땡’이었다!”고 외치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소용없는 일일 것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미래의 어느 이슬람 지식인이 <대한민국, 은자의 나라>라는 책을 쓸지도 모른다. 후손들에게 그런 불명예를 안겨주지 않으려면,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시야를 구미지역뿐만 아니라 이슬람권 등 제3세계로까지 확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