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삼연 의병장 순국 김태원 의병장은 담양 무동촌 전투에서 요시다 광주수비대를 격파한 기쁨도 잠시였다. 1908년 1월 말, 기삼연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담양의 금성산성에 머무는 중, 일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기삼연은 다리에 부상을 입어 순창에 은신하다가 일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김태원은 날랜 병사 30명을 이끌고 광주에 이르는 경양역까지 추적했으나 허사였다. 이미 기삼연 의병장은 광주로 호송이 끝난 뒤였다. 일군은 김태원 의병부대가 기삼연을 탈옥시키려 하는 움직임을 눈치 채고서는 정상적인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호송 뒤 곧장 광주천 백사장에서 총살시키고 말았다. 김태원은 그 소식에 통곡하면서 전 의병에게 상복을 입게 하고는 하늘을 향해 빌면서 복수를 맹세했다.
기삼연의 순국 후 김태원 김율 형제는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정비하여 호남의소(湖南義所)로 이름을 바꾼 뒤 더욱 맹렬하게 반일투쟁을 펼쳤다. 이들은 일군뿐만 아니라 친일파인 일진회원과 밀정, 자율단원들을 닥치는 대로 처단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형 죽봉부대를 ‘참봉진(參奉陣)’, 아우 청봉부대를 ‘박사진(博士陣)’이라 불렀다고 한다. 김태원 김율 의병부대는 당시 민중들의 전폭 지지를 받은 바, 이는 이들 의병부대는 주민들에 대한 토색(討索; 금품을 강요하는 행위)을 금지하였으며, 뛰어난 지략(智略)과 용맹으로 부하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호남 각처에서 수십 차례의 크고 작은 항일전투에 승리했기 때문이다.
김태원 의병장 최후
1908년 3월 26일의 토물(土泉)전투에서는 토물 뒷산에 보루와 방어진지를 쌓은 다음 적을 유인하여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적 30여명을 살상케 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들 형제 의병부대에 철저히 농락당한 일제는 제2특설순사대를 편성하였을 뿐 아니라, 광주수비대와 헌병을 총출동하는 대 토벌작전을 펼쳤다.
이에 김태원 김율 의병부대는 전력에 큰 손실을 입었다. 영광 낭월산 전투에서는 도포장(都砲將) 최동학(崔東鶴)을 잃었고, 대곡전투에서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그런 가운데, 3월 29일 김율이 광주 소지방(현 송정읍)에서 일군에 붙잡혀 광주감옥에 수감되었다.
형 태원은 아우의 탈옥 작전을 펼치려 하였다. 하지만 허리를 다쳐 광주 박산마을 뒤 어등산에 들어가 잠시 신병을 치료하려다가 거미줄처럼 쳐놓은 일제 밀정의 제보로 1908년 4월 25일 토벌대에게 발각되었다. 일제 기병대와 특설순사대가 김태원 의병부대를 포위하였다.
이를 알아챈 김태원은 부하들에게 “나의 죽음은 의병을 일으킨 날 이미 결정하였다. 다만 적을 멸하지 못하고 왜놈 총에 죽게 되었으니 그것이 한이로다. 나와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 너희들은 나를 대신하여 뒷일을 도모함이 옳다”고 이르고는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부하들을 탈출시켰다. 기어이 끝까지 남겠다는 부하 김해도(金海道) 등과 함께 적진을 향해 총탄을 퍼붓다가 일군의 집중사격에 쓰러졌다. 죽는 순간까지 의병장다운 의연하고 장렬한 순국이었다.
다음 날, 일제는 한 달 전 체포되었던 아우 율을 데리고 와서 형의 시신을 확인시킨 뒤 그 자리에서 총살시켰다. 이로써 김태원 김율 형제 의병부대의 활동은 종식되었지만, 이들의 영향을 받은 조경환, 전해산, 심남일, 오성술 등의 의병장에 의해 의병전쟁은 이어져 갔다.
충의가의 귀감
매천 황현은 김태원 의병장을 다음과 같이 높이 기렸다.
“기발한 전략을 많이 이용하여 일여 년 동안 수백의 일병을 죽였으며, 부하를 엄히 다스려 백성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1919년 초, 김태원 부인 낙안 오씨는 “나라가 망했으니 살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남편의 뒤를 이어 자결하였다고 한다. 충의의 맥은 형제뿐 아니라 부인에게도 이어진 집안으로 호남 충의가(忠義家)의 귀감이라 하겠다.
김갑제씨는 무등일보사를 나온 뒤, 먼저 할아버지 형제 김태원 김율 의병장이 순국하신 어등산 전적지로 안내했다. 이곳은 한말 의병 격적지로 숱한 의병들이 일제의 총칼에 전사한 곳이다.
이곳이 의병 근거지가 된 것은 그 무렵 행정사각지대로 장성, 함평, 영광, 송정 등 일제 헌병분파소나 분견대에서 출동하기가 어중간지대요, 어등산 아래에는 부자들이 많이 살았기에 의병들이 은거지로 이용한 듯 하다고 갑제씨는 풀이했다.
그런데 ‘어등산(魚登山)’이란 물고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뜻의 지명인 바, 수많은 의병들이 죽음의 산인 줄 알면서도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던지 이 산에 숨어들었다고 한다. 그런 탓으로 이 산기슭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의병들이 장렬하게 산화했다는, '한말 호남 의병 피의 산'이라고, 갑제씨는 어등산 전적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호남의 이름 있는 몇몇 의병장의 현창사업은 그런대로 이루어졌지만, 군소 의병장이나 무명 의병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요. 이분들의 충혼을 기리는 ‘한말 호남의병기념공원(가칭)’을 이곳에다 만들어 의향(義鄕) 광주 시민의 자긍심을 드높이는 교육의 장이 되었으면 하는 게 모든 의병 후손들의 한결같은 바람일 겁니다.”스물세 분의 뫼밥그동안 이 어등산 일대는 포병학교 포사격장 및 탄착지로 군사보호지역이었다가 얼마 전에 해제되었다고 한다. 현재 광주광역시에서는 이곳에다 종합 레저타운으로 개발할 계획을 세우는 모양인데, 의병 후손들의 바람이 얼마나 받아들일지 모르겠다고 갑제씨는 염려했다. 돈이 된다면 산도 허물고, 바다도 메우고, 강줄기도 바꾸려는 현실에, 이곳에다 놀이기구 하나 더 놓지 떡고물이 떨어지기는커녕, 생돈이 드는 의병 기념탑이나 조형물을 세울 만큼 의식 있는 지도자요, 지자제 단체장인지 두고 볼 일이다.
우리 일행은 어등산을 뒤로 한 채 김태원 김율 형제 의병장 고향인 나주로 달렸다. 점심시간을 이용한 답사라 생가 터인 문평면 갈마지 마을까지는 가지 못하고, 나주 시민공원에 있는 죽봉 김태원 장군 기적비(紀蹟碑)와 나주 향교만 둘러보고 차머리를 곧장 광주로 돌렸다.
갑제씨는 오후에는 사설을 한 편 써야 되는 눈치였다. 하지만 욕심 많은 나그네가 이태 전 어두운 밤에 제대로 보지 못한 죽봉 장군의 동상이 다시 보고 싶다고 청하자 곧 농성광장에다 차를 멈췄다.
이 일대도 재개발 붐이 한창인 듯, 머잖아 죽봉 김태원 장군 동상은 빌딩 숲 속에 외딴 섬이 될 성 싶다. 화승총을 들고서 호령하는 김태원 장군의 동상 앞에서 묵념을 드리자 그나마 묘지를 찾지 못한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
김태원 의병장의 묘소는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77번)에 안장됐다는데 아우 김율 의병장은 시신을 찾지 못해 여태 묘소도 쓰지 못하였다고 한다. 28세로 후사 없이 돌아가신 김율 의병장은 갑제씨 아우 혁제씨가 출계(出系)하여 사손(嗣孫;대를 이은 손자)하여 대를 이었다고 한다.
김갑제씨가 헤어질 때 한 말이다.
“저는 명절 때면 23분의 뫼밥을 제상에 떠 놓습니다. 할아버지 부하 가운데 후손이 없는 분의 뫼밥을 명절 때만은 궐식할 수 없어 올리고 있지요.”명절 때마다 그 귀신들이 뫼밥을 들면서 얼마나 고마워할까? 호남 의병전적지 순례 길에 그래도 밥술이나 먹으면서 할아버지 부하까지 챙기는 의병 후손을 만나서 기분 좋은 하루였다.
덧붙이는 글 | 다음 회는 오성술 의병장 편입니다. 이 기사는 홍영기 편저 <義重泰山>을 많이 참고하여 썼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