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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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다양하다. 키가 크거나 작고, 수다스럽거나 과묵하다. 육상을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구기 종목에 강한 사람이 있다. 논리적인 사람이 있고, 감성적인 사람도 있다. 따라서 삶의 방식도 다르다. 키가 크고 구기 종목에 강하면 농구선수를 하고, 논리적이고 수다스러운 사람은 비평가나 토론 전문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대한민국 사회가 이를 존중하지 않는 분야가 하나 있다. 바로 영어 능력이다. '소질이 있다, 없다'는 개념을 떠나서 '소질이 있어야 한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직장에서 진급하기 위해 영어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영어를 못 한다"는 말은 사람을 주눅들게 만들고, 결국 "영어 하나는 배워오겠지"라는 믿음으로 조기유학 열풍이 시작됐다. 홀로 빈 집을 지키는 '기러기 아빠'가 늘어나는 현실이 해외 신문에 실릴 정도다. 이것이 문제라고 느끼지 못하는 대한민국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가 이런 현실을 고치겠다고 나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꺼내놓는 방안이 참 가관이다. 문제의 진단이 전혀 잘못돼 있고 현실성이 없거나,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 뻔히 보이는 방안들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초등학교부터 영어로 '국사·국어 수업'... 공약 현실화되나 인수위는 "초등학교 때부터 국사나 국어 등 일부 과목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겠다"라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선거운동 기간 중 발언을 기어이 실천에 옮길 태세다.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22일 '대입 3단계 자율화 방안'을 발표하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영어교육 부분에 특별히 시간을 할애, "영어교육 하나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하는 것을 5년간의 국가적 과제로 삼고 역점을 둘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아직 그 전모가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나라를 벤치마킹하겠다, 문법에서 벗어나 말하고 쓰고 듣고 하는 자연적인 언어습득 과정을 거치는 방향으로 모든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라는 그의 말에서 '초등학교부터 영어로 수업 진행'이 현실화될 것임을 예감할 수 있다. 이를 둘러싼 교육학적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인수위는 이것이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현재의 학교 교실에서 교사 1명이 30여명의 아이들에게 의사소통 위주의 영어를 가르칠 수 있을까. 그룹별로 나눠 수업하는 대안을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다면 영어 의사소통이 자유자재인 교사의 공급은 가능한지 의문이다. 인수위는 그러면서 현재 중학교 2학년생들이 치르게 될 수능시험부터 영어 과목을 없애고, 대신 '학생용 토익'을 도입해 상시적으로 응시할 수 있는 시험을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학생들은 자기가 본 시험 중 가장 높은 점수를 대학 진학시 쓸 수 있다. 결국 '점수따기' 경쟁이다. 그러면 새로운 시험 유형에 맞춘 '사교육 시장'이 등장하고, 학생들은 더 높은 점수를 따기 위해 그 쪽으로 몰릴 것이다. 사교육의 기회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될 저소득층 아이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초등학교부터 영어로 수업 진행'이란 발상은 결국 요구하는 영어실력의 기준치만 올려놓게 될 것이다. 올라간 만큼의 공간을 과연 공교육이 메울 수 있겠는가. 결국 사교육 시장만 확대해주는 결과를 낳을 것이 뻔하다. 교육 현장에서 "교실 안의 양극화 정도를 알아보려면 아이들의 휴대전화 기종을 볼 것이 아니라 영어 실력을 보라"는 말이 있다. 비싼 전자기기 등은 할부 구입을 통해 손에 넣지만 단기 어학연수, 원어민 강사 등 고비용의 영어교육은 저소득층 부모로서는 넘을 수 없는 '벽'이다.
교실안의 양극화는 영어로 보라고? 이렇듯 해법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전제'가 잘못됐기 때문이다. '글로벌한 시대에 누구나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해법이 자꾸 꼬이는 것이다. 운동을 못 하는 사람에게 운동선수가 되라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전제'를 바꾸면 된다. 왜 누구나 다 영어를 잘해야 하는가. 왜 영어교육 하나에 그런 엄청난 국가역량을 투입해야 하는가. 전제를 바꾸면 길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경제학자인 장하준 영국 캠브리지대 교수가 지난 연말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제시한 해법은 귀담아들을만하다. "우리나라 전체적으로 보면 일부만 영어에 집중해서 외국과의 교류를 담당하고 다른 사람들은 자기 전공분야에 집중해서 실력을 기르는 것이 더 현명한 일입니다. 적은 비용으로 영어를 배울 수 있으면 자기 전공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면 좋죠. 그런데 둘 다 잘하려면 엄청 힘들기 때문에 그것을 분업해야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나라 많은 기업가들은 외국회사와 사업할 때 통역 쓰면 영어실력 떨어지는 것을 자기가 인정하게 되니까 그게 창피해서 실력이 안 되는데 영어로 합니다. 그러다가 모르니까 영어 잘하는 직원 불러내서 협상하다 일을 그르치는 적도 많습니다. 영어 못하는 것이 절대 창피한 것이 아닙니다. 영어 잘하면 전공분야에 대한 실력이 떨어져도 출세하기 쉽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 걸고 영어를 배웁니다. 그러나 국가 전체적으로 볼 때는 이 과정에서 엄청난 돈과 노력이 낭비되면서 국력을 좀먹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부가 역할을 해서 입시에서 영어 비중을 과감하게 줄이고 한편으로는 세계 최고수준의 통·번역사를 양성하기 위해 지원해야 합니다." 장 교수는 이웃 나라 일본을 예로 들었다. "일본은 개개인의 영어 능력은 떨어지지만 영어권과의 지적 교류는 우리보다 훨씬 잘하고 있다"며 그 이유가 통·번역사의 질이 높고, 분업이 잘 돼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우리 기업들도 일본 기업처럼 영어 잘한다고 승진에 혜택 주는 것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 정부가 아무리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교육에 힘을 쏟아도 모든 국민이 원어민처럼 영어를 구사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 영어가 공용어처럼 통용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런 사회를 지향하다가는 장 교수의 지적대로 엄청난 국가적 낭비와 부작용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인수위의 출발점은 '사교육비 문제'이다. 이 문제를 정말 해결하고 싶다면 정부가 추진해야 할 교육·사회 시스템 개혁은 '모두가 다 영어를 잘해야 하는' 방향이 아니라, '모두가 다 영어를 잘할 필요는 없는'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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