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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밤 신촌거리, 오랫만에 만난 친구들과 시덥잖은 잡담을 나누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내게 인사했다. 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후배 녀석이었다. 지난 1년 간 그 녀석이 '똥 배짱'을 자랑하며 세계를 누비고 있다는 이야기를 후배들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야아~ 반갑다. 그래 요새는 뭐하고 지내니? 학교 다녀?"
"요새 책 좀 쓰고 있어요. 스페인어 학원도 다니고 있고..."

같은 나이 또래 녀석들이 토익을 준비하고 대기업 인턴 모집에 대비한 자기소개서 쓰기에 열중하는데, 생뚱맞게 '책'이라니? 스페인어는 왜? 온갖 질문들이 쏟아져나왔다. 녀석은 자신이 여행을 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헛헛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12월 중순 나는 <어학연수 때려치우고 세계를 품다>라는 제목의 책 한 권을 받았다.

이제는 모든 대학생의 통과의례처럼 된 어학연수 나도 그랬다

 <어학연수 때려치우고 세계를 품다> 글 · 사진 김성용 '21세기북스' 출판
<어학연수 때려치우고 세계를 품다> 글 · 사진 김성용 '21세기북스' 출판 ⓒ 이경태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나는 그 녀석의 웃음이 헛헛했던 까닭을 알 수 있었다. 후배는 385일 동안 세계 24개국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많이 앓은 뒤에 돌아왔다. 그런데 선배라는 작자는 냉소적인 표정으로 왜 그러고 있냐라는 식으로 물어봤으니….

사실 이제 대학생들 사이에서 어학연수나 배낭여행을 고민하지 않은 이들이 있을까? 배낭여행은 '낭만'에 기초하고 어학연수는 '현실'에 기초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특히 어학연수는 사회 진출 전 통과의례처럼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나도 그랬다. 군 전역을 하고 3개월을 꼬박 어학원을 다니며 기초 영어 체력을 다진 뒤 캐나다로 건너갔다. 어설프게 혀를 꼬아가며 영어를 해댔고 귀국하기 1달 전에는 특별히 토익 수업을 들으며 '전투준비'를 했다. 숲이 우거진 밴쿠버의 공원에서 조깅을 하며 잡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난 할 수 있다"를 되뇌었고 책상 앞에는 마치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처럼 나의 미래를 적은 종이를 떡 하니 붙여놓기도 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이 책을 쓴 후배 김성용의 삶도 그리 나와 다르지 않았다. 

"피 튀기는 취업전선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나를 무장해야 했기에 <대학내일> 학생리포터, 영삼성 열정 운영진 1기, 마포공동체라디오 DJ 등등의 활동에 전념하며 나를 상품화시키는 데 경주했다. 그렇게 내 이력서를 한 줄씩 늘려가는 재미가 한창일 즈음 한 장의 세계지도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어학연수 때려치고 떠난 배낭여행은 그의 삶을 다시 설계했다

 SDaS 학생들과 저자 김성용. 저자는 "피 튀기는 취업전선에서 살아남기 위해 날 무장하는데 주력했던 내가 SDaS 덕분에 왼쪽 날개의 존재를 알게 됐다"고 고백했다.
SDaS 학생들과 저자 김성용. 저자는 "피 튀기는 취업전선에서 살아남기 위해 날 무장하는데 주력했던 내가 SDaS 덕분에 왼쪽 날개의 존재를 알게 됐다"고 고백했다. ⓒ 김성용


그러나 현실을 도외시한 낭만은 환영받지 못하는 법이다. 염려하는 부모님을 설득해 배낭을 메고 떠난 후배도 결코 현실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영어실력 향상'이라는 작은 목표를 넘어 자신의 삶을 다시 설계하는 경험을 쌓고 왔다.

후배는 우선 미국 일리노이주 얼바나샴페인에 있는 SDaS(School For Designing a Society)에서 자신을 수련했다. 애초 "미국인 교수가 미국인 학생을 상대로 진행하는 '삐딱한 수업'을 듣고 싶었던 그는 3개월 후 그 수련과정을 '사상앓이'라고 표현했다. 

"SDaS 수업은 전체적으로 반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이 그 기저에 깔려있다. 덕분에 난 25년 평생 오른쪽 날개만 죽어라 퍼덕였던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SDaS는 내게 왼쪽 날개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대학 3년 동안 그 무엇도 내게 이러한 사상적, 근원적 실험을 부추기지 않았다. …(중략)…'취업 대란'에 의해 "어쩔 수 없잖아"라며 그 어떤 변혁의 시도도 거세당한 채 사회가 요구하는 것만을 갖추며 자신을 상품화하는 데 급급할 수 없는 젊은 보수주의자들. 그 중의 하나가 나였다."

'사상앓이'를 겪은 후배의 여행은 내가 보고 들었던 누군가들의 여행과는 달랐다.

보는 눈이 달라진 만큼 후배는 백악관이 아닌 백악관 앞에서 81년부터 평화운동을 펼치는 운동가를 봤고, 쿠바에서는 체게바라가 상품화되어가는 낡은 혁명국을 발견했다. 또 터키와 페루·이탈리아에서는 2~3주씩이나 워크캠프에 참여해 고아원을 돕는 등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다.

더불어 젊음을 불태우기도 했다. 콜롬비아에서 만난 라티노들과 밤의 열기를 불태우기도 했고, 유럽에서 맞아주는 낯선 친구들의 생생한 가이드를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영어는?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람과 부대끼는 동안 그는 미국의 지역 라디오 DJ로 활동할 만큼 성장했으니깐.

남 달랐던 그의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저자 김성용은 ""게릴라와 납치범들만 가득하다"라는 콜롬비아에서 오히려 세계 최고로 유쾌하고 열정에 넘치는 라티노들을 만났다"고 말했다
저자 김성용은 ""게릴라와 납치범들만 가득하다"라는 콜롬비아에서 오히려 세계 최고로 유쾌하고 열정에 넘치는 라티노들을 만났다"고 말했다 ⓒ 김성용

책을 덮고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에필로그를 통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사회초년생과 사회초년생이 되기 위해 생의 기운을 잃어버린 이들이 뿜어내는 답답한 한국냄새에 세계를 품었던 내 가슴이 좀 먹는다"며 살짝 불안감을 드러내던 그에게 격려도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긴 여정을 돌아온 그에게 못 했던 질문을 하고 싶었다.

"잘 읽었다. 그런데 후회하진 않니? '토익'이나 '취업'을 준비하지 않은 것 말야."

"단순히 토익성적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여행을 통해서 외국인과 서로 의견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외국어 실력이 진짜 실력인 것 같아요. 그래서 혹시나 대학 후배들 중 어학연수를 고민하고 있다면 한번 나처럼 여행을 하는 것도 괜찮다고 권유하고 싶어서 책도 썼어요. 그리고 책이란 '기록'을 통해서 앞으로의 내 삶에 대한 책임감도 가지게 됐고요."

결국 그에게 이 책은 어제의 열정과 패기의 산물이자 내일의 방향타가 된 셈이다. 그리고 어학연수를 고민할 다른 젊은이들에게 남 다른 방향을 보여준 셈이다. 긴 여행을 마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남 다른'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아마 이 책을 읽은 이들도 그가 알려준 '진짜 여행', '진짜 공부'의 팁들에 열렬한 박수를 보낼 것이다.


어학연수 때려치우고 세계를 품다 - 말문이 터지고 세상이 보이는 385일 배낭여행

김성용 글 사진, 21세기북스(2007)


#어학연수#배낭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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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입사. 사회부·현안이슈팀·기획취재팀·기동팀·정치부를 거쳤습니다. 지금은 서울시의 소식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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