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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 자당 기거지 풍경 아름다운 마을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충무공 자당 기거지 풍경아름다운 마을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 전용호

여수시청을 지나 구여수로 가는 해안도로를 가다 보면 웅천동 송현마을이 있다. 도로를 사이로 바닷가 마을과 산아래 마을이 나누어 자리하고 있다. 마을입구에는 ‘충무공 자당 기거지’라는 커다란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며칠간 춥더니 날씨가 무척 따뜻하다. 마을 입구 탱자나무 울타리가 마을 안내를 하고 있다. 마을 이름만큼 아담하고 평온한 마을이다. 벽면을 파란색으로 칠한 담장에는 ‘이충무공 어머님 사시던 곳’을 50m 더 가라는 친절한 안내를 한다. 좁은 골목을 따라 올라가니 대문 없는 집이 나온다.

자당 기거지 오래된 나무아래 오래 되었음 직한 집이 자리하고 있다.
자당 기거지오래된 나무아래 오래 되었음 직한 집이 자리하고 있다. ⓒ 전용호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할아버지는 빨래를 널다 민망한 웃음을 짓는다.

“구경 좀 해도 돼요?”
“볼 건 없고 집밖에 없는디…”


할아버지는 마침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반갑게 맞으며, 집안 내력을 설명해 주신다.

“큰길에 표지판을 세워놓으니 사람들이 뭐가 있는 줄 알고 들어오는데 볼 건 없어. 이 집도 100년 전에 지은 거고 임진왜란은 400년도 더 지나슨께. 원래 이순신 장군 어머님이 계셨던 집은 저 장독대 뒤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 14대 할아버지가 사셨을 당시 이순신 장군 어머니가 5년간 피난 와서 살았는데 잘 모셨어. 당시 할아버지도 전쟁 때 나가 싸우다가 돌아가시고 저 건넛마을 오충사에 모셔져 있재.”

간략하지만 이해가 쉽게 설명을 해주신다. 역사가 있는 집터라는 자부심과 함께 집안 선조들을 자랑하는 것이 즐거우신가 보다.

옛 집터를 알리는 표지석 집 입구 들어서면 장독대 뒤로 주 생활공간에서 벗어난 좁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옛 집터를 알리는 표지석집 입구 들어서면 장독대 뒤로 주 생활공간에서 벗어난 좁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 전용호

장독대 뒤에는 ‘이충무공모부인초계변씨유적비(李忠武公母夫人草溪卞氏遺蹟碑)’가 있고 ‘이충무공 자당 기거지’라는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에는 "이충무공께서 1591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시어 좌수영 본영에 근무한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1592~1597) 충청도 지방이 전란에 휩싸이자 모친(草溪卞氏夫人)을 웅천동 송현(일명 : 古音川) 마을 정대수(丁大水, 忠貞公) 장군댁으로 모셔와 전란 중에도 어머님께 아침저녁 문안 드렸던 곳으로 이충무공의 효심이 깃든 충효의 장소이다"라고 알려주고 있다.

이충무공은 왜 어머님을 이곳으로 모셨을까? 의문이 생긴다. 좌수영 본영에 모셨으면 6킬로가 넘는 길을 매일 문안인사차 이곳까지 오는 수고를 덜 수 있었을 텐데. 번잡한 군영 가까이 모시는 것보다는 평화로운 마을 풍경과 함께 효심이 극진한 정대수 장군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런 결정을 하지 않았나 싶다.

집 뒤로 늙은 나무만이 옛날부터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이나 하듯 지키고 있다.

집 구경 기둥과 창살이 아름답다. 평상 밑으로 어구들이 있다.
집 구경기둥과 창살이 아름답다. 평상 밑으로 어구들이 있다. ⓒ 전용호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집 지붕에 생선을 말리고 있다.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집지붕에 생선을 말리고 있다. ⓒ 전용호

100년 전에 지었다는 집은 못을 쓰지 않고 끼워서 만들었단다. 건축을 모르는 내가 봐도 상당히 멋을 낸 집이다. 중간에 기둥은 팔각으로 세웠고 문살은 육각형 문양을 내었다. 맞은편으로는 창고로 씀직한 건물이 있고 지붕에는 생선을 말려놓았다. 할아버지가 직접 앞바다에 나가 잡아다가 손질해 놓은 거란다.

집 풍경 설명을 끝낸 할아버지는 구경하라고 자리를 피해 주신다.
집 풍경설명을 끝낸 할아버지는 구경하라고 자리를 피해 주신다. ⓒ 전용호

만약,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면, 현재 있는 집이 옛날 기거지로 잘못 알았을 테고, 남의 빈집을 기웃거리는 어색한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었을 것인데….

“이렇게 구경 오면 귀찮지 않으세요?”
“그런 건 상관없는데, 볼 것이 있어야지. 시청에서 개발은 한다고는 하는데, 말만 하지 개발을 안 해. 길가에 표지판을 떼어내 버리든지 해야지.”


할아버지께서는 많은 사람이 찾아오지만 보여줄 게 없는 것에 대한 시청의 행정에 못마땅한 심정을 토로한다.

송현에서 웅동마을로 가는 농로 길 따뜻한 겨울이 물씬 묻어나고 있다.
송현에서 웅동마을로 가는 농로 길따뜻한 겨울이 물씬 묻어나고 있다. ⓒ 전용호

길 주변 풍경 멀리 아파트가 있는 시내가 보인다.
길 주변 풍경멀리 아파트가 있는 시내가 보인다. ⓒ 전용호

마을을 돌아 나와 할아버지가 말한 오충사로 향했다. 6차선 도로 옆으로 농로가 있다. 추수가 끝나고 겨울 향기가 물씬 풍기는 논두렁 옆으로 난 길은 도란도란 걷기에 너무나 좋다. 길이 끝나는 곳에 햇볕을 가득 맞으며 웅동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오충사 전경 탱자나무 울타리가 정겹게 느껴진다.
오충사 전경탱자나무 울타리가 정겹게 느껴진다. ⓒ 전용호

오충사(五忠祠) 잘 단장되어 깔끔한 느낌이 든다.
오충사(五忠祠)잘 단장되어 깔끔한 느낌이 든다. ⓒ 전용호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오충사가 보인다. 입구에는 효행비들이 시위하듯 지키고 있다. 대문은 굳게 닫혔있다. 담장 옆으로 살림집이 있고, 그 사이로 돌아 들어가는 문이 있다. 찾는 사람이 드문지 사당 입구는 빨래 건조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사당내부도 문이 잠겨 있어 안을 볼 수 가 없다. 아쉽기만 하다. 안내하는 누군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허전한 마음을 뒤로 하고 나왔다. 바짝 마른 양지 녁에는 광대나물이 봄을 오라고 시위를 하고 있다.

오충사(五忠祠)

오충사는 원래 가곡사(佳谷祠)라 하였는데, 현종 13년(1847) 이순신 장군을 따라 종군하다가 전사한 정철(丁哲)에게 나라에서 충절공이란 시호를 내린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이후 충의공 정춘(丁春), 충숙공 정린(丁麟), 충정공 정대수(丁大水)의 4위(四位)를 함께 모셔 사충사(四忠祠)라 하였으나, 1864년 대원군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오충사라 이름한 것은 1921년 웅천동에 사우를 다시 세울 때 충무공을 주벽으로 모시고 기존의 4충신을 배향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현재 오충사 건물은 1938년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철거된 것을 1962년 복원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5칸 단층 팔작지붕이며, 이외에 신당(神堂), 강당(講堂), 재실(齋室) 등의 건물이 있다. 매년 봄·가을(음력 3.16, 9.16)에 본향 유림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안내판에서)

오충사를 내려다 본 풍경 마을을 지나 바다가 보인다.
오충사를 내려다 본 풍경마을을 지나 바다가 보인다. ⓒ 전용호

잘 알려지지 않는 유적지를 찾아가는 관광객이라면 화려하거나 웅장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 자유롭게 보고 느낄 수 있는 정도면 만족한다고 할까? 시청에서는 그곳에 문화유적이 있음을 알려줄 때에는, 남의 집을 들어가는 민망함이나, 닫힌 문틈 사이로 혹시나 하고 들여다보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배려가 있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 여수시내에서 웅천방향으로 향하면 오충사와 이충무공자당기거지 표지판이 보인다.



#이충무공 자당 기거지#오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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