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을 찾아서
포항에서 아침식사를 한 다음 다시 7번 국도를 타고 경주 방향으로 달린다. 강동면 오금리 삼거리에서 28번 국도를 타고 서쪽으로 가면 안강·영천이 나오고, 남쪽으로 7번 국도를 타면 경주가 나온다. 우리는 28번 국도를 잠깐 타다 우회전해 지방도를 따라 양동마을로 향한다. 안계 저수지에 가기 전 다시 오른쪽으로 빠지면 그렇게 높지 않은 언덕에 자리 잡은 양동 민속마을을 만날 수 있다.
양동마을은 중요 민속자료 189호로 건축과 유적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이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양대 문벌이 공존하는 동족마을로 비교적 큰 양반 가옥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다. 종가일수록 기와집으로 높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중·후기 양반들의 주거생활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마을이다.
집들의 기본구조는 대개 ㅁ자나 ㄷ자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두 개의 ㄱ자가 엇갈려 배치된 튼 ㅁ자형 가옥도 있고 一자형 가옥도 있다. 양동마을에 있는 집의 배치나 구성은 영남지방 가옥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중 대표적인 건물이 서백당(書百堂), 무첨당(無忝堂: 보물 제411호), 향단(香壇: 보물 제412호), 관가정(觀稼亭: 보물 제442호)이다. 이들 외에도 심수정(心水亭), 경산서당(景山書堂), 두곡고택(杜谷古宅) 등 많은 건물들이 상당한 문화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서백당(書百堂)은 경주 손씨의 종가로 유명하고, 무첨당(無忝堂)은 여강 이씨의 종가로 유명하다. 무첨당은 경주 손씨 입향조인 손소(孫昭: 1433-1484) 선생이 사위인 이번(李蕃)에게 지어 준 건물이다. 이번은 손소의 큰 딸과 결혼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을 낳았다.
향단(香壇)은 1453년 경 회재 선생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중종 임금이 어머니를 모실 수 있도록 지어준 집이다. 두 개의 중정(中庭)을 두고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를 붙여 마치 전체가 일자형(日字形)의 한 건물같이 배치하였다. 상류주택(上流住宅)의 격식(格式)을 갖추면서 주거건물(住居建物)의 묘(妙)를 살리고 있다.
관가정(觀稼亭)은 조선 중종 때 관리이자 청백리였던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529)의 옛집이다. 우재는 회재의 외삼촌으로 회재를 가르쳤다. 관가정은 언덕에 자리 잡아 앞들에서 농사짓는 모습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남쪽에 사랑채가, 북쪽에 안채가 위치한다.
우리는 양동마을에 너무 일찍 도착해 건물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마을 전체를 개관하고 초입에 있는 건물과 향단 정도만 개괄적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양동 민속마을을 포함하는 양동리에는 현재 133세대에 323명의 주민(남자 157명, 여자 166명)이 살고 있다.
옥산서원에 남아 있는 한석봉과 추사의 글씨 우리는 양동마을을 나와 다시 28번 국도를 타고 안강읍을 우회해 옥산서원으로 향한다. 옥산리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자옥산(562m)과 도덕산(702m)으로 들어가는 마을길이 나온다. 사오 분쯤 들어가면 하천(溪流) 건너편으로 옥산서원이 보인다. 이 서원은 원래 회재 이언적 선생을 제향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선조 6년(1573)에 설립되었으며, 이듬해 임금이 옥산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서원은 강당이자 중심건물인 구인당(求仁堂), 기숙사인 동서재, 서원의 누각인 무변루(無邊樓), 장서각인 경각과 장판각 그리고 청분각, 사당인 체인묘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으로 들어서면 무변루가 나타나고 그 안으로 계단을 오르면 마당이 있다. 마당 건너 구인당이 있고, 좌우에는 동서재에 해당하는 민구재와 암서재가 있다.
구인당에는 옥산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곳에 보면 “만력 갑술(1574년) 선조 임금의 사액을 받은 지 266년 되는 기해(1839년)에 불이 나 다시 썼다”는 글이 적혀 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추사 김정희가 썼다고 하는데 믿을 수 있을는지. 추사와 관련된 어떤 낙관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루에 올라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옥산서원이라는 또 다른 현판이 걸려 있다. 끝 부분에 구액모게(舊額摹揭)라는 글자를 볼 수 있는데 이를 풀이하면 옛날의 편액 즉 원래의 편액을 본떠서 걸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이 편액이 바로 한석봉이 썼다는 그 글씨를 모방한 셈이 된다. 이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바로 옥산서원에서 조선 최고 명필의 글씨를 대조해 볼 수 있는 호사를 누리는 것이다.
구인당을 본 다음 건물 왼쪽으로 돌아가면 사당 옆에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가 보인다. 이 신도비는 비각 안에 들어 있어 그 글자를 일일이 읽어볼 수가 없다. 그러나 안내판을 통해 비문은 고봉 기대승이 짓고 아계 이산해가 글씨를 썼다고 한다. 이들 모두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다. 회재 선생은 이(理)와 기(氣)중 이를 우선시하는 이선기후설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이를 우선시하는 주리론은 이후 퇴계 이황에게 전해져 조선 성리학의 중심사상이 되었다.
그리고 서원에는 1972년에 지은 청분각이 있으며 이곳에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제586호)과 김부식의 <삼국사기> 완본 9권 등 많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옥산서원은 1967년 사적 제154호로 지정되어 문화재청의 보호와 지원을 받고 있다. 금년 3월에는 또 유물전시관이 착공하여 이곳에 있는 전적류 등 유물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전시·보관할 예정이라고 한다.
회재 이언적의 자취가 남아 있는 독락당
옥산서원에서 서북쪽으로 700m 떨어진 곳에 회재의 별장이자 서재였던 독락당(보물 제413호)이 있다. 옥산서원에서 이곳에 가려면 계류를 건너야 한다. 이 맑은 옥류 주변에는 등심대, 탁영대, 관어대, 영귀대 및 세심대 등의 바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작은 규모의 폭포와 용추(龍湫)가 있다. 이 계류를 건너 북쪽으로 가야 독락당에 이를 수 있다.
독락당은 이언적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유서 깊은 집이다. 조선 중종 11년(1516)에 지은 이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북쪽에 사묘를 두고, 가운데 서쪽에 어서각을 동쪽에 계정(溪亭)을 두었으며 뒤로는 양진당이 있다.
독락당은 한국 전통건축의 일반적인 건물과 달리 정면 4칸, 측면 2칸의 짝수 칸살이의 특이한 평면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더욱이 사랑대청에서 담장을 통해 시냇물을 볼 수 있도록 동쪽 담 윗부분에 살창을 내었다. 꼿꼿한 선비들이 부드러운 물의 속성을 보고 배우고자 하는 정신의 표현이다.
이러한 선비정신은 계정을 통해 더욱 잘 표현되고 있는데 시내 쪽으로 대청을 내어 자연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것은 인간과 건물 그리고 자연이 하나임을 보여주는 자연친화 사상의 대표적인 예이다. 계정 안에는 만력 갑인(1614년) 6월 상순에 쓴 현판이 걸려있는데 거리가 너무 멀어 제대로 읽을 수 없다. 현재 독락당 건물에는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어 안으로 들어가기도 어렵고 개개의 건물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