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골의 긴 겨울밤은 아득히 잠들어 있고날이 새려면 아직 두어 시간 남짓이다. 짙은 먹빛의 돌산과 어슴푸레한 하늘만이 산과 하늘의 경계를 확연히 갈라놓은 이른 새벽녘. 밤새 내리던 빗줄기가 차차 잦아들더니 희끗희끗한 눈발만이 매섭게 흩날린다.
따뜻한 날씨 탓에 서라벌에서 겨울눈을 맞이하기란 가뭄에 콩 나듯 드문 일이다. 눈 덮인 산을 오르는 건 여러모로 힘들고 번거롭지만, 부처님을 찾아뵙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이기도 하다. 새 하얀 눈꽃 속에 홀로 자비로운 미소를 떠올리니 찾아가는 걸음걸음이 한결 가볍고 설렌다.
칠불암 등산로가 시작되는 통일전주차장의 새벽은 희뿌연 가로등 불빛만이 간신히 어둠을 밀어낸다. 고깔모자에 마스크와 목도리까지 온 몸을 빈틈없이 동여매도 옷깃을 파고드는 동장군의 기세를 한풀 꺾을 도리는 없다. 귓전을 윙윙대는 사나운 바람소리에 질려 몸은 자꾸만 안으로 한껏 움츠러들 뿐이다.
은은한 달빛 한 줄기가 빛을 드리운다. 주변에 달리 불빛이 없어 달빛은 더욱 맑고 밝다. 자주 오가는 길이건만 어두운 밤길이라 그런지 발끝에 부딪치는 나뭇가지나 돌부리에도 식은땀이 흐르고 등골이 오싹하다. 동 남산의 깊은 가슴 속, 봉화골(烽火谷)의 긴 겨울밤은 아직 아득히 멀고 고요히 잠들어 있다.
차가운 바위에 새겨진 일곱 부처님의 따뜻한 마음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 시간 정도 왔을까? 날은 벌써 저만치서 환하게 밝아온다. 지난 밤 어둠 속에 잠들었던 산과 나무들이 갖가지 고운 자태를 골골이 뽐내기 시작한다. 죽어가던 해가 다시금 생명을 얻고 되살아나는 동지가 조금 지난 초겨울 무렵이다.
언덕길을 내내 오르내렸더니 어느새 숨은 턱밑까지 차오른다. 산비탈에 켜켜이 쌓아올린 무심의 돌층계 사이로 하늘로 솟은 소나무들이 구불구불 끝도 없이 이어진다. 길의 끝 가파른 바위산의 허리에 동 남산 최고의 불적, 칠불암(七佛庵)이 웅대하다.
먼 산에 곱게 내려앉은 간밤의 잔설이 투명한 아침햇살에 더욱 반짝거린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암자를 찾는 발길은 뜸하지만, 야외에 마련된 법당 앞 작은 마당은 벌써 부지런한 손길로 말끔하게 단장되었다.
칠불암 유적 주위로 커다란 난간이 둘러쳐 있어 부처님의 온기를 가깝게 느낄 수 없다. 마당 한쪽에 웃자란 나무그늘에 기대어 사방불에 가려진 본존불의 미소를 한참 동안 바라본다. 눈 쌓인 마당을 쓸어내던 보살님의 엄한 꾸중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용기를 내어 부처님께 한 발짝 다가섰다.
병풍바위에 돋을새김 한 삼존대불은 중앙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手印)을 맺은 본존여래를 두고, 그 좌우로 연꽃과 정병을 든 보살상을 세웠다. 간혹 이 삼존대불을 아미타삼존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앞에 놓인 사방불과의 상호관계를 고려하면 석가여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불보살의 굳게 다문 입술에서 풍기는 근엄함은 박제된 듯 경직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온 몸을 감싸 흐르는 유쾌한 옷 주름과 잘록한 허리를 내민 삼곡(三曲)의 앙증맞은 보살상이 미완의 삼존대불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아담한 연꽃 모양의 탐스런 두광에서 중생을 향한 부처의 소박한 마음이 밝게 빛난다.
하늘 신(神)의 성산(聖山)으로 이르는 마음의 문(門)칠불암에서 잠시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해는 벌써 떠올라 먼 산자락을 붉게 물들인다. 서둘러 가파른 암벽능선을 타고 신선암으로 빠른 걸음을 옮겼다. 동이 터 솟아오른 햇살이 가장 먼저 고운 빛을 내어주신 땅, 서라벌의 수줍은 아침이 살며시 얼굴을 내민다.
동 남산 열여섯 골짜기의 옅은 개울물은 저마다 남천(南川)의 푸른 강물로 모여들었다. 차고 시린 겨울 강바닥 아래 신의 성전을 향해 달려가는 거룩한 산들의 질주가 마치 한 폭의 비단을 풀어헤쳐놓은 듯 시원하고 장엄하다.
예로부터 남산은 하늘 신과 인간의 염원이 맞닿은 소통의 성산(聖山)이었다. 불가(佛家)의 신(神)이 남산의 억센 바위에 고이 잠들고부터 서라벌의 옛 사람들은 오래도록 하늘 신을 잊은 듯했다. 그러나 그들의 간절한 바람은 끝도 없이 치솟은 바위산을 타고 지금껏 높다란 하늘로 내내 이어지고 있다.
멀리 토함산연봉에서 불붙은 햇살이 불그레한 볼을 부비며 하늘 신의 성산(聖山)을 흔들어 깨운다.
태초의 바윗덩이에 투명한 아침햇살이 부딪치자 억센 돌산은 온기를 머금고 한차례 살아 꿈틀거린다. 맑은 금빛으로 빛나는 32상의 미묘한 금색상(金色相)이 거룩한 돌부처에 장엄되는 순간이다.
서라벌의 옛 사람들이 신에게 이르던 길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닫힌 적이 없는 적멸의 시간에 마음의 열쇠로 열리는 무문(無門)의 문(門) 너머에 있다. 그 내밀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자가 지난 천년의 세월 동안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거룩한 동지의 빛이 하늘 신의 성산에 반짝인다. 신에게 이르는 적멸의 문은 남산의 태산준령을 가로지르더니 쪽빛 푸른 하늘에 그려지다 마음 속 점점 잠기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