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대통령직인수위의 오만과 독선이 하늘을 찌를 기세다. 87년 헌정체제 이후 직선으로 뽑은 역대 대통령 당선인과 대통령직인수위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처럼 오만하지는 않았다. 아니, 이런 오만은 군부독재 정권에서도 없던 일이다.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16일 오후 2시 서울 삼청동 인수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현행 18부 4처를 13부 2처로 축소하는 내용의 정부조직 개편안을 확정 발표했다. 현재 18개 부에서 통일·정보통신·과학기술·해양수산·여성가족부의 5개 부를 폐지하고, 4처 중 기획예산처와 국정홍보처를 각각 재정경제부와 문화관광부로 통폐합시키는 것이 골자다.
인수위는 이에 앞서 김형오 부위원장을 한나라당에 보내 강재섭 대표에게 정부조직 개편안을 설명하고, 당 차원의 협조를 당부했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은 대통합민주신당 등 주요 정당과 정부조직법 개정안 처리를 위해 협상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명박식 속전속결'의 부작용한나라당은 정부조직 개편안에 대해 ▲ 21∼25일 국회 행자위·법사위 처리 ▲ 28일 본회의 처리 ▲ 29일 국무회의 의결 ▲ 30일 공포의 일정을 잡아놓고 있다고 한다. 건설회사 CEO 출신다운 이른바 ‘이명박식 속전속결’이다. 그러나 아무리 급해도 실을 바늘허리에 매어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좋은 정부조직 개편안이더라도 법안이 국회를 통과해야 이명박 당선인이 총리와 장관을 인선하고 또 국회에서 청문회를 통과해야 이들을 임명할 수 있다. 그런 통과의례와 절차는 한나라당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다.
지난 98년 당시 제1당이었던 한나라당은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김대중 대통령이 총리로 지명한 김종필씨를 국회에서 인준해 주지 않아 6개월 동안 '총리서리 체제'로 국정을 절름거리게 한 바 있다.
어디 그뿐인가. 한나라당은 지난 10년 동안 장상·장대환 총리 지명자와 전효숙 헌재소장, 윤성식 감사원장, 이헌재·김병준 부총리, 강동석·오장섭·주양자 장관, 홍석현 주미대사, 최영도 국가인권위원장 등 많은 인사들을 위장전입 및 부동산 투기, 논문 표절 의혹 등으로 인준을 거부했거나 현직에서 낙마시켰다.
국민은 이처럼 한나라당이 지난 정권에서 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한나라당 정권이 정부조직 개편안을 처리하려는 행태를 보면, 이들이 과연 개편안을 제때에 처리하려는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개편안의 내용은 물론 그 형식조차도 오만과 독선이 흘러넘치기 때문이다.
인수위 행정실 직원이 소포 배달하듯 전달한 정부조직 개편안인수위는 16일 정부조직 개편안을 공식 발표하기 1시간 전에야 개편안을 인수위 행정실 실무자를 보내 통합신당 원내대표실에 전달했다. 아무런 배경설명도 없이, 단지 소포 배달하듯 책자를 전달했을 뿐이다. 오죽했으면 최재성 통합신당 원내대변인이 "이럴 거면 퀵서비스로 하는 것이 빨랐을 것"이라며 "왜 발품을 팔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을 정도다.
이런 식으로 대통령 당선인과 인수위가 예비 야당을 무시하는 사례는 처음 있는 일이다. 이는 다른 대통령 당선인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2003년 1월 22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은 한나라당사와 민주당사를 방문해 고건 국무총리 지명 사실을 통보하고 국회 인준에 협조를 구했다. 당시 노 당선인은 서청원 한나라당 대표에게 "한나라당과 청문회의 정서, 분위기를 고려해서 (고건 총리 지명을) 했다"면서 "저도 색깔이 선명한데 총리까지 그렇게 되면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고 총리 인준 협조를 부탁했다.
이에 서 대표는 이날 오후에 열린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노 당선인을 만나보니 앞으로 대화를 통해 여야 상생정치를 해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더라"고 의원들에게 회동 내용을 전하기도 했다. 그런 한나라당이 이런 오만을 부리는 것은 영락없이 '올챙이 시절 모르는 개구리'의 모습이다.
불과 이틀 전에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명박 당선인은 대야 관계 설정 및 정국 대처방안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국가의 미래와 국익 극대화를 위해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과도 긴밀히 협조하는 새로운 협력 모델을 만들 것"이라며 "야당이 4월 이후 어떤 형태가 될지 모르지만 야당과도 긴밀히 협력하고 여야가 협력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나라당은 아직 여당도 제1당도 아니다
사실 한나라당은 아직 여당이 아니다. 이명박 당선인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2월 25일 0시 전까지는 야당이다. 원내 다수당은 더더욱 아니다. 대통합민주신당 의석수가 줄어들고 있지만 4․9 총선 전까지, 아니 6월 18대 국회가 구성되기 전까지는 한나라당은 통합신당의 협조가 절실한 원내 제2당이다.
당선인이 '협력 모델'을 얘기해 놓고 인수위는 실무자를 시켜 정부조직 개편안을 툭 던져놓는 것은 겉과 속이 다른 처사다. 이처럼 어제 한 말과 오늘 행동이 다르다면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미래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미 그럴 조짐이 이명박 당선인의 이른바 실세니 측근이니 하는 사람들의 행태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명박 당선인의 보좌역인 정두언 의원은 지난 1일 인수위 사무실에서 기자들에게 "(내 지역구인) 서울 서대문을은 한나라당이 의원이 당선된 게 내가 처음일 정도로 호남 성향이 강한 곳"이라며 "4월 총선에서 센 사람(거물)이 나왔으면 좋겠다, 정동영·이회창 후보 정도는 돼야지"라고 호기를 보였다.
이 당선인의 핵심 실세로 통하는 그는 11일에도 "DY(정동영) 나오라고 했더니 도망갔더라. 그것을 두고 우리 동네 사람들이 '오만하다'고 하는 데 그게 무슨 오만이냐"면서 "내가 강남에 나간다고 하면 그게 오만한 거지, 서대문에서 DY랑 붙겠다는데 그것보다 더 겸손한 게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이명박 몸체와 따로 노는 '머리'(정두언)와 '입'(이동관)
그뿐이 아니다. 이동관 인수위 대변인은 15일 "인수위 대변인을 맡으면서 유권자들에게 어느 정도 알려진 만큼 어려운 지역에 나가 한 석이라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에 도봉갑 출마를 결심했다"면서 통합신당의 재야 간판격인 김근태 의원(3선)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이 대변인은 동아일보 논설위원 출신으로 이 당선인의 대선후보 경선 때 캠프에 합류해 공보팀장을 맡았다.
그는 "이 당선인의 재가를 받은 상태가 아니며 최종 결정은 이 당선인의 뜻에 따르겠다"고 전제를 달았다곤 하나, 공천은 공천심사위에서 하는 것이지 이명박 당선인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박근혜 전 대표 진영으로부터 "한나라당이 이명박 사당화되고 있다"는 비판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당선인 보좌역과 대변인은 말 그대로 이명박의 '머리'이자 '입'이다. 이쯤 되면 이명박 당선인의 어제 말과 오늘 행동이 다를 뿐 아니라, 한 몸의 머리와 입도 당선인의 몸체와 따로 노는 셈이다.
대선전의 적장(敵將)인 정동영은 비록 '패장'이지만 617만표를 받은 제1당의 대통령후보다. 또 아무리 이념의 시대가 지났다고 해도 김근태는 우리나라 민주화세력의 간판이다. 이명박의 머리와 입이 그의 재가를 받은 상태가 아니라면서도 적장에게 '한판 붙자'고 하는 것은 정치 도의를 벗어난 안하무인의 결례다.
이 대변인은 지난해 논설위원 시절 김근태 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한 직후(6월 13일)에 쓴 ‘김근태의 2007년 여름’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그를 '시대착오적' 인물로 묘사하며 이렇게 썼다.
"그는 20년 전 6월 민주항쟁 때 감옥에 있었다. 그때와 2007년 여름의 대한민국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아직도 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는 어쩌면 이때부터 김근태와 맞짱을 붙으려고 칼을 갈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김 의원은 이명박 당선인의 측근들이 입신과 양명의 제물로 삼을 만큼 허튼 정치인은 아니다. 그는 아직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동지들이 주민등록지 이전이라도 해서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정치인이다. 이런 오만과 독선이 계속되면 나라도 거주지를 옮겨 그에게 투표할 참이다.
지금 한나라당은 한없이 겸손해야 할 때다. 그렇지 않으면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미래는 노무현 정부-열린우리당의 과거와 통합신당의 오늘에 다름 아니다. 민심은 늘 무섭게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