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새책방 나들이와 헌책방 나들이는, 둘 모두 반가운 책을 찾아나서는 길찾기라는 대목에서 즐겁습니다.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리며 떨립니다.
새책방을 찾아갈 때에도 아직 저한테 낯선 책을 찾기 마련이고, 헌책방을 찾아갈 때에도 저한테 아직 눈선 책을 찾기 마련입니다.
일찍부터 알고 있거나 오래도록 찾고 있는 책을 집어들 때도 있지만, 제 눈길이나 생각이나 머리로는 바라보거나 느끼지 못한 곳을 살그머니 집어 주는 책을 조금 더 바라거나 기다리곤 합니다.
목록을 짜서 하나하나 읽어 나가는 일보다는 그때그때 형편과 느낌에 따라서 하나둘 만나는 일을 조금 더 좋아합니다.
언제나 책을 만나는 일이고, 어떤 책을 만나든 제가 못 보았던 대목을 짚어 줍니다. 어느 곳에서나 책을 만나는 일이며, 어떤 책을 읽게 되든 여태껏 걸어온 길을 차근차근 돌아보도록 이끕니다.
도서관 살림 꾸리기에다가 동네 막개발 막아내기로 바쁜 가운데 한동안 서울 나들이를 못하고 있다가 하루 짬을 냅니다. 오늘은 조금 멀리까지 가 볼까 하는 생각으로 연신내에 자리한 헌책방 '문화당서점'까지 가 봅니다. 국철을 타고 종로3가까지 달린 뒤 3호선으로 갈아탑니다. 안국, 경복궁, 독립문, 홍제, 불광 들을 지나 연신내에 닿습니다.
(2) 우리한테 없는 책책방에 들어섭니다. 들어서자마자 문간 맨 위쪽에 두툼한 책이 눈에 들어옵니다. 자그마치 780쪽에 이르는 두껍고 큰 물고기도감인 <한국어도보(韓國漁圖譜)>(정문기, 일지사, 1977)입니다. 오. <한국어도보>라니. 물고기학자인 정문기 선생이 쏟아낸 모든 땀방울이 영근 도감인 이 책.
사진책 <子どもたちの昭和史>(大月書店,1984)를 봅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아이들이 ‘소화 천황’ 동안 어떻게 살아갔느냐를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한창 제국주의에 빠져서 이웃나라로 쳐들어가던 때부터 보여주는 만큼, 사내 계집 가리지 않고 꼬맹이들한테도 나무칼을 손에 들려서 허수아비를 내리치게 시키는 사진부터 나오는데, 일본이 중경대학살을 하던 때 사진도 한 장 곁들입니다. 일본이 중국으로 쳐들어가면서 끔찍하게 사람들을 죽였다는 사진말이 붙어 있군요.
그러나 일본 스스로 이웃나라로 쳐들어가 괴롭힌 이야기는 얼마 없습니다. 그나마 다른 일본 역사책과 견주면 나은 편인데, 일본사람 눈길로 헤아리자면, 굳이 자기네 못난 모습을 들추어낼 까닭은 없을지 모릅니다. 잘못을 저지른 쪽에서 ‘우리는 이렇게 몹쓸 짓을 했다우’ 하고 남김없이 드러내거나 까밝히면서 고개 숙이는 일이란 아주 드물지 않습니까.
<Cornell Capa Photographs>(Bulfinch,1992)와 <Children of war, children of peace>(Robert Capa, Bulfinch,1991)라는 사진책이 보입니다. 카파 형제 사진책이 나란히 있군요. 사진쟁이 로버트 카파와 코넬 카파.
지금 우리나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카파 형제 사진책은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하나뿐입니다. 그 책 하나도 열 해 가까이 판이 끊어져 있다가 지난 2006년에 다시 나온 판. 이밖에 <로버트 카파>라는 전기가 2006년에 나왔어요. 그렇지만 ‘사진쟁이 카파 형제 사진세계는 어떠한가?’를 알아보거나 느낄 만한 작품 모음은 없어요. 그나마 브레송 사진책은 한두 가지 나와 있어서 살펴볼 수 있는데(그러나 책값이 꽤 비싸지요), 세바스티앙 살가도 같은 사람 작품모음도 찾아볼 수 없는 한편, 우리나라에서 훌륭하다는 소리를 듣는 분들 작품모음도 쉬 판이 끊어지고 맙니다.
<女の歡びを10培高めゐ法>(村西とおゐ, ポケットブック社,1990)과 <女の脫がせ方>(村西とおゐ, ポケットブック社,1990)은 여자 알몸사진 찍기를 말하는 손바닥책. 이런 사진책을 볼 때면, 알몸사진은 죄다 여자 알몸사진만 담고 남자 알몸사진은 안 담습니다. 문화권력을 쥔 사람이 남자이기 때문일지 모르고, 이런 사진을 즐기는 사람도 남자이기 때문일지 모르며, 이런 사진을 비평하고 소개하고 책으로 엮는 사람도 남자이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흐르지 않는 세월>(김태길, 관동출판사, 1974)이라는 책이 보입니다. 철학하는 김태길님이 품은 생각이나 걸어온 길과 제 생각은 그다지 들어맞거나 어울리지 않지만, 이분 책이 헌책방에서 보이면 틈틈이 들춰보곤 합니다.
... 자네들에겐 좀 어려운 문제여. 근본 문제이긴 하지만. 어렵더라도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은 좋겠지. 그리고 자기의 의견을 일단 가져 보는 것도 좋을 거야. 그러나 자기의 미숙한 생각을 고집해서는 안 돼. 이제 겨우 공부를 시작한 사람이 대가나 된 듯이, 한 가지 생각만을 고집하면 그런 사람은 발전성이 없어... (41쪽)제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 생각이라도 제가 미처 짚어내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합니다. 배울 때는 누구한테나 고개를 숙이며 배울 일입니다. 비판할 때에도 누구든 가리지 않으며 비판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가려서 배울 일이란 없고 가려서 비판할 일도 없습니다.
... “도덕을 위해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기 위해서 도덕을 지킨다.”, 이것은 무심 선생의 입에서 가끔 나오는 말의 하나이다... (49쪽)<閔妃暗殺>(角田房子, 新潮社,1988)이라는 책이 보입니다. 어, 낯익은 이름이구나 싶어서 집어든 뒤 집으로 와서 살펴봅니다. 생각했던 대로, 글쓴이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님은 <우장춘 박사 일대기 :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던 분.
<三代の天皇と>(梨本伊都子, 講談社, 1975)라는 책이 보입니다. 일본 황제 집안 이야기이지만, 뒷날 언제라도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서 자료로 쓰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챙깁니다.
(3) 영화를 말하는 묵은 책<씨나리오 영한대역 총서 2 : 백경>(이론사, 1958), <한국영화사>(魯晩, 한국배우전문학원, 1963), <한국영화측면비사>(안종화, 춘추각, 1962), <영화배우 되는 길(배우연기술)>(영화의벗사, ?) 같은 책들이 보입니다. 어느 분 집에서 한꺼번에 나온 듯합니다. <한국영화사>는 철필로 긋고 갱지로 엮은 책입니다. <미국공보원 영화목록(Usus film catalog Korea 1960)>도 함께 있습니다.
... 미합중국 대통령은 서기 1953년 9월 1일 정부의 대외공보사업을 담당할 독립된 기관으로서 미국공보처(USIA)를 창설했으며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자유세계 79개국에다 210개소의 해외공보원을 설치하고 있읍니다. 뿐만 아니라 동 공보처의 강력한 방송망 “미국의 소리” 방송은 매일같이 “철과 죽의 장막”에 가친 수백만 명에 대하여 미국의 정책과 행동에 관한 참다운 의도를 알려주는 뉴스와 시사해설을 보내고 있읍니다. 신문, 인쇄물, 방송, 테레비죤, 영화, 전시회, 도서관 그리고 개인적인 접촉 등의 방법으로 동 공보처는 다음에 열거하는 네 가지 중요한 일을 취급하고 있읍니다.
1. 미국의 정책과 목적에 관해 설명하는 일
2. 공산주의 선전을 봉쇄하는 일
3. 타 국민의 정당한 소망과 미국의 정책과 조화를 구원하는 일
4. 해외 여러 사람들에게 미국의 정책과 목적에 관한 이해를 증진시킬 미국의 문화 및 생활양식을 알리는 일
미국공보원의 영화사업은 39개 국어로 된 각종 필림을 마련하고 있읍니다. 국제공산주의를 폭로하는 사진뿐만 아니라 미국의 생활을 보여주며 해외정책을 입증하는 이들 필림들은 공보처 영화부에 의하여 생산, 획득 또 배부되고 있으며, 그중 어느 것은 39개국 전부에 발송됩니다 .. (머리말)‘미국이 꾀하는 정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미국사람이 어떻게 사는가’를 보여준다는 미국공보처 영화들. 이런 영화들은 ‘공산주의를 폭로’한다는 뜻이 아니라, 공산주의 폭로는 시늉뿐이고 정작 하려는 일은 ‘세계 구석구석에 미국 물질문명을 퍼뜨려’서 미국 생산품과 살림살이를 수출하는 데에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섬찟합니다.
<グル佛印の村落と農民>(滿鐵調査局, 1945)이라는 낡은 책을 집어 봅니다. 우리나라 역사나 문화와는 상관없는 책이라 할 테지만, ‘만철조사국’ 책이라서 집습니다. 만철조사국은, 만주에 철길을 놓는 회사에서 꾸린 조사국으로, 일본을 비롯하여 아시아 모든 나라들 사회와 문화를 꼼꼼히 살펴보는 조사모임을 꾸렸습니다. 이 조사모임에서 받아들인 연구자는 여러 나라 말을 할 줄 아는 지식인들로, 여러 해 동안 다 다른 곳에 내보내어 그곳 사람들 삶과 사회와 문화를 알아보도록 하여 조사자료모음을 수백 가지? 또는 수천 가지를 펴냈습니다.
이런 기본자료조사는 식민지를 넓혀 나갈 때, 원주민이 반발을 하지 않도록 하는 정책을 펼치고 원주민을 차츰차츰 식민본국 문화에 스며들도록 할 생각으로 하기 마련입니다. 이 기본자료조사를 마친 뒤에 으레 하는 일이, 식민지로 삼는 나라 사회와 문화 깎아내리기이지요. 이를테면 영국이 인도를 깎아내리면서 ‘셰익스피어 한 사람이 인도 모든 문화보다 낫다’는 투로. 또는 ‘조센징은 두들겨패야 말을 듣는다’는 투로.
<한국민간전설집>(최상수, 통문관, 1958)을 봅니다. 통문관에서 펴낸 책입니다. 요즘은 통문관에서 통 새로운 책이 안 나오는 듯한데. 서울 인사동 '통문관'은 우리 문화에 중요한 옛책을 깊이있게 알아보면서 가장 알맞는 임자한테 가도록 이어준 옛책방인 한편, 나라안 출판사에서 펴내지 못하고 있는 소중한 책을 기꺼이 내어준 출판사 노릇도 했습니다.
<폭정12년 (1) 경무대의 비밀>(김석영, 평진문화사, 1960)을 봅니다. 책 뒤쪽에 <폭정 12년>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다섯 권이 나왔으며, 이 책이 1권임을 알려주는 광고가 실립니다. 2권은 <이승만박사외교비사>이고 3권은 <은행죄악사>이고 4권은 <매직ㆍ의혹의 천국>이며 5권은 <폭정 12년 종말기>입니다.
(4) 도서관과 책고른 책을 걸상에 쌓아 봅니다. 높이가 제법 됩니다. 무게는 더할 나위 없이 나가겠군요. 책값은 가뿐하게(?) 삼십만 원을 넘깁니다. 이 책값을 어찌해야 좋을까나. 앞으로 보름쯤은 책을 굶는다고 생각하고 이곳에서 쏟아부어? 몇 가지 책을 덜어내?
정문기 선생 <한국어도보>를 뺄 수 없는 노릇이고, 만철조사국 옛책을 덜 수 없는 노릇입니다. 카파 형제 사진책은 어떻고요. 통문관에서 펴낸 책도, 미 공보처 영화목록도, 쓰노다 후사코님 책도 덜어낼 수 없습니다.
후유. 한숨을 쉽니다. 벌써 마음에 콱 박힌 책을 빼내어 지갑 짐을 줄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보다도 저한테 쓸모있는 책을 만나서 사들이고 읽어야 하는 한편, 헌책방 나들이를 하며 책을 둘러볼 때에는 묻히거나 사라질 걱정이 있는 책에 살포시 마음을 쓰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들이는 책은 개인 도서관이라고 하지만, 제가 가질 책이 아니라 이웃들하고 나눌 책으로 삼는 만큼, 지금은 비록 주머니가 후줄근해질지라도 뒷날 아쉬워하거나 아파할 일은 없으리라 믿어 봅니다. 돈이야 더 애써서 벌면 되지 않겠습니까. 판이 끊어져서 사라진 책, 우리나라에서는 펴내지 않은 책을 언제 어디에서 다시 만나겠어요. 쓰노다 후사코님 책을 사러 일본으로 비행기 타고 갈 수 없습니다. <한국어도보> 첫판은 두 번 다시 보기 어렵습니다. 만철조사국 책이 흔히 나오는 책이 아니며, 카파 형제 사진책을 아마존 같은 데에서 주문해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하지만, 아마존에도 재고가 있어야 팔 수 있는 책입니다.
이 책들은 지금으로서는 저한테 무거운 짐입니다. 그러나 무거운 짐이란, 다른 한편으로는 제가 짊어질 몫이기도 하다고 느낍니다. 짐을 져서 옮기는 동안은 고달프지만 땀을 한 방울 두 방울 흘리며 도서관으로 옮겨다 놓고 걸레로 더께를 닦아내고 햇볕에 살짝 말린 뒤 책꽂이에 꽂아 놓으면, 이때부터는 한결 많은 사람들한테 빛이 될 수 있다고 느낍니다.
주머니에 돈이 모자라 칠만 원만 치른 뒤, 집으로 돌아가서 인터넷은행으로 나머지를 부치기로 합니다.
덧붙이는 글 | - 서울 연신내 〈문화당서점〉 / 02) 384-3038
-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 나들이를 하시면 헌책방 + 책 + 우리 말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