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한국땅'은 '고구려=중국사'란 주장과 같아대마도는 한국 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대마도는 팍스 코리아나의 영향권이었다. 특히 14~16세기에는 그러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흔히 대마도가 고려나 조선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은 사실을 근거로 ‘대마도는 한국 땅’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치면, 중국 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은 한국의 역사는 모두 다 중국의 역사가 되고 말 것이다. 또 금나라를 상국으로 모신 한족 송나라(남송)의 역사도 여진족의 역사가 되고 말 것이다.
만약 책봉 사실을 근거로 대마도가 한국땅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책봉을 근거로 ‘고구려는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중국 측의 주장을 결과적으로 인정하는 꼴이 될 것이다. 책봉은 과거 동아시아에서 일종의 국가승인처럼 이루어진 것인데, 그것을 근거로 영유권을 주장한다면 이는 과거의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중국의 동북공정에 넘어가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책봉을 근거로 주변국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논리를 부정하려면, 한국 역시 대마도에 대해 책봉을 근거로 역사적 영유권을 주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 책봉을 근거로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한다면, 한국인들의 주장은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대마도는 역사적으로 일본 땅이었는가? 그 역시 사실이 아니다. 과거 대마도-일본의 관계는 대마도-한반도 관계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대마도에는 독자적 정권이 있었고, 그 권력이 한반도 및 일본열도 양쪽으로부터 형식상의 책봉을 받았을 뿐이다.
이는 오키나와가 중·일 양쪽으로부터 책봉을 받으면서도 독자적 정권을 유지한 것과 같은 일이다. 그래서 오키나와처럼 대마도도 양속(兩屬)의 상태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오키나와는 중·일 두 지역에 양속된 데 비해, 대마도는 한·일 두 지역에 양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마도는 그야말로 대마도인들의 땅과거 한국이 중국의 책봉을 받았다고 해서 한국이 중국 땅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대마도가 한·일의 책봉을 받았다고 해서 그곳이 한·일의 땅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물론 오늘날에는 대마도가 일본 영토에 편입되어 있지만, 19세기 중반까지의 대마도는 그야말로 대마도인들의 땅이었다.
과거에 중국이 한국에 책봉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중국의 총독이 한국에 파견된 것도 아니고 또 중국이 한국에서 세금과 요역을 징수한 것도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한국이 대마도에 책봉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한국에서 그곳에 총독을 파견한 것도 아니고 또 그곳에서 세금과 요역을 징수한 것도 아니었다.
한국·일본이 관리를 파견하지도 못했고 세금과 요역을 징수하지도 못했다면, 그런 곳을 어떻게 한국이나 일본의 땅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한 이유에서 과거의 대마도는 한국 땅도 아니고 일본 땅도 아닌, 대마도 정권 고유의 땅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대마도가 형식상으로는 고려나 일본의 지방행정단위로 편입된 적이 있지만, 그러한 현상은 과거 동아시아에서 ‘국가 간’에 흔히 나타났던 고도의 동맹 혹은 연합을 반영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대마도는 과거의 한국과 전혀 무관한 곳이었을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통치권의 소재를 근거로 내 나라 네 나라를 구분하는 것은 다분히 근대 서양의 논리다.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통치권은 비록 다르다 해도 두 나라가 고도의 연합을 이루는 예가 많았다. 하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남이라고도 할 수 없는, 오늘날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특수한 국가관계가 동아시아에서는 존재했다.
과거에 한국과 대마도는 그런 식의 고도의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19세기 이래 서양 문명이 물밀듯이 들어오는 바람에 그 같은 동아시아의 독특한 체제가 동아시아인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을 뿐이다.
팍스 시니카와 별개인 미니 국제질서, '팍스 코리아나'그럼, 한국과 대마도는 어느 정도의 연합을 이루고 있었을까? 그 연합의 정도는 서두에서 언급한 ‘팍스 코리아나’의 수준으로 설명될 수 있다. 조선 전기의 동아시아 정세를 살펴보면 그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전기에 해당하는 14~16세기에 동아시아에는 당대 최강 명나라의 패권을 전제로 하는 팍스 시니카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동아시아에는 팍스 시니카로부터 독립적인 별개의 ‘미니 국제질서’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팍스 코리아나였다.
오늘날의 미국이 세계 모든 지역을 다 장악할 수 없듯이, 과거의 명나라도 동아시아 전체를 다 관할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러한 ‘틈새시장’을 뚫고 조선왕조가 만들어낸 것이 바로 팍스 코리아나였다. 조선은 명나라 주도의 국제질서에 편입되는 한편, 독자적으로 미니 국제질서를 창출하는 등의 이중적 상태에 처해 있었다.
이 팍스 코리아나는 조선을 중심으로 대마도·여진족이 참여하는 독립적 국제체제였다. 항상 식량부족에 시달렸던 대마도·여진족은 일정 정도의 식량원조를 받아가는 대신 조선왕조의 지도력을 받아들이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는 조선이 정한 규칙을 준수하지 않으면 낄 수 없는 무역 시스템이 존재했다. 오늘날 세계 각국이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에 따라 무역을 하듯이, 대마도·여진족은 조선왕조가 정한 규율에 따라 무역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히 대마도는 조선정부에서 발행한 통신부(通信符, 일종의 무역허가장)를 어떻게든 확보하지 못하면, 조선을 상대로 무역을 할 수 없었다. 조선은 자신들이 만든 룰에 따라 대마도나 여진족을 통제했다. 대마도나 여진족은 쌀을 얻기 위해서라면 조선이 만든 룰을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진족이나 대마도의 충성심이 백옥처럼 ‘순결’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여진족 군소정권들 중에는 명나라에만 사대하는 쪽도 있었고 조선에만 사대하는 쪽도 있었고 조선·명나라 양쪽에 다 사대하는 쪽도 있었다. 대마도는 조선·일본 양쪽에 사대하고 있었다.
여진족·대마도의 충성심이 식량원조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조선 입장에서는 대마도나 여진족의 변경침입을 막는 동시에 일본·명나라를 견제할 필요성에서 식량원조를 매개로 이들을 자국의 영향권 하에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대마도의 경우에는 조선으로부터 책봉을 받음으로써 일본이 자신들을 점령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선과 일본의 교류를 매개함으로써 자신들의 국제적 입지를 넓힐 수 있었다.
이처럼 14~16세기에 동아시아에서는 그 시대 나름의 정치·경제적 필요에 기인하여 조선-여진족-대마도가 하나의 긴밀한 국제질서를 이루고 있었다. 명나라 주도의 동아시아질서와 별도로 존재한 이 국제질서를 주도한 쪽이 조선이었으므로, 그것은 팍스 코리아나라 할 만한 것이었다.
이러한 팍스 코리아나는 임진왜란으로 동아시아 질서가 변질될 때까지 조선-여진족-대마도 세 지역의 평화(불완전하나마)를 창출하는 데에 일정 정도 기여하였다. 한편, 이 체제는 명나라 주도의 팍스 시니카를 견제하는 역할도 했다.
여진족 일부가 팍스 코리아나와 팍스 시니카 양쪽에 다 줄을 대면서 세력을 확대한 것에서 그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결과적으로 볼 때 팍스 코리아나는 여진족이 명나라의 압력을 완화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도와준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위와 같이 14~16세기에는 동아시아에서 명나라 중심의 국제체제와 별도로 조선 중심의 또 다른 미니 국제체제가 존재했고, 팍스 코리아나라 이름 할 만한 그 미니 국제질서에 여진족과 함께 대마도도 편입되어 있었다.
대마도는 팍스 코리아나 안에서 비록 만족할 만큼은 아니더라도 식량을 제공받으면서 조선을 상국으로 대하며 살았다. 그러한 사대는, 대마도가 그 좁고 척박한 섬에서 나라를 계속 운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노하우’였다. 그리고 적어도 팍스 코리아나가 기능을 발휘하는 동안에는 조선-여진족-대마도 간에 평화가 존재할 수 있었다.
대마도는 이처럼 한반도의 지방정권은 아니었지만, 특히 14~16세기에는 한반도와 함께 또 다른 국제체제를 형성한 ‘고도의 협력자’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조선과 대마도는 비록 하나는 아니었을지라도 그렇다고 완전한 남남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런 긴밀하고 특수한 관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