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질구질한 인연, 바닷길 건너서조차 이어져 조선족 민속촌에서 서성대기를 몇 시간이 흘러 우리는 다시 백두산 행 채비를 서둘렀다. 백두산(白頭山) 연변 조선족 자치주 남부와 북한 량강도 경계. 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 칭하며, 중국 최대의 자연보호구로 지정된 곳. 한때 내 가슴을 뛰게 했던 그 신령스러운 산. ‘민족의 영산’이라는 다 닳아버린 비유가 여전히 여행 가이드북 어느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는 그 산은 애초에 나의 여행계획에는 없었다. 처음 똘이 엄마네 집을 들릴 때만 하더라도 내심 동북삼성이 아니라, 북경에서 열차를 타고 서안을 지나 티베트 라싸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마치 의무감처럼 내 마음 한 곳에서 자꾸 나를 잡아끌었다. 뜻하지 않은 박 선생님의 동행과 천진에서의 오랜 친구들과의 만남이 나를 이번에도 역시 라싸에서 멀어지게 했다. 어쩌면 지금 생각하면 산허리를 동강내고, 끝없이 이어지던 초원들을 무참히 잘라내 버렸다던 칭장철로에 내 여정의 로망을 걸었다는 것에 대한 누군가의 분노였을지도 모른다. 계획에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여행을 가는 것이 어쩌면 습관이 아닌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유랑하는 자는 영원히 유랑하게 되어있다는 누군가의 넋두리처럼 한국에서 구질구질 이어지던 인연이 바닷길을 건너서조차 끊어지지 않는다. 한국에 돌아가면 이주노동자 활동도 접고, 새터민 활동도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여행이 막바지에 접어들수록 마음이 복잡해져갔다. 이제 한 곳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려야할 시기가 되었는데 나는 아직도 영원히 시행착오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한 채 푸념 섞인 일상을 자학하고 있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온 거, 백두산에 올라 기도나 드리고 가자. 하늘 가까운 곳에 가면 내 마음 속의 짐을 하나라도 덜어낼 수 있을지 모를 일이잖아. 천지에서의 기도를 다짐하며 달리는 차에 그냥 몸을 맡기기로 했다. 졸린 눈을 겨우 비비며 차창에 기대어 생각해보았다. 그랬다. 백두산은 똘이 하고 길이가 한국으로 넘어오기 전 마지막으로 다리가 불편한 석삼촌을 등에 업고 천지까기 갔다고 한 바로 그 산이다. 메콩강 쾌속보트를 타고 국경을 넘는 계획을 성사시키기 전 똘이하고 길이가 교대로 석삼촌을 업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함박 웃음이 가득한 그들의 아련한 흑백사진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이 일대도 똘이와 길이가 7년 전에 숱하게 넘어왔고 잡혀갔던 그 현장들 중 한 곳이기도 하다.
백두산에 오를 때는 단단한 인내심 가져야 백두산 입구에서 내가 처음 마주한 것은 역한 냄새가 가득한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화장실은 대소변 가릴 것 없이 칸막이가 없다. 중국 각 지에서 이런 화장실을 보면서 단지 특이하다고만 생각했을 뿐, 그들의 이런 화장실 문화가 저질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런데 백두산입구에서의 이런 화장실에 나는 까닭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산뚱성, 화북성을 지나 요녕성 길림성으로 접어들면서 내가 마주했던 산과 계곡, 숲과 나무들, 농촌의 풍경이 분명 중국 것이 아닌 한국의 그것과 너무 닮아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우리 산 백두산에 와 있다는 기약 없는 집착 때문이었을까? 화장실은 나에게 ‘어차피 백두산에 오려고 하지 않았잖아. 기분 좋아질 일 없으니 여기서 그냥 돌아가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백두산에 올라가려는 관광객들은 입구에서 기다리는 사람, 차를 주차하는 사람, 주차장과 광장에서 서성대는 사람만 어림잡아 오천 명은 족히 되어보였다. 얼굴 생김새와 옷차림 그리고 말투를 보아하니 중국 남방계의 사람들이 꽤나 많이도 와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 백두산행 티켓을 구했다. 백두산에서 정상으로 가는 지프차를 타는 곳까지 요금 징수, 지프차를 타는 데에 또 다시 요금 징수다. 그리고 또 백두폭포, 소천지까지 가는 데 요금을 징수한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화를 참을 각오로 단단히 인내심으로 무장하고 백두산에 들어가야 하리라. 우리나라의 영토였다는 지리적 박탈감보다는 우리 민족의 기운이 시작되는 곳에서 숨통을 조이는 영혼의 침입자라는 생각에, 곳곳에 불도저식으로 관광지를 만들어버린 누군가의 무참한 행위에 산뜻한 마음으로 백두산에 오르기가 쉽지가 않다. 백두산 여행은 분명히 등산 코스가 아닌, 놀이동산 관람과 같은 것이었다. 기다란 아동용 열차가 천지로 들어서는 길목까지 관광객을 실어가고, 거기에서부터 또 다시 100대의 지프차가 곡예주행을 하며 궁궁을을 천지까지 ‘친절한’ 안내로 완벽하게 마무리해준다. 거대한 국립공원 백두산은 그렇게 천지, 소천지, 백두폭포, 백두산 온천, 지하삼림 등 코스별 놀이기구가 준비된 거대한 위락시설이 되어버린 듯 했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 한국 다큐멘터리에서 자주 보았던 장면들을 떠올리며, 무언가 영험한 곳에서 신령한 춤사위로 오르기라도 한 듯 기적 같은 시구를 뿜어댄 누군가가 떠오르자 심하게 배신감이 들기 시작했다. 여기 어느 곳에 그런 신령스런 입산을 육감으로 체현케 할 그 무엇이 남아있다는 것일까?
영험함 사라진 백두산에는 따뜻한 이야기가 흐르고 하지만 세상 만물엔 다 교묘한 이치가 있는 법. 이렇게 백두산 입산이 쉬웠기에 똘이와 길이가 다리가 불편했지만 제법 몸무게가 나갔던 석삼촌을 업고 왔으리라. 나 역시 아무 생각없이 이곳에 왔다. 고급 랜드크루저를 타고 차마고도를 촬영하고선, 칭장철로가 들어서면서 환경이 파괴되는 것을 걱정하는 어떤 기행자의 모순을 저지르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래서 난 영험함이 사라진 백두산 입산 대신, 똘이와 길이가 들려주었던 가슴 따사로운 이야기들에 더 고마운 마음을 가지기로 했다. 하지만 백두산을 향한 원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내 영혼에 상처를 낸 지난날의 내 실수에 대한 속절없는 칭얼거림일 수도 있겠지만…. 천지는 바람의 노래와 구름의 빛깔로 뒤덮여 있었다. 천지를 분명하게 조망할 수 없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어렴풋이 속살을 드러낸 천지엔 천년 묵은 이무기도, 백 미터짜리 괴물도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천지를 뒤덮었다고, 둘레가 15km에 이른다고, 수심이 400여 미터에 달하는 곳이 있다고 신령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 산이 그렇게 신령스럽다면 산 밑에서 우리 동포들은 왜 서로 점점 원수가 되어 가고 있는가? 왜 북한 동포들은 조선족(재중동포)들을 증오하고, 재중동포들은 남한 동포들에게 한을 품고 있는가? 나는 까닭 없이 백두산을 원망하였다. 그리고 10년간의 내 방황, 그리고 그 속에서 상처를 주거니 받거니 했던 재중동포, 북한동포들을 떠올렸다. 백두산, 이곳이 내가 찍는 바닥 지점이 되었으면 좋겠어! 내 안에 이미 갈기 갈기 조각난 헤져버린 희망의 천조각들을 다시 이어 맞추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동안을 또 다시 몸부림쳐야 할까?
현기증이 일어났다. 서둘러 기도를 마치고 내려가야겠다. 마침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진다. 백두산의 소리다. ‘너 같은 녀석에게 그런 원망 듣고 싶지 않으니 썩 내려가라’고 한다. 잿빛 봉우리 하나를 발견했다. 떨어지는 빗방울에 내 영혼을 잠시 기대어보았다. 길을 잃은 자는 미련하게 백두산에서 화풀이를 했다. 웬만해선 천지가 나를 다시 부를 것 같지 않다. ‘아버지! 저에게 긍휼의 마음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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