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靑瓦臺)! 그곳에 눈이 내렸다. 강원도의 폭설과는 달리 청와대에는 한편의 그림 같은 눈발이 참여정부의 임기 말 감성을 다독이듯 새곡새곡 내린다. 여기에도 자연이 살아 있는 것이다. 잠시 짬을 내어 22일 눈 내리는 청와대의 겨울 풍경을 스케치해 보았다.
그동안 청와대는 권부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으로 각인되었지만 이른바 초과권력의 완장을 걷어낸 노무현 대통령의 업무시스템과 여러 개방조치로 인해 국민 가까이에 자리 잡게 되었다. 범법자가 아니라면 누구든 신청절차를 거쳐 청와대를 방문할 수 있으며 청와대가 생산하는 모든 정책은 청와대 홈페이지를 통해 일반인과 언론에 공개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업무혁신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이기도 하다. 청와대 앞길은 이미 관광객들의 관람코스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집무공간인 본관이 훤히 내다보이는 경복궁 신무문 앞에는 내외관광객들이 넘쳐난다. 청와대 영빈관 앞 분수대 광장에는 연일 1인 시위가 끊이지 않는다. 그렇게 변해 버린 것이다.
기실 왕의 이미지를 갖고 있거나 권력욕의 상징 같은 심상에 둘러싸였던 청와대는 근엄함을 포기하고 '친구 같은 대통령'을 표방한 아시아의 한 아웃사이더(?) 지도자에 의해 금기의 벽들이 무너졌고 민주주의 지도력을 펼치는 심장부로 변했다.
이젠 누가 되돌려 놓을 수도 없다. 이미 국민들이 그 맛을 알아 버린 까닭이다. 이를 두고 대통령답지(?) 않다고 폄하하는 세간의 시선이 저 내리는 눈발 속에 자취를 감추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자연은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어 보인다.
뭇사람들에게는 권부의 핵심으로 불리워지는 청와대는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곳, 대통령이 사는 곳, 국정을 살피고 다루며 '코리아'호를 이끌어 가는 곳으로 알려졌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번지.(일제시 강점기 광화문 1번지에서 해방 후 세종로 1번지가 되었다가 지난해부터 새 주소 사업에 따라 청와대로 1번지가 되었다) 총 면적 25만 3505제곱미터(7만 6685평).
청와대를 궁금해 하는 많은 이들을 위해 청와대는 홈페이지를 통해(청와대 둘러보기) 그 역사를 사뭇 자세히 안내해 놓았다.
좌청룡 낙산, 우백호 인왕산, 주산인 북악산과 북한산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청계천과 한강을 둔 우리나라 최고의 길지에 자리한 명당 중의 명당이라 불리는 곳. 그리하여 고려시대에 임금이 왕궁 밖에서 머물 때 사용하던 이궁(離宮)터. 이 이궁터에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5년(태조 4년)에 정궁인 경복궁을 창건하면서 지금의 청와대 자리는 경복궁의 후원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경복궁은 불타 완전히 폐허가 되어 270년간 방치되다가 고종 때 대원군의 노력에 의해 중건되어 광화, 건춘, 신무, 영추문 등을 두었고 고종은 신무문 밖 후원을 북원(北苑)이라 이름하고 그곳에 여러 각(閣)과 당(堂) 등을 세웠다. 그 가운데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시험장으로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긴 경무대(景武臺)는 오늘날 청와대의 전신에 해당한다.
경무대는 그 뒤 일제에 의해 총독부 관저가 들어서고 미군정의 관사로 사용되면서 경무대란 이름을 되찾아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공식 집무실이 된다.
그러나 이승만의 독재가 극에 치닫자 경무대는 국민의 원성을 사는 원부(怨府)로 전락되었고 급기야 1960년 제2공화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윤보선 대통령에 의해 오늘날의 청와대(靑瓦臺)란 이름을 갖는다. 청와대는 관저의 기와가 평화를 상징하는 푸른 빛깔이며 청기와 역시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양식이란 점에서 명명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청와대 본관과 관저, 프레스센터인 춘추관은 노태우정부 때 새로 지은 것으로 본관지붕의 청기와는 백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강도를 지닌 것으로서 15만장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를 지닌 청와대, 무자년 1월의 눈발이 예사롭지 않다. 청와대 겨울 풍경의 한 토막이기는 하지만 지나치기에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면 괜한 근심일까? 다가오는 변화에 국민은 어디에 있을까? 겨울 끝자락에 숨어 있는 봄이 매우 궁금하기만 하다.