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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한테 문자가 왔다. 퇴근해 돌아와 보니 애지중지 키우던 애완견이 뒤란 추녀 끝에서 모로 누워 숨져 있더란다. 성격이 명랑하고 붙임성이 좋아 집에 온 손님한테도 엉겨붙으며 좋다고 난리를 쳐대 누구한테나 예쁨을 받던 놈이다.

 

건강한 놈이 갑자기 죽었다는 문자가 왔으니 놀랄 수밖에. 마침 동생과 조카 그리고 딸아이와 함께 있던 자리여서 얼른 구석으로 뛰어가 전화를 했다.

 

"아니, 기쁨와가 어쩌다 그렇게 됐니?"

"이틀 전부터 비실비실 했는데도 회사 일이 바빠 병원에 데려 갈 새가 없었어. 오늘 퇴근해서 문을 열었는데도 나타나질 않아 놀라서 찾아봤더니 집 뒤 추녀 끝에 쓰러져 꼼짝않는 거야."

 

후배는 그 녀석의 죽음이 제 책임인 것 같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아픔을 견디다 못해 목숨을 놓은 녀석, 어찌 심상한 마음으로 수습할 수 있을까. 후배는 녀석의 주검을 보듬고 얼마나 슬퍼했는지 목소리까지 잠겨 있었다.

 

우리 집 몽이와 비 강아지를 키워보지 않은 내 동생에겐 "그 놈의 개새끼"
우리 집 몽이와 비강아지를 키워보지 않은 내 동생에겐 "그 놈의 개새끼" ⓒ 조명자

 

전화를 끊고 나도 너무나 마음이 안 좋아 시무룩하게 있는데 동생과 딸이 놀란 표정으로 아는 사람이 죽었느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여차저차 설명을 했더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구동성으로 나를 몰아세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이고, 나는 또 아는 사람이 잘못됐나 해서 깜짝 놀랐네. 그까짓 강아지 새끼 죽은 것 같고 그 야단을 하다니 어이가 없어서…."

 

그렇지. 개를 한 번도 키워보지 않은 동생이 그런 마음을 이해하기는 불가능하겠지.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질책하는 동생한테 강아지를 키우다 보면 개가 짐승이 아니라 가족처럼 느껴진단다. 듣거나 말거나 내 혼잣소리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눈밭 속에 몽이와 비 우리 집 개차반 몽이와 비, 그래도 나한테는 "아이고 내 새끼"
눈밭 속에 몽이와 비우리 집 개차반 몽이와 비, 그래도 나한테는 "아이고 내 새끼" ⓒ 조명자

 

후배도 애완견을 키우는 걸 그닥 좋아하던 사람은 아니었다. 죽은 녀석을 키우게 된 계기도 자발적인 입양이 아니라 거의 떠밀리다시피 맡게 된 것이었다. 그 녀석을 키우던 주인이 하던 일이 안돼 자신의 거처도 불투명한 바람에 반강제로 녀석의 부양을 떠맡겼다던가.

 

전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녀석, 초롱초롱한 녀석의 눈망울을 바라보자니 차마 거절 할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시작한 동거였는데 키우다 보니 감정을 가진 동물과의 생활이라 절로 정이 드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귀가를 반기며 그 어떤 식구가 그렇게 온 몸으로 기쁨의 세리머니를 퍼부으며 애정표현을 하겠는가. 사랑을 주는 몇 배로 그 감사함을 표현할 줄 아는 동물. 미움도 원망도 모르고 오로지 받는 만큼의 고마움만 간직할 줄 아는 순수함.

 

살아있는 동물을 키우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행복이다. 가족이 있어도 친구가 있어도 어쩔 수 없이 문득문득 밀려오는 외로움과 고립감. 자식들이 장성해 모두 떠나버린 노인들은 물론 부모형제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에게도 정을 나눌 수 있는 동반견은 크나큰 위안이 될 수밖에 없다.

 

작은 행복을 느끼게 하고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면 그것이 사람이면 어떻고 동물이면 어떠하며 또 뜰 한 구석을 차지하는 예쁜 꽃이나 산이나 들, 자연이면 어떠리. 사람에게 집착하고 사람에게 상처를 받으며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애증관계. 그 질긴 실타레를 느슨하게 하는 방법은 사람이 아닌 생물과 무생물에게 곁을 주는 것 밖에 없지 않을까?

 

녀석과의 이별에 가슴 아파하는 후배를 보자니 20여 년 전에 "별 꼴이야"를 연발하며 어떤 사람을 비웃던 일이 생각났다. 지인의 선배 이야기인데 어느 대학 학장이셨던 부부 이야기다.

 

자식이 없던 그 부부는 오래 전부터 애완견 한 마리를 자식처럼 키우고 있었단다. 그런데 열다섯 살 먹은 그 애완견이 노환으로 자연사를 했는데 그 죽음을 놓고 부부가 어찌나 슬퍼하는지 곁에서 지켜보기가 민망 할 정도였다나.

 

애통함 속에 자식 같은 애완견의 장례를 치른 학장님 부부. 검은 정장에 검은 넥타이까지 찬 모습으로 정성을 다해 애완견을 묘지에 묻어주고 눈물을 감추지 못하더란다. 그 광경을 본 후배들 강아지새끼 한 마리 죽은 것 같고 그처럼 애통해 하는 선배가 어처구니 없었지만 그 애절한 모습에 마음 놓고 구박도 못 하겠더란다.

 

그래서 농담삼아 선배가 저렇게 슬퍼하는데 우리가 가만 있을 수 있냐? 조의금이라도 걷어 선배 위로 좀 해주자고 하며 거금 10만 원을 조의금으로 걷어 주었다던가.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시대만 하더라도 시골 집에서 자식들 영양보충 시키려는 목적으로 똥개를 키우던 시대였다.

 

주인을 보고 꽁지가 빠지도록 좋다고 난리를 치는 황구를 제 자식 보신시킨다고 때려잡던 낯익은 풍경들. 그땐 그것이 그렇게 야만적이고 잔인하다는 생각을 못 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때였으니 사회 지도층이라는 인사가 애완견 갖고 그렇게 '유난벌떡'을 떨었다는 사연이 어떻게 조롱감이 되질 않았겠는가.

 

가족처럼 아끼던 애완견을 떠나보낸 슬픔에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이웃들. 몇 년 전, 6년간 키우던 강아지를 저 세상에 보내고 몇 달 동안이나 가슴앓이를 하고 보니 저절로 이해가 갔다.

 

가족이나 사회 공동체나, 갈수록 삭막해지는 관계 속에서 정붙일 곳을 찾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 곁에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동물들이 있다고 생각해 보라. 상처받은 영혼에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는가.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인터넷한겨레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애완견#동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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